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나는 신념에 가득찬 자들보다 의심에 가득찬 자들을 신뢰한다." 1989년인지 90년인지 정확한 연도를 기억할 수 없는 어느날 골프장 휴게실에 앉아 있다가 테이블 위에 뒹굴고 있던 한국일보 지면을 펼쳐들었다. 거기에는 거의 한 면에 걸쳐 김훈의 ‘문학기행’이라는 글이 실려 있었다. 작가가 아닌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김훈이 쓴 글이었다. 문학 평론가 이어령 이후 처음 대하는 명문장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단숨에 그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가 소설가로 등단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순신 장군에 관한 소설로 크게 득명을 했다는 소식도 언론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그의 소설은 구할 수가 없어 별로 읽어 본 일이 없지만 간혹 언론에 등장하는 그와의 인터뷰 기사나 그가 쓴 수필 형식의 단문들이 등장하면 빼놓지 않고 읽는 편이다. 그의 글은 문장이 좋은 것도 그렇지만 그의 인생관, 세계관, 문학관 등을 엿보면서 당연한 것 같은 내용이지만 무언가 잃어버린 것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오늘 조선일보 인터넷판을 검색하다가 함영준의 인간 탐구 ‘김훈의 무언의 울림'을 읽어 보았다. 그 내용의 일부를 옮긴다. 3회에 걸쳐 연재된 김훈에 관한 글 중에서 두 번째에 해당되는 글 내용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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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준의 인간 탐구

김훈은 언어의 폭력화ㆍ무기화를 지적했다.
“언어는 타인에 의해 부정되고 수정될 수 있는 허약한 것이라는 점에서 힘을 갖는데, 우리 시대 언어는 돌처럼 굳어지고 완강해 무기를 닮아가고 있다."

그는 기자는 “본질적으로 문장가가 아니라 스파이"라고 규정했다. 지난至難한 사실 확인fact finding 작업을 거쳐 정보를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A란 사람을 ‘개자식’이라고 하고 싶어도 그렇게 쓰는 순간, A가 아닌 내가 개자식이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A가 개자식일 수밖에 없는 이유와 물증을 찾아야 한다."

어느 날에는 우리의 사고思考체계에 근본적 의문을 던졌다.
“요즘 우리는 ‘이것이 무엇인가?’, ‘왜 이런가?’, ‘이것과 저것과의 관계는 어떤가?’ 등의 과학적 사고 대신 ‘내 마음에 드나, 안 드나?’ ‘내 생각과 맞나, 안 맞나?’, ‘내 편인가, 아닌가?’ 식의 정서적·이념적·정치적 생각을 한다. 신념의 언어가 아니라 과학의 언어로 사유思惟해야 한다."

보수와 진보로 나뉜 언론이 같은 사건을 놓고 정반대로 해석하는가 하면, 서로 상대방에 대해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는 일들이 더욱 심해졌다. 술이 얼근히 들어가면 김훈은 그 큰 눈을 똑바로 뜨고 후배 기자들을 질책했다.
“지배적 언론이나 담론들이 당파성에 매몰돼 그것을 정의·신념이라고 믿고 있다. 나는 신념에 가득찬 자들보다 의심에 가득찬 자들을 신뢰한다."

-김훈의 무언의 울림 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