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의 좋은 열매>

친구가 내가 요즈음 사는 바닷가 마을로 찾아왔다. 그는 평생 ‘논어’와 ‘사기’ 그리고 중국의 작가 노신을 공부하고 사람들에게 가르쳐 왔다. 그는 지금도 노벨문학상을 탄 중국의 작가 ‘모엔’과 우정을 나누고 당나라의 시들을 번역해 알리고 있다. 그는 중국어로 에세이를 써서 발표하고 중국에 가서 한국에 대해 강연하고 있었다. 그는 일제 강점기 조선의 독립투쟁가와 중국 여성의 사랑을 묘사한 소설을 중국인들에게 소개하고 있었다. 바닷가 나의 집에서 같이 이틀을 묵으면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가 이렇게 자신의 소감을 말했다.

“늙음이란 정말 좋은 것 같아. 여유가 생겼으니까 말이야. 자네와 파도치는 바닷가 모래밭을 산책도 하고 어릴 적 하고 싶었던 바둑도 두고 탁구도 치고 당구도 한 게임 하니까 정말 즐거웠어. 어릴 때는 하고 싶었지만 철저히 자제했었잖아? 나는 공부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잡기는 일체 배제하고 살아왔으니까 말이야.”

고등학교 시절 동기인 그에게 호감은 품었지만 흉허물 없이 놀지는 못했다. 당시 그는 벌써 사회의식이 앞서가고 정신적으로 몇 계단 높은 곳에 서 있는 느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노인이 된 이제야 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한다.

“어떻게 살아왔어?”

내가 물었다. 바닷가 집 호젓한 분위기가 저절로 마음을 열게 한다. 창 밖으로는 검게 드러누운 바다가 달빛에 희미하게 반사되고 있었다. 투명한 창 위로 하얀 보름달이 겨울 허공에 떠 있었다. 두 노인의 영혼은 소년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클럽활동을 하는데 우연히 흥사단에 들어가 안창호 선생의 정신을 접했어. 그때 우연히 함석헌 선생의 강연을 들었어. 신선같이 수염과 머리털이 허연 영감이 그 무서운 독재 시대에 칼같이 바른 소리를 하는 걸 보고 감동을 받았지. 그래서 나는 대학에 진학한 후 스스로 운동권이 됐어. 그 안에서 우리 시대의 수많은 영웅을 봤지. 장준하 선생이나 백기완 같은 분이 그 무서운 시대를 정면으로 치고 나가는 용기를 보면 감히 쳐다볼 수 없는 거대한 산을 보는 것 같았어. 그 다음 시대의 대표가 조영래, 김근태, 장기표였지. 전두환 시절 운동권이 철저히 초토화됐어. 백기완 선생이 남산에 잡혀가서 완전히 떡이 됐지. 민청학련 사건 등으로 모두 주눅이 들어 기를 펴지 못할 때야. 그런 상황에서 김근태 선배가 무섭게 치고 나간 거야. 대단했어. 전태일이 대학생 친구 한 명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소망했을 때 그 대상이 된 사람이 장기표 선배고 분신한 전태일의 평전을 쓴 게 조영래 선배야. 조영래 선배는 살았다면 아마 대통령을 했을 거야.”

“자네도 그 운동권에서 계속 있었으면 국회의원도 하고 장관도 했었겠네?”
아마 그랬을지도 모른다.

“나도 한때 대통령을 꿈꾸는 실세 야당 국회의원 보좌관을 했어. 그런데 내 적성이 정치하고는 맞지 않더군. 그래서 뒤늦었지만 공부 쪽으로 방향을 잡았지. 당시 운동권 출신이니까 해외로 가기가 힘들더라구. 고급공무원 두 명의 보증서가 있어야 나갈 수 있는 시절이었어. 그렇게 대만대학에 가서 공부했지. 백화체 이전의 중국 고전의 한자를 디자인 외우듯 배워가면서 논어와 사기 그리고 노신의 문학에 전념했지.
뒤늦게 공부를 하려니까 조급증이 나더라구. 다급하게 공부를 하는데 내게는 순간순간이 고통이었지. 절박했으니까. 한자 한 글자나 중국어 발음 하나를 익히는 데도 최선을 다해 공을 들였어. 무슨 일이든지 자기의 영혼까지 다 바쳐야 일류가 될 수 있는 거 아니야? 바둑의 프로들을 봐. 여기로 하는 게 아니라 어려서부터 자기를 던져서 그 세계에 몰입해야 프로가 될 수 있는 거 아니야. 나도 마찬가지 마음이었어.
우선은 삼류가 되기로 목표를 잡았어. 삼류가 돼야 이류나 일류가 보이는 거야. 단번에 일류를 감별하기는 쉽지 않아. 나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서 중국작가 노신을 공부하고 논어와 사마천의 사기를 공부했어. 뭔지 모르고 시작했는데 그중 하나만 해도 어마어마한 세계가 그 속에 있더라구. 그걸 일평생 하게 된 거야. 운이 좋았는지 우연한 기회에 대학교수가 되고 일류대학 인문대학원장까지 했으면 그런대로 실패한 인생은 아니지 뭐. 더 감사한 건 정년퇴직을 한 지금도 중국의 학계에서 초청을 해 줘서 그곳에 가서 강연을 해.”

“평생을 학자로 교수로 또 남들이 하고 싶어 하는 좋은 연구대상을 가지고 살아왔는데 인생에 대해 한 마디 해 봐.”

“평생을 늘 조급해하면서 서둘면서 살았어. 뭐가 그렇게 급했는지 말이야. 살아 보니까 너무 조급히 생활을 해서 속도자살을 할 필요가 없어. 좋은 삶을 살려면 기본적으로 소같이 둔해야 해. 일을 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 하고 말이지. 우선 작은 일에 만족해야 하는 거 같아. 그러나 잘하려고 노력해야지. 게으름 피지 않고 가면 소걸음이 늦어도 천리를 간다는 말이 있잖아?”

젊은 사람들이 들어두면 좋은 늙은 선생님의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