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전(4월24일 오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문상을 다녀왔습니다.

오늘 아침 신문을 들고 화장실에 들어가 일면부터 제목을 읽어나갔지요. 그런데 사람들면의 부음기사를 보고 쿵 하고 가슴이 내려앉았습니다. 오랜 지인의 부음이 실려서였습니다. 재미작가 겸 재미저널리스트 피터현(현웅 1927~2019).

도서관에서 오늘 예정한 분량의 글을 쓰고 빈소를 찾았습니다. 고인의 영정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영정사진 아래에는 고인이 생전에 좋아한 와인 두병이 놓여있더군요.

벌써 25년 전입니다. 제가 월간조선 주니어기자이던 어느 날 조갑제 편집장이 불렀습니다. 재미작가 피터현이 회고록을 연재하기로 했는데 맡아서 책임지고 처리해주세요. 그때만 해도 저는 그의 이름만 들어본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피터현과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게 피터현은 우리말로 원고를 쓰지 못했습니다. 워낙 일찍 한국을 떠나 영어로 쓰는 게 자연스러웠기 때문입니다. 피터현의 영어 원고를 신문기자 출신인 김준길 씨(주미공사 역임)가 번역해 저한테 보내왔습니다. 저는 그 원고를 조금 손보고 제목과 중간제목을 달아 데스크에 넘기는 일을 했습니다. '바람처럼 세계를 떠도는 사나이 피터현 회고록'라는 제목으로 첫 회 연재분이 나갔습니다.

첫 회부터 피터현 회고록은 월간조선의 인기 연재물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원고를 손꼽아 기다리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이야기가 전개될까, 정말 궁금했습니다. 그가 경험한 세계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피터현은 1940년대 말 미국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 뒤로 저널리스트로 세계를 방랑하며 영어로 글을 썼습니다. 피터현의 회고록은 시간적으론 1950년대~1970년대, 공간적으론 뉴욕, 파리, 로마, 런던 등을 망라했습니다. 그 공간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이야기가 회고록의 주류를 이뤘습니다. 흥미진진했습니다. 영어는 말할 것도 없고 불어가 유창한 데다 매력적인 외모이다 보니 피터현은 그 당시 한국인은 상상도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 교유를 가졌습니다. 저는 그의 원고를 제일 먼저 읽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한 번 뿐인 짧은 인생에서 피터현처럼 사는 인생도 있구나!

저는 기자로서 피터현의 열렬한 팬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피터현이 귀국할 때마다 만났습니다. 피터현으로부터 미식을 배웠고 지성을 배웠고, 그리고 인생을 배웠습니다.

필자와 편집자의 관계로 시작되었지만 우리는 나이차를 뛰어넘는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가 전화를 걸어오면 만사를 제쳐놓고 나갔습니다.

그의 형은 ‘6·25전쟁의 쉰들러’로 불리는 현봉학 박사입니다. 1950년 12월 흥남부두는 눈보라 휘몰아치는 아비규환이었습니다. 후퇴하는 유엔군을 따라 무작정 부두로 몰려든 피난민들. 미군 입장에선 피란민은 적국의 주민이었습니다. 그때 현봉학이 미군 참모장을 설득합니다. 공산치하에서 자유를 찾아 탈출한 저들을 수송선에 태워 달라. 북한주민 10만 명은 기적처럼 구출되었습니다. 피터현은 형님 얘기를 제게 들려주었습니다.

내가 그를 오래도록 좋아한 데는 그의 인간성이 한몫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권위적이지 않았습니다. 젠체하거나 위선적이지 않았습니다. 언행이 일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34년의 차이가 났지만 거의 모든 주제로 대화를 나눠습니다. 그로 인해 무엇보다 미식의 에로티시즘에 눈을 떴습니다. 국내 프랑스요리의 대가인 박효남을 알게 된 것도 그 덕분입니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게 4년 전 쯤입니다. 서촌에서 피터현. 현영인 부부와 박효남 부인을 만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셨습니다.

빈소에서는 소주 대신 와인이 나왔습니다. 술을 못하는 나였지만 피터현을 생각하며 두 잔이나 마셨습니다. 부인으로부터 고인이 3년여 치매로 고생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불콰하게 취기가 돌자 피터현과 함께했던 시간들이 하나씩 떠올랐습니다. 고인은 프랑스에 작은 샤또를 갖고 여름마다 그곳에서 보내곤 했습니다. 저한테 놀러오라고 그렇게 많이 얘기했는데, 결국 그곳에 가지 못했습니다.

런던 출신 영국인 사위(Adam)와 런던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저는 깨달았습니다.
제가 15년간 천재의 흔적을 따라 세계를 방랑해온 것이 사실은 피터현의 노마드적 삶에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그의 탐미적 인생관과 코스모폴리탄적 삶을 동경했기 때문이었음을.

저는 그걸 까마득히 잊고 있었습니다.

부인에 따르면 유해는 코네티컷주 켄트에 마련해둔 묘역에 안장된다고 했습니다. 그러고보 니 고인이 코네티컷 얘기를 자주 했던 것이 생각나는군요. 저는 ‘뉴욕이 사랑한 천재들’을 쓰려 2011년과 2012년 코네티컷을 찾았던 적이 있습니다. 아서 밀러의 묘지와 마릴린 몬로와 살던 집을 찾아서였었죠. 그때 처음 가보는 코네티컷이 이상하게 낯설지 않아 의아하게 생각했었습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선생님 때문이었습니다.

피터현 선생님, 고맙습니다. 제 인생에서 선생님을 만난 건 큰 행운이었습니다. 이제 편히 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