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자리를 물려받아 잘해보려 노력도 해봤으나 나라가 이미 허약한 것이 쌓여서 고질이 되고 피폐가 극도에 이르러 어찌할 수가 없어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 황제와 일본 황제로부터 각각 전권을 위임받은 이완용 총리와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은 <한일병합조약>에 기명하고 조인했다. 조약의 제1조는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함>이고, 제2조는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조항에 기재된 양여를 수락하고,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락함>이라고 되어있다 수락·승락이라니 비위가 상하는 표현이지만 당시 분위기를 헤아릴 수가 있겠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8월 29일 일본 수비군의 경계 속에 서울 곳곳에 벽보가 붙여졌다. 조약의 효력이 발생한 날이다. 「일황명치의 병합 조서」 「망제순종의 호국 조서」, 그리고 통감 데라우치의 담화문이었다. 또한 별도의 문서를 통해 <순종은 창덕궁 이왕으로, 황태자와 장래의 세자는 왕세자로,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으로 하고, 그 부인들은 왕비·왕세자비·태왕비로 하여 세습케 하고, 일본 황족의 예로써 '전하'의 경칭을 사용한다. 이왕(순종)의 의친 이강·이어 부부는 공과 공비로서 '전하'를 사용하고 그 자손은 영예를 세습케 한다.>라고 약속했다. 일본 황실령 34호로 李王家를 일본 궁내부대신 관리하에 두었으며, 세비로 연 150만 엔을 총독부 특별회계에서 지출토록 했다.

같은 날 『조선왕조(순종) 실록』 마지막 장에는 「일본국 황제에게 한국 통치권을 양도하다」라는 제하에 황제의 교시를 기록했다. 내용을 요약하면 <황제 자리를 물려받아 잘해보려 노력도 해봤으나 나라가 이미 허약한 것이 쌓여서 고질이 되고 피폐가 극도에 이르러 어찌할 수가 없어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치는 <민중을 구원하려고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라며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안주하여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으라>라고 했다. 순종의 심정을 충분히 헤아릴 만하다. 가식은 없어 보인다.

그리하여 대한제국은 다시 조선으로 격하되었다. 일본제국 천황의 신민이 된 조선인들은 대부분 순종 임금의 교시대로 별 소란없이 일상에 임했다. 평민들로서는 양반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로부터 해방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도로를 닦고 다리를 놓는 등의 근대화 사업에 투입이 되어 에누리 없는 임금을 받을 수가 있었다. 서당에도 못 보내던 자식들을 신식 학교에 보낼 수 있게 되어 알게 모르게 근대화 물결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일제 식민지 이전 조선의 실상을 좀 더 들여다 보자. 조선시대 한국에 체류하거나 다녀간 외국인들이 남긴 기록들을 살펴보면 참담하다. 19세기 말 일본과 한국에서 활동한 미국의 동양학자이자 목사인 윌리엄 그리피스는 그의 저서 『은자의 나라 한국』에서 <공무원들은 탐욕에 미쳐서 백성의 피를 빨아먹고 산다. 마치 물을 마셔도 갈증이 계속되는 것 같은 관권 만능이라는 병에 걸려 있다>라고 썼다. 또한 <'착취'를 조선의 관리들은 '수완'이라고 생각해왔다. 조선에는 '착취하는 계급'과 '착취당하는 계급'이라는 두 부류의 계급만이 존재한다.-노스 클리프 영국 저널리스트> <조선의 정부는 하나의 거대한 강도다.-조지 클레이턴 포크 주한 미 공사> <조선의 관직과 재판의 판결은 마치 상품처럼 사고팔 수 있으므로 뇌물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다.-이자벨라 비숍 영국 여행가> 특히 눈에 띄는 기록은 <조선 사람들은 음모의 명수인데, 어머니의 젖꼭지를 물고 있을 아기 때부터 음모를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호러스 알랜> 가난과 관리들의 등쌀에 주민들의 생존수단이 음모와 거짓말이 된 것으로 본다.

이 외에도 여러 부정적인 기록이 많다. 비단 외국인의 눈에만 이렇게 비친 것은 아니다. 조선 영·정조 때 실학자 박제가는 『북학의』에 이렇게 썼다. <백성들은 고된 노동에 열 손가락 모두 뭉툭하게 못이 박혀있었지만. 입고 있는 옷이라고는 십 년 묵은 헤진 솜옷이 전부이며, 먹는 것이라고는 깨진 그릇에 담긴 밥과 간도 하지 못한 나물뿐이고 부엌에는 나무젓가락과 빈 항아리만이 놓여있을 뿐인데, 이유는 간단하다. 무쇠솥과 놋수저는 관리들이 빼앗아갔고 군포(병역을 면제하여 주는 대신으로 받아들이던 베) 대신에 동전 2.5냥씩을 해마다 양반·관리들에게 납부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100여 년 후 조선이 망할 때까지 이러한 현상은 점점 심화되어 <어찌할 수도 없는 '고질'>에 이르렀고 임금도 손을 쓸 수가 없으니 통치권을 포기한 것이다.

이렇게 수백 년 동안 달려 오던 '지옥 열차' 조선을 멈춰 세운 주체가 바로 일본이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청나라 손아귀에서 해방시켜줬다. 1895년 4월 17일 <제1조. 청은 조선이 완결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하며 무릇 조선의 독립 자주 체제를 훼손하는 일체의 것, 예를 들면 조선이 청에 납부하는 공헌, 전례 등은 이 이후에 모두 폐지하는 것으로 한다.>라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대한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자주 능력이 없어 결국 일본에 합병되고 만 것이다. 이를 '일본의 흉계'로만 치부하려는 것은 정직하지가 못하다. 망할 만하니 망한 것이다. 청·러·일 등 주변 3국 중에 일본이 지배하게 된 것은 일본이 가장 강했기 때문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