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관찰하면서 느끼는 것은 서양의 선진국들이 몇백 년을 고생하며 만든 민주주의라는 보석을 공짜로 얻은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요즘 한국 사회의 단면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성은 없고 감성만 넘치는 사회'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근대를 규정짓는 용어중에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이성'이다. 이성(理性)적이란 말은 현상을 이해하는 사고력이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생각이 논리적이어야 하며, 그 논리는 타당성에 기초를 두어야 하며, 사리에 맞아야 비로서 이성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성의 수준은 상대적인 것이다.

서양의 중세 시대는 이성과 신성(神性)의 싸움이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표현한 것을 두고 보통의 한국인들은 니체를 무신론자라고 단순 이해하지만 그의 선언 속에는 중세 시대 수백 년 동안 진행되었던 보편전쟁(이성과 신성의 대립)의 종언을 알리는 역사성이 함축되어 있다. 이성의 승리를 선언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 같은 논쟁을 해 본 역사가 없다. 보편 전쟁은 단순한 철학적 논쟁이 아니다. 정치적 논쟁이며, 과학과 미신의 전쟁이며, 이성과 신성의 전쟁이었다. 서양의 민주화는 이 같은 사상 논쟁과 계몽시대를 거쳐 발아된 결과다. 프랑스 혁명이 어느 하루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다. 촛불 난동은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역사성을 가진 혁명이 아니라 이성이 없는 좀비들의 난동에 불과하다.

한때 필자도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던 때가 있었다. 세계 최빈국에서 그처럼 짧은 기간에 경제적으로 선진국 반열에 진입한 나라가 세계 역사에 있었던가. 이 같은 자부심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광우병 난동을 목격하면서부터였다. 광우병 난동을 좌파들의 억지 주장으로 치부할 수만도 없었던 것이, 수많은 지식인들이 그 사태를 인식하는 비이성적 태도는 전형적인 후진국의 모습이었다. 철없는 것들의 아우성은 그런대로 이해할 수도 있었다. MBC 방송이 납양 특집 프로그램과 같은 픽션을 만들어 방송하고 교수들을 불러다 과학을 인용하고 거짓말쟁이들을 데려와 공포심을 주입시키는데, 이런 방송을 보고 어린 아이들이 그것을 사실처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을 것이다.

광우병 난동이 기승을 부리던 시점에 좀 배웠다는 인사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 대화를 잠깐 인용해 보자.

필자: 광우병에 걸릴 확율이 45억 분의 1이라고 하던데 저렇게 무법천지가 될 정도로 난동을 부려서야 되겠는가?
A: 45억이 아니라 가능성이 45조 분의 1이라도 수입하면 안되지.

필자: 당신은 사업하면서 비행기 타고 여행을 잘도 다니더만 불안해서 어떻게 다니나?
A: 그거야 할 수 없이 먹고 살려니 하는 짓이지.

필자: 그럼 앞으로 쇠고기 안 먹을 거야?
A: 30개월 미만을 먹으면 되지, 아니면 한우 먹으면 되잖아.

필자: 우령 30개월 넘는 쇠고기 먹는 미국인들은 다 죽겠네.
A: 미국인들은 30개월이 넘은 소는 안먹는다던데, 방송에도 나왔어

미국의 수퍼마켓에서 쇠고기 우령에 따라 판매하는 경우는 없다. 농무성에서 쇠고기의 등급을 분류하는 기준이 있고 마켓에서는 등급에 따라 가격 책정을 하지만 우령만을 기준으로 등급을 매겨 쇠고기를 판매하는 경우는 없다. 미국에서 쇠고기의 등급을 책정하는 기준은 맛이다. 우령, 육즙, 지방 함유량, 질김과 부드러움 등이 등급 기준이다. 우령이 포함되는 것은 우령에 따라 맛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최상의 등급을 Prime, 그 다음이 Choice 등급으로, 이 등급에 들어가는 우령은 대개가 42개월 미만이다. 중급을 Select 라고 하며, 그리고 마지막이 Standard 등급이다. standard의 경우에는 96개월 우령도 포함되어 있다. 미국인들은 스테이크를 만들어 먹지 않는 한 쇠고기 등급에 대해 무관심하다.

어느 모임에 갔다. 그 자리는 이명박 전 대통령을 성토하는 자리였다. 거의 모두가 이명박이 너무 해먹었다는 것이다. 어느 어느 공사에서 몇천억을 먹었고, 어디에서 몇조를 먹었고 어림 잡아 몇십 조를 먹었다는 식의 얘기들이 오갔다. 필자가 끼어 들었다. 증거가 있으면, 한 가지만 알려 달라고. 본인이 언론에 폭로하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들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인데 당신만 모르고 있다는 핀잔이 날아왔다.

다른 모임에 참석했다.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비교적 젊은 사람들이었고 천주교 신부님도 한 분 있었다. 이 모임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을 함께 성토하는 자리였다. 간혹 박정희 전 대통령도 비난 대상이 되고 있었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세월호가 박근혜 잘못 때문이라는 것과 국사는 돌보지 않고 주사나 맞고 업무 시간에 TV드라마나 시청하고 스위스에 몇조를 숨겨두고, 이명박은 하나은행을 통하여 400조를 미국에로 빼돌려 미국 국채에 투자했다는 등 그런 얘기들이 오갔다.

위의 실례에 나오는 화자들은 보통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학력은 높은데 이성이 없는 것이다. 특정인을 미워하는 감성은 작동하는데 이성은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이성이 작동하지 않으면 미신에 속고, 거짓에 속는 어리석은 국민이 된다. 이런 현상은 정치 현상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 문화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친일파 문제만 하더라도 감성적 단죄만 있을 뿐 이성적 합리적 접근은 금기가 되고 있다. '실증적'이란 말을 꺼내는 순간 친일 사학이 되는 것이다.

최근에는 김정은이 판문점에 나타나자 한국인의 풍부한 감성이 온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마치 통일이 낼 모레라도 곧 이루어질 거처럼 난리다. 놀라운 것은 어느 식사 자리에서 지인들이 보여주었던 태도였다. 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본래부터 나쁜 사람이 아디 있느냐? 옛날의 북한이 아니다. 어느새 언론들의 감성적인 편파 보도에 쇄뇌된 것이다.

엊그제 CNN 해설 뉴스를 보면 한국의 분위기와는 딴판이다. 해설자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판문점 선언과 한국의 분위기를 소개했지만 해설 중간에 등장하는 전문가들의 견해는 모두가 김정은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들이었다. 백악관의 공식 견해를 가리켜 단호할 정도로 냉정한(decidedly cool) 것이었다는 소개도 곁들였다. 한국의 언론은 의례적인 외교적 견해를 마치 축하하는 성명 정도로 왜곡 인용 보도하는 경우도 많았다. 판문점 선언에 부전적 평가를 내린 홍준표와 나경원은 어느새 반평화주의자로 매도되고 있는 것이다.

요즘 한국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관찰하면서 느끼는 것은 서양의 선진국들이 몇백 년을 고생하며 만든 민주주의라는 보석을 공짜로 얻은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계몽 시대 과정을 건너 뛰어 속성으로 주입된 지식들이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사실을 한국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한국인들은 이성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고 바람에 깃발 나부끼듯이 감성에 쉽게 흔들릴까? 우리 한국인들이 이성적 사고에 대한 훈련을 받은 일이 있었나? 제도적 교육을 통하여, 아니면 사회 생활을 하면서? 오늘날 전교조 교사들이 감성을 자극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교육 내용을 보면 다음 세대에도 우리가 바라는 이성적 사회는 도래하지 않을 것 같다.

여행에 필요한 짐을 꾸리고 잠깐 시간을 내서 평소 느겼던 생각들을 단상 형식으로 적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