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이든 노래든 누가 어떻게 만들었냐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 누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했는가 하는 역사성은 더 중요하다. 1980년대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고교 야구에 열광하던 시절, 청룡기 봉황기 대회를 중계하면, 경기가 끝난 후 승리한 학교의 校歌가 나왔다. 나는 부산 살았지만, 경북고, 광주일고, 군산상고의 교가를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한다. 경쾌한 군산상고 교가에 비해 경북고나 광주일고 교가는 묵직했던 기억이 난다(솔직히 부산의 명문고인 부산고나 경남고 교가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이 광주일고 교가를 바꾼다고 한다. 그 이유가 친일 인사가 작곡한 노래라서 그렇다고 한다. 광주일고뿐만 아니라 전국의 학교를 대상으로 전수 조사를 하는데, 좌파들이 노리는 궁극의 목표는 안익태의 애국가라는 소문까지 들린다.

태백산맥이란 영화를 보면 여순반란을 진압한 國軍이 군청에 진입하면서 軍歌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맨 마지막 가사가 “대한민국 군인되길 소원합니다”라는 이 노래는 처음 들었을 때 무척 좋은 곡이라고 생각했었다. 근데 박시춘이 작곡한 이 노래는 원래 일제 강점기 학병지원을 독려하는 ‘血書지원가’였다고 한다. 좌파들은 이것을 두고 남한은 일본찬양 학병지원 독려하는 노래를 軍歌로 改詞해서 사용했고, 북한은 독립군가를 軍歌로 사용했다는 식으로 대한민국의 親日을 부각시킨다.

이들은 혈서지원가 말고도 “양양한 앞길을 바라볼 때에”로 시작되는 한국군의 대표적인 군가인 용진가가 ‘아아 나의 전우[あゝ我が戦友]’라는 일본 군가와 시작 부분이 조금 닮았다고 해서 親日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우리가 고등학교 때 불렀던 학도호국단가도 ‘출정병사를 보내는 노래(出征兵士を送る歌)’라는 일본 군가와 처음 시작 부분이 비슷하다고 해서 日本風이라고 조롱한다.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따질 거면 일본 군가는 북한에 더 많이 남아 있다. 김일성 작곡이라고 선전하는 <조선인민혁명군> <모두 다 나서자> <모두 다 반일전으로> <반일가> <소년군가> <조국해방가> 여섯 곡은 모두 일본군가 <일본 해군>의 선율을 조금씩 변형한 곡이고, '결사전가'는 일본 군가 '적군은 몇만명 (敵は幾万)' , '반일혁명가'와 '일어나라 무산대중'은 일본의 '철도창가' 를 각각 베꼈다.

누가 누구를 베꼈는지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김대중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순안비행장에서 북한군 의장대가 연주한 대표적인 북한군가 용진가(遊撃隊行進曲)는 1908년에 나온 일본 노래 ‘멋쟁이 예절(ハイカラ節)’과 곡이 똑같다.

노래뿐이겠나, 태극기도 유심히 보면 일장기를 모방해서 만든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깃발이든 노래든 누가 어떻게 만들었냐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 누가 어떤 목적으로 그것을 사용했는가 하는 역사성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본곡에 가사만 바꾸어 부른 노래일지라도 그 노래를 독립군이 불렀다면 독립군가가 맞다고 본다. 친일인사가 작곡한 곡일지라도 그 노래를 국군이 부르며 공산군과 싸웠다면 그 때부터는 또다른 역사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남의 나라 국기를 모방해서 만들었을지언정, 3·1운동 때 그 깃발을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광복군이 그 깃발 아래서 독립을 위해 싸웠고, 대한민국 국민과 국군이 그 깃발 아래서 싸우고 건설했다면 하늘이 두 쪽이 나도 태극기가 대한민국의 國旗가 맞는 것이다.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가 친일을 했는지 안했는지, 광주일고 교가를 만든 사람이 친일인사인지 아닌지 잘 모르지만, 지금 현재의 시점에서 그런 논의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노래를 만든 사람은 한 사람이지만, 그 노래를 부른 사람은 수만, 수백만, 수천만이다. 누가 만들었는가 보다, 누가 얼마 동안 그 노래를 불렀는지가 더 중요하다. 어떤 동기로 만들어졌는가 보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해 왔는가 하는 그 역사성이 더 중요하다.

數萬의 同門들이, 수천만 민족이 70년에서 100년 이상의 시간 동안 그 노래를 부르고 그 깃발을 흔들었다면, 그 때부터는 출생과는 전혀 별개의 새로운 역사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반민족집단인 김정은 세습독재 왕조와 한 배를 탄 처지라 親日 말고는 팔아먹을 밑천도 바닥난 종북좌파들이 처한 현재의 딱한 처지를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억지나 궤변도 정도껏 해야지 너무 지나치면 역풍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