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매스게임에 환호하는 한국인
어떤 집단의 언어전술을 알아보기 어려운 데는 오히려 언론자유가 상당히 보장된 곳, 적화통일 전의 월남이나 오늘의 한국이다.

최성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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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트겐슈타인의 화용론(話用論)을 들먹일 것도 없이, 말은 특히 추상적인 용어는 쓰는 사람에 따라 사전적 의미와 얼마든지 다른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 정반대의 뜻으로 사용하면서, 일반 사람들이 사전적 의미로 쓴다고 생각하고서 귀를 쫑긋 세우면, 그 의미를 알아듣는 사람들끼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어리석은 자들을 서서히 말의 올가미에 씌워서 귀여운 박수부대로 편성한다.
  
   공사판에서 한 인부가 ‘벽돌 다섯 장’이라고 하면, ‘벽돌 다섯 장이 있다’는 것인지 ‘벽돌 다섯 장을 갖고 오라’는 것인지, 그 말을 듣는 다른 인부는 즉시 알아차린다. 사회적 약속에, 공사판이라는 특수한 환경이 덧붙여져서 그 말의 의미가 명확해지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공사판의 인부들은 아주 경제적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는 이처럼 사회적 문화적 약속인 것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파시즘이나 공산당, 좌파 등이 정치적 목적으로 치밀하고 집요한 언어전술을 동원하여 이런 사회적 문화적 약속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은 몰랐던 것 같다.
  
   파시즘이나 공산당이 물리적 정신적 폭력을 총동원하여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공포 분위기를 만들어 선전선동을 일삼으면, 거주이전의 자유가 박탈당한 민중은 마침내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의 무의식 세계마저 바꿔 권력이 원하는 대로 믿어 주고 말해 준다. 이런 연극은 밖에서 보면 너무도 그 속이 빤히 들여다보인다. 이 경우에도 실은 민중이 완전히 세뇌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말과 현실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불평등이 봉건시대보다 더 심한 상태에서 완전평등을 노래하고 배고픔이 일상화된 상황에서 지상낙원을 날마다 되뇌면, 결국에는 사람들이 나라 전체에서 쓰이는 언어의 의미가 사전적 의미와는, 전통사회의 문화적 의미와는 정반대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쏟아지는 말의 홍수를 아무도 믿지 않게 된다. 극도로 암호화된 언어를 새로 발달시키기도 한다. 그러다가 모순이 쌓이고 쌓여 역사의 거대한 물결에 의해 누구도 웃을 수 없는 희극을 연출하는 권력이 익사하는 순간, 사람들은 일제히 말의 의미를 제 자리로 돌려놓는다.
  
   어떤 집단의 언어전술을 제일 알아보기 어려운 데는 오히려 언론자유가 상당히 보장된 곳이다. 이를테면, 적화통일 전의 월남이나 오늘날의 한국이다. 심지어는 현란한 언어전술을 구사하는 집단조차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치적 목적에 의해 1% 진실을 100% 진실로 둔갑시키고 99% 진실에는 아예 눈을 감거나 귀를 닫고 그 1% 진실을 100% 진실이라고 스스로 믿어 버리면, 본인 스스로 빈 라덴 같은 양심수가 되고 라스콜리니코프 같은 확신범이 되어 스스로를 시대의 의인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더군다나 이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매체 중 가장 강력한 방송을 나팔수로 삼으면, 99%의 진실에 원천적으로 차단된 일반 사람들은 사전적 의미와 정반대되는 의미를 사전적 의미로, 사회적 문화적 약속에 따른 의미로 알고 급속히 권력의 언어에 동화되어 간다.
  
   그러면 아무리 소크라테스가 1%의 진실에 대해 꼬리에 꼬리를 문 의문을 던져서 99%의 진실에 이르는 길로 인도하려고 애써도 사람들은 슬슬 피한다. 도리어 그를 미친 자라고 혀를 차면서 영원한 안식을 가져다 줄 독배를 권유한다.
  
   소크라테스보다 더 이들의 기만적 언어전술을 잘 알아차리는 자는 정작 따로 있다. 그는 바로 이런 현상으로부터 가장 큰 이득을 취하는 자다. 인도차이나에서는 월맹이 바로 그런 세력이었다. 한반도에서는 김정일 집단이 바로 그런 세력이다. 그래서 이들은 ‘쓸모 있는 바보’들을 마음껏 이용하고 제 세상이 되면, 제일 먼저 ‘더 이상 쓸모없는 바보’들을 제거해 버린다.
  
   사람들은 언제 ‘언어최면’에서 깨어날까. 문화권력과 정치권력과 방송에 의해 여론주도층이 새로 형성되면, 그 사회는 이미 자정(自淨) 능력을 상실해 버린 상태니까, 파멸을 겪지 않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전적 의미와 정치적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자유는 피의 늪에 피어나는 연꽃이다. 스스로 쟁취하지 못하고 두 번이나 샘 아저씨로부터 얼떨결에 자유의 흰 꽃을 한 아름 또 한 아름 공짜로 안게 된 ‘주희의 서자(庶子)’들은 잠자는 숲 속의 미녀가 막 잠에서 깨어나 살포시 짓는 웃음보다 새하얀 그 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아직도 현실의 독과 관념의 꽃을 구별할 줄 모른다. 자유인만이 즐길 수 있는 ‘언어 게임’을 너무너무 따분하고 시시하고 재미없다고 쓰레기통에 처넣고 독재자가 조종하는 ‘언어 매스게임’에 환호하며 귀신에 홀린 듯이 한 발 한 발 통제와 빈곤의 미래로 다가서고 있다. 기어코 스스로의 피로 만들어질 거대한 늪에 선홍빛 연꽃이 피어나야 자유의 소중함을 알 것 같다.
  
   (2005. 1. 2.)
  
  
[ 2006-01-03, 07:4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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