판사는 고고(孤高)해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시험으로 임용될 수 있는 최고위직이다. 같은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같이 사법연수원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초임에서 판사는 검사보다 한 직급 높여 준다. 검사는 4급 상당, 판사는 3급 상당이다. 3급과 4급은 엄청난 차이다. 더군다나 행정고시 출신의 초임 5급과는 천양지차다. 5급에서 약 20여 년이 걸려야 오를 수 있는 직급이다. 4급 이하는 일반 공무원이고 3급 이상은 고위공무원단에 속한다. 약관(20대)에 시험으로 이렇게 고위공무원이 될 수 있는 나라가 한국 말고 또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글의 논지와는 상관없이 고쳐져야 할 제도로 본다는 것을 미리 덧붙인다.

국가가 이렇게 파격적인 예우를 해 줄 때는 그 이유가 있다. 직급을 올려주어 권위를 부여하고 높은 직급에 따른 높은 급여로 품위에 맞는 생활을 보장하려는 것이다. 일반인들은 그 권위를 존중해야 하고 당사자는 존중받을 만큼 착한 마음과 바른생활로 모범이 되어야 한다. 상대적으로 후한 급여는 단순히 높은 자리여서가 아니라 권위에서 올 수 있는 유혹, 즉 비리와 멀어지라는 뜻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판사라는 직책은 보통 자리가 아니고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보통과는 달라야 한다.

판사가 시정잡배나 진배없는 수준으로 전락하고 있다. 비리 판사도 나타나고 정치적인 이런 저런 잡음을 일으키는 판사들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 오만과 불손만 크지 정작 품위유지나 청렴 면에서 일반 공무원보다 나을 게 없어 보인다. 패를 가르는 데는 일반 공무원보다 더하다. 무슨 회 무슨 회 하여 끼리끼리 어울려 다른 판사나 판결을 비판하고 심지어 조직의 수장인 대법원장을 비판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모함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어제(22일)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법원행정처 컴퓨터에 비밀번호가 걸린 판사 뒷조사 파일이 있다고 들었다”는 한 모임 소속 판사가 의혹을 제시한 게 발단이다. 자기가 보았다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들었다는 것이다. 컴퓨터를 조사해야 하네 마네 의견이 분분하다가 새 대법원장 지시로 강제 조사에 들어갔다. 개인이 사용하는 컴퓨터는 본인 승낙 없이는 개봉할 수 없다는 것이 법 정신이자 사회적 합의로 본다. 법률적 권한으로 이를 보장해줘야 할 사법부가 스스로 이를 깼다. 결과도 헛소문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증거는 법률적 효력이 없다는 사법적 판단은 결과가 과정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원칙이다. 그런데 사법부 스스로가 이를 어긴 꼴이다. 하물며 결과도 의혹과는 달랐다. 이는 단순한 의혹이 아니라 '아니면 말고'식 모함의 성격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혹을 받은 여러 판사들이 이미 의혹을 받은 자체를 수치로 느낀 듯 스스로 옷을 벗고 나갔다. 좌익에 물든 이들은 잡초처럼 질긴데 고고한 판사들은 이를 견디기가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어느 판사는 '판사의 판결이 곧 정치'라고 공개 선언했다. 이는 현행법을 적용해야 하는 재판의 원칙을 깨고 정치적 판단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법률이 필요 없게 된다. 모든 사건을 판사가 알아서 판단을 하면 된다.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법치주의의 중심을 잡아야 할 법관이 스스로 이를 깨겠다는 선언이 아닌가?

정쟁(政爭)의 중심은 입법부다. 정치적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다툼이 있을 때 이를 법률적으로 정리해주는 곳이 사법부가 아닌가. 그런데 사법부가 사실상 정치를 선언하면 삼권분립의 헌법 정신을 훼손하고 나라 전체가 이전투구의 장으로 변질되고 만다. 이런 나라가 과연 법치주의를 유지할 수가 있을까? 만사 촛불로 해결하겠다는 것인가?

어쨌든 진상조사 결과는 발표되었다. 의혹을 제기한 자들에게서는 음모 여부를, 위법이라는 지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 컴퓨터를 영장없이 개봉한 과정이나 대법원장의 지시에 위법성은 없는지 조사를 해야할 것이다. 이대로 아니면 말고로 끝낼 일은 아닌 듯하다. 행여 당초 제시한 의혹과 상관없는 일을 들추어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흐지부지하는 일은 없는지도 생각 있는 국민들이라면 주의해서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