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물들을 겉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한국 전쟁이 발발할 당시 남북한 총인구는 어림 잡아 3천만 명이었다. 총인구 3천만 명중 전쟁중에 사망한 인구는 228만 명이다. 남북한 군인 사망자가 62만 명 정도 되며 민간인 사망자가 166만 명이다. 남북한 전체 인구의 약 7.6%가 전쟁중에 사망한 것이다. 행방 불명자와 포로로 잡혀간 군인과 민간인 납북자들이 포함되지 않은 숫자다. 휴전 이후 북한 내부에서 진행된 숙청 과정에서 살해된 인구는 17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숫자까지 포함하면 한반도 전체 인구의 약 13%가 김일성이 일으킨 전쟁과 이념의 문제로 희생된 것이다.

한국 전쟁에 대한 기억이 없는 필자는 어린 시절 동네 어른들로부터 한국 전쟁의 참상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어린 아이들에게 특별히 교육을 시킨 일은 없지만 여름밤 어른들이 모여서 두런두런 이야기하시던 내용들을 엿들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어른들이 말씀하셨던 이야기의 내용들은 바로 집단 학살이었던 것이다. 시골의 농부들이라 정확한 통계를 가지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당시 우리 고향에서 집단 학살된 정확한 희생자는 모르는 것 같았다. 300명이 될 것이라는 얘기와, 그 반론으로 터무니 없는 숫자라며 400명은 될 것이라는등 가벼운 입씨름을 하시던 생각이 난다. 불에 탄 시체의 신원을 확인할 방법이 없어 치아의 특징을 가지고 신원을 확인했다는 이야기와 치아의 특징이 없던 희생자들은 공동 매장을 했다는 이야기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필자의 먼 사돈뻘 되는 분이 북한을 방문한 일이 있다(북한 당국은 해외 거주자의 북한 방문을 제한적으로 허용했다). 20여 년 전의 일이다. 한국 전쟁중에 북한으로 도주했던 자신의 형을 만나러 북한을 다녀온 것이다. 그 분은 중학교 2학년 정도였고 그 분의 형은 모 상업학교 졸업반이었는데 남로당원이었다고 한다. 그 분의 형님은 북한에 올라가서 김일성대학을 졸업하고 그 당시 북한에서 비교적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다. 북한을 다녀 온 그 분과 호기심에서 여러 대화를 나누다가 필자는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의 형과 대화하면서 들은 얘기라며 그 당시 남한에서 남로당 연구로 이름을 떨치던 A라는 학자를 지칭하며 그 사람이 우리 고향에서 집단 학살을 할 때 불을 질렀던 장본인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A라는 학자는 한국 전쟁중 북한으로 탈출했지만 그후 남파 간첩으로 내려왔다가 체포되었던 사람이다. 우리 정부는 전향 선언을 한 그를 북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남로당 연구에 활용할 목적으로 중앙정보부 산하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채용하였다. 그 사람이 우리 고향 읍내에서 진행되었던 집단 학살의 현장 가담자였다는 사실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후 필자는 그 학자의 동태를 먼 발치에서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본인이 전향을 하고 또 우리 정부는 과거에 대해 선처를 하는 대가로 그는 대한민국을 위해 열심히 연구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얼마 전 심심하던 차에 그의 근황이 궁금하여 알아본 결과 그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가 말년에 수많은 좌파 학자들을 길러내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정부 산하의 연구원을 하다가 노태우 정부 이후 권위주의 정부가 약화되자,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을 했다고 한다. "이제까지는 노예의 언어로 글을 써왔다. 민족 문제의 해결이 없이는 계급 문제도 해결될 수 없다. 이제부터는 나의 주체적 언어로 말하고 글을 쓰겠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후의 행적을 검색해 보니 그는 결코 전향을 하지 않았고, 좌파 학자들을 양성하고 통일 운동을 열심히 하다가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그의 묘비에는 '통일애국지사'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고 한다.

필자는 '서천군 등기소 학살 사건'에 관한 방송 프로그램을 접해 본 일이 없다. 진실과화해 위원회에서 형식적으로 진상을 발표했으나 이를 뉴스화한 언론들은 1단 기사로 처리하고 있었다. 자유대한민국의 공영 방송이나 그 많은 언론들 어디에서도 그 사건에 대한 진상을 파헤치는 기사를 접해 본 일이 없다. 혹시 있었지만 본인이 지나쳤을 수도 있다. SBS인가 하는 방송에서 '그것이 알고 싶다' 정도의 프로그램 하나 정도는 방영했을 법도 한데, 그런 경우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제주 4·3 사건, 노근리 학살 사건 등은 언론들이 앞다투어 보도했으나 한국 전쟁 당시 학살된 민간인 1백만 명이 어떻게 희생되었는지에 대한 심층적인 보도는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서천군 등기소 학살 사건은 1950년 9월 27일에 일어난 사건이다. 사건의 내용은 좌파들이 서천군 우파 진영의 인사들을 등기소에 감금한 채 외벽에 불을 질러 250여 명의 우파 인사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이 학살 사건을 기획한 사람은 남로당 위원장 구재극, 정치보위부장 이병제, 내무서장 장한성, 인민위원장 이구몽 등 11명으로서 그 중 7명은 정치보위부 소속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서천군 내의 우파 인사의 희생자는 대전형무소로 끌려간 뒤 학살된 240여 명과 함께 500여 명에 이르며 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매년 열린다고 한다. A라는 사람이 11명의 주모자 명단에 있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행동대원이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외국인 학자들은 한국 전쟁을 가리켜 가장 잔인한 전쟁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입만 벌리면 민족을 외치는 동족들이 사상의 노예가 되어 같은 동족을 이처럼 무참하게 학살한 전쟁은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소련이나 중국의 경우에는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국가였지만 한국은 같은 핏줄을 타고 한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자랑으로 여기는 나라가 아니었던가.

A라는 인물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사상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물들을 겉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일부 좌파들 중에는 좌익 사상에 회의를 느끼고 스스로 깨달아 자유 시민으로 편입되어 모범적인 자유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도 많다. A라는 인물을 통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이미 25년이 넘는 노태우 정부 시절에 그가 주체적인 언어로 말을 하고 글을 쓰겠다고 선언을 했다는 점이다. 그는 25년여 전에 남한에서 좌익 활동을 해도 신변에 이상이 없을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후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이어지고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이어졌다. 한국 내의 좌파 역량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A라는 사람의 논문 지도를 받고 그의 사상을 전수받은 제자들은 한국 내에서 좌파의 대표적 학자들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