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가 부러질 듯 눈부시게 화려했던 벚꽃도 꽃샘바람에 다 떨어지고 진해 군항제가 끝날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 문득 아련한 옛날 생각이 난다. 벌서 40여 년 전 이야기다.

군항제가 다가오면 해군들은 수병이고 하사관이고 장교들이고 총각들은 뭔지 모를 무지개빛 꿈에 부풀기 마련이다. 벚꽃 놀이가 한창인 4월의 어느 주말 오후였다.

강철근 생도는 동료들과 함께 시외버스를 타고 있었다. 그의 옆자리에는 촌스러워 보이는 시골 처녀가 앉아 있었다. 그 아가씨는 얼마나 피곤했던지 늠름한 사관생도가 옆자리에 앉아 있는 데도 구벅꾸벅 졸았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머리를 강철근 생도의 어깨에 기댔다. 그러다가 든든한 사관생도의 어깨를 베개로 삼고 말았다. 강철근 생도는 별로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앞으로 별을 달 어깨를 시골 처녀가 베개로 삼다니. 짜증이 나서 슬그머니 어깨를 뺐다. 그러자 아가씨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머리가 원위치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연일 찬바람에 보리밭이라도 매다 왔는지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했다. 또 슬그머니 기댔다. 두어 번 실랑이를 하던 강철근 생도는 뭔가 불쾌한 기분이 들어 아가씨가 기댔던 어깨를 살펴보았다. 희끄무레한 비듬이 몇 개 떨어져 있었다. 검은 동정복 차림이라 비듬은 하나만 떨어져도 금방 눈에 띄었다.

- 사관생도의 어깨에 기대려면 머리나 좀 감고 기댈 일이지!

강철근 생도는 화가 나서 한 마디 면박을 주려다가 그만두었다.
- 얼마나 일이 고됐으면 저렇게 졸겠나!

어깨에 묻은 비듬을 털어내려고 보니까 희끄무레한 것이 고물꼬물 움직이고 있었다. 깨알보다 작은 것들이었다. 강철근 생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생도들의 숙소에 이를 옮겼다가는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도 모르게 구령이 터져나왔다.
" 동작 그만! 차려엇!"

강철근 생도의 우렁찬 구령 소리에 깜짝 놀란 아가씨는 고개를 번쩍 들고 눈이 희둥그레졌다. 버스 안의 모든 승객들도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따뜻한 봄날에 기어나온 가랑니들이 사관생도의 어깨에 상륙작전을 감행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 시골 아가씨도 깨닫지 못했다. 모든 승객들이 바라보니 부끄러워 얼굴이 발개졌다.

버스에 같이 탔던 동급생들의 입을 통해서 그 소문은 생도들 사이에 다 퍼졌다. 그 후로 강철근 생도는 임관도 하기 전에 '사령관'이 되었다. '이 사령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