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을 욕한 사람과 박정희를 욕하는 사람들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에 비해 압도적으로 무려 열 배나 잘 살게 만든 박정희 전대통령을 헐뜯는 것을 평생 직업으로 삼아서 주거니 받거니 권력을 쟁취하는 오늘날과 어찌 그리 닮았는지!

최성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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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을 욕한 사람과 박정희를 욕하는 사람들
 
   국가 대항전 A매치 축구 경기에서 백 번을 싸워 백 번을 이기되 99번을 10:0으로 이기고 단 한 번 10:1로 이겼는데, 그 한 골이 자살골이었다면? 아마 이런 일은 영원히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전쟁에서 바로 그렇게 이긴 장군이 있다. 그분이 바로 이순신 장군이다.
  
  이순신 장군은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지 불과 1년 2개월만에 조정에서 아무도 도와 주지 않는 상황에서, 오히려 헐뜯기만 하는 상황에서, 완벽하게 전쟁에 대비하여 그 당시 세계 조총의 반을 가진 왜군을 맞아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그냥 패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하나같이 압승했다.
  그것도 단순히 이긴 것이 아니라 야구로 말하면 거의 퍼펙트 게임을 했다. 깨뜨린 적선은 무려 935척, 깨뜨려진 전선은 단 한 척도 없었고 실수로 좌초된 전선이 단 한 척만 있었을 따름이다. 죽이거나 부상 입힌 적은 무려 12만 6천여명, 아군으로서 죽거나 부상당한 이는 겨우 1천 22명밖에 안 됐다(구국의 명장 이순신, 교학사, 최석남 저).
  
  그런데 당시에 전라좌수영의 두 배나 되었던 경상우수영의 원균은 한 척 당 150명 내지 200명이 타는 조선의 주력선이었던 판옥선 곧 전선(戰船) 44척 가운데, 무려 40척을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스스로 수장시켜 버렸다. 그러나 군대와 전선이 경상우수영의 반도 안 되는 전라좌수영의 이순신 장군은 불과 24척의 전선으로 연전연승했다. 원균만이 아니다. 경상좌수사 박홍도 부산 앞 바다에서 전투 한 번 않고 달아났다. 그 곳에도 전라좌수영보다 많은 전선이 있었다.
  바다만 그랬던 게 아니라 육지에서도 한양에서 병졸을 모았지만, 단 100명도 아닌 불과 63명을 모았을 따름이다. 아무리 긁어 모아야 조선 전체에서 1만 명을 모을 수 없었다. 율곡의 10만 양병설이 꿈같이 들렸다. 애시당초 그것은 불가능한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조선은 문약(文弱)에 찌들어 있었다. 문서상의 병력이 아니라 실지로 장부대로 병력을 유지하고 훈련한 장군은 조선 전체에서 이순신 장군밖에 없었던 것이다.
  
  200년 동안 평화롭게 살았기 때문에, 전쟁과는 너무나 오래 담을 쌓고 살았기 때문에 인구 10만의 한양에서 긁어모은 그 63명조차 하나같이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이일이니, 신립이니 천하의 명장 어쩌고저쩌고 했지만, 조총으로 무장한 15만 명의 정병 왜군을 맞이하여 숫제 전쟁이 될 리 없었다.
  조령의 양쪽에 아군을 매복하여 왜군을 맞이했으면. 신립이 이길 수도 있었을 거라고 하지만, 그건 소설 삼국지를 읽고 병법을 논하는 것만큼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단지 하루 이틀 전쟁을 더 끌 수 있었을지는 모른다. 그 정도로 조선군은 허약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모든 상황을 이해해야 이순신 장군의 승리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오죽 했으면 일본의 한 역사가가 이순신 장군을 '역사의 기적'이라고 했을까.
  
  이순신 장군을 집요하게 모함하여 삼군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거북선 포함하여 무려 전선만 102척(도합 204척)을 단 하룻밤에 힘도 한 번 못 쓰고 망실했다. 적의 손실은 거의 전무했다. 일본으로서는 거의 완벽한 대첩이었다. 일본은 헛소문을 퍼뜨리는 한편, 간첩 요시라를 동원하여 그럴 듯한 정보로 선조와 조정 대신과 원균 등 부국강병에는 철저히 무능력하고 공이 많은 사람일수록 남을 헐뜯어서 권력을 차지하는 데 이골이 난 조선인들을 현혹시켜 마침내 공포의 전신(戰神) 이순신 장군을 몰아낸 후 아니나다를까, 공(公)을 따라 연전연승하던 사자 같고 범 같은 용장과 맹장을 다 거느리고 있었지만, 그들을 전혀 통솔하지 못한 만용과 시기(猜忌)의 장군 원균을 상대로 어린애의 팔을 비틀 듯이 아주 손쉽게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과 명량대첩을 합친 것 못지 않은 대승리를 오늘날 거제대교가 놓인 칠천량의 해전에서 쟁취한 것이다!
  
  (임란 당시가 민주와 개혁과 통일이라는 이름으로 광란의 권력 투쟁을 일삼고 있는 현대와 어찌 그리 닮았는지! 조선의 임금과 문무양반들이 틈만 나면 충무공을 헐뜯었듯이 한민족 5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에 비해 압도적으로 무려 열 배나 잘 살게 만든 박정희 전대통령을 헐뜯는 것을 평생 직업으로 삼아서 주거니 받거니 권력을 쟁취하는 오늘날과 어찌 그리 닮았는지! 중국인들은 우리와 판이하다. 야당을 여당과 비슷하게 허용한 박정희와는 달리 등소평은 야당을 단 한 명도 허용하지 않고 일당 독재를 했지만, 천안문 광장에서 맨주먹의 데모대를 탱크로 깔아뭉갰지만, 13억의 중국인들은 그에게 꿈에서조차도 감사한다. 그를 독재자라고 하는 사람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정말 어쩌다가 그런 사람이 있지만, 다들 소 닭 쳐다보듯 한다. 일부로 전체를 매도하는 것이 같잖아서이다. 독재와 민주는 물과 불처럼 그렇게 선명하게 갈라지는 게 아님을 그들은 쓰라린 긴 역사적 경험을 통해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택동에 비하면 등소평은 민주의 화신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김일성에 비하면 박정희는 민주의 화신인 것이다. 심지어 중국을 초강대국 미국과 맞장 뜰 수 있게 키운 등소평에 비해서도 박정희는 민주의 화신인 것이다. 민주와 독재는 상대적인 개념인데, 이를 절대적인 개념으로 확신하는 한국의 절대다수 지식층은 하나같이 백면서생이라 할 만하다. 이 나라가 어찌되려고, 원균처럼 무능하나 권력만 탐하고 고분고분하지 않는 아랫것들을 전부 지옥으로 몰아넣는 김일성·김정일은 어찌 그리 추앙하는지! 그 손을 한 번 잡으면 감격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하다니!)
  
  바야흐로 임진왜란은 일본의 대승리로 대단원을 내리기 직전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선은 기적을 낳는 장군 충무공이 있었다. 이 때 도망간 배설의 12척만으로 충무공은 다시 울돌목(명량)으로 적선 200여척을 유인하여, 그 중 133척과 싸워 전선을 단 한 척도 잃지 않고 이를 전몰시켜 버렸다. 이미 조선을 돕던 명도 그 국운이 다한 상태이고 남의 나라 전쟁에서 더 이상 싸울 의지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만약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순신 장군이 기적같이 명량대첩을 이끌지 못했으면, 일본은 400년전인 바로 그 때 조선 전체를 속국으로 만들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랬으면 옛날에 한 왕조가 교체되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햇수만큼 다시 말해서 최소한 200년은 일본이 우리 나라를 지배했을 것이다. 일본은 칠천량 해전으로 바다와 육지를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에 수륙 양면으로 한양을 공격했으면 조선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파죽지세로 평양과 의주로 쳐들어가는 것도 여반장이었다. 조선은 군인도 다 도망 간 전선이 12척밖에 안 남았지만, 일본은 이 당시 대소 1,000 척의 전선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어마어마한 의의가 있는 대첩을 거둔 이순신 장군에게 선조는 아무런 포상도 하지 않았다. 공에게 은자 20냥과 비단 한 필을 내린 사람은 오히려 명의 경리 양호였다. 가등청정이 쳐들어온다는 거짓 정보로 이순신을 하옥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간첩 요시라에겐 선뜻 은자 80냥을 하사했던 선조였다. 선조 이하 조정이 이 정도로 철저히 썩었던 것이다. 그들은 시기와 배은망덕의 화신이었다.
  
  직산 전투라고 수륙 양면 정책을 쓰려고 직산과 보은에 집결하던 10만 명 일본 정규군의 정탐대 500여명 중에 명의 기병 2,000명이 고작 31명을 죽인 것에 감읍하여, 명의 경리 양호한테는 버선발로 뛰어내려가 왕이란 작자가 직접 절을 하려고 하여, 양호가 너무도 황당하여 자기는 전혀 공이 없으니까 큰 공을 세운 이순신 장군에게 상을 내리라고 하자 발끈 성을 내면서,
  
  '통제사 이순신은 사소한 적을 잡은 데 불과하다. 그것은 그가 그의 직분을 수행한 것일 뿐, 큰 전공을 세운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인이 은전과 비단을 그에게 보내어 포상한 것을 과인은 미안하게 생각할 뿐이다.(선조실록 선조 30년 10월)'
  
  라고 했다. 그는 끝내 충무공에게 포상하지 않고 그 아래 여러 장군에 대해서는 응분의 포상을 했다. 명량 대첩이 없었으면 왜의 육군 10만 명이 수군 수만 명과 합하여 바로 서울과 평양을 짓밟았을 것이 틀림없다. 이 때는 1597년 9월로 1598년 8월에 죽은 풍신수길이 펄펄하게 살아 있었으니까 그들이 능히 그러고도 남았다. 한국의 국사책에는 아직도 너무도 한심하게 직산 대첩(?) 때문에 정유재란이 끝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중국 사대주의가 오늘날까지 버젓이 살아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중국이 등소평 이후 다시 기지개를 키자 사방에서 중국 사대주의자들이 호들갑을 떨기 시작한다. 정말 개탄스러운 일이다.
  
  명량대첩에서 보듯이 이순신 장군의 연전연승에서 무기는 부차적인 문제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문제는 사람이었다. 이순신 장군이었다. 거북선과 대포와 판옥선 때문에 마치 이순신 장군이 기적적인 승리를 가져왔다는 것은 이순신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허구이다. 세계 해전사상 가장 빛나는 명량대첩에서 보듯이 거북선이 없어도 이순신 장군은 적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반면에 조선의 대포와 거북선과 판옥선을 갖고도 원균이든 박홍이든 일본을 보면 도망가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원균이 적선을 10여 척 깨뜨렸니 어쨌느니 하는 괴이한 주장도 있지만, 칠천량 해전을 보거나 전선 44척을 어디 두고 단 4척만 달랑 끌고 온 것을 보면 알 수 있거니와 그것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고 조선이든 일본이든 다른 기록에는 전혀 나와 있지 않다. 설령 왜선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10여척을 깨뜨렸다고 하더라도 판옥선 40척 포함 100여척과 군사 10,000여명을 잃었으니, 그것은 대패배인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면 왜 일본이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까. 그러고도 명색이 전라좌수영(5관 5포)보다 두 배 큰 경상우수영(8관 16포)의 수장이라고 이순신 장군은 그를 당신보다 예우하거나 당신과 동등하게 대우했다. 그러나 그런 과분한 대우를 받은 것도 부족해 이순신 장군 위에 올라서고 싶어 했던 원균은 말하자면 원님 덕에 나팔 분 주제에 지나지 않았다. 나팔수 주제에 필생의 힘을 다하여 원님을 모함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 그는 특이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 당시 임금 이하 권력을 잡은 자들 대부분이 그러했다. 그래서 원균이 자기들과 같은 자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선조와 작당하여 충무공과 동일하게 원균을 선무 일등 공신으로 추서한 것이다. 그것은 선조와 조정대신이 미증유의 전쟁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교묘한 술책이었다. 아직까지 이런 저간의 사정을 모르고 원균을 복권시키려고 하는 자들이 두더지처럼 고개를 내미는 것을 보면 이 나라의 운이 다시 벼랑에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못난 사람일수록 시기심이 강하고 권력투쟁에 능한 법이다. 덩달아 춤을 추고 장단을 맞추는 자들도 한심하긴 마찬가지이다.
  
  육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조선의 대포가 일본의 조총을 압도했지만, 이것을 활용한 데는 진주성과 행주산성뿐이었다. 아무리 무기가 뛰어나도 이를 활용하지 못하면 그것은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는다. 장개석이나 티우나 무기가 약해서 공산군에게 나라를 빼앗긴 게 아니다. 대영제국도 무기가 약해서 거지 군대의 우두머리 워싱턴에게 진 게 아니었다. 문제는 언제나 사람이다. 민심이다.
  
  그러면 연전연승한 충무공의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정보전이다.
  상대방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들여다보되, 자신은 전혀 알려 주지 않았다. 상대방의 강점과 약점을 철저한 첩보전과 예리한 관찰과 추리로 알아낸 다음 아군의 장점으로 적의 약점을 쳤다. 이 정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늘 칼자루를 잡았던 것이다.
  
  적의 강점은 크게 네 가지였는데, 그 제1 강점이 바로 조총이었다. 이건 화살을 압도했다. 우선 그 소리가 엄청난데다, 별 훈련 없이도 병사가 아픈 상황에서도 정확하게 상대방을 명중시킬 수 있었다. 그 위력도 대단했다. 화살과 달리 어디를 맞든 치명상을 입혔다.
  
  이 조총의 힘은 1593년 1월 25일 벽제 전투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굶고 병들고 추워서 그야말로 발을 질질 끌면서 가는 패잔병 왜군을 보고 명의 이여송은 기마병을 앞세워 그대로 짓밟으려 달려들었다. 그러나 왜군은 그 상황에서 조총을 들고 여러 겹으로 횡대로 정렬했다. 이어서 기마병을 앞세워 쏜살같이 명군과 조선군이 달려오자 침착하게 유효 사거리에 들어오길 기다렸다가 일제히 탄막을 형성하며 조총을 쏘았다. 그리고는 이들이 뒤로 물러나자마자 다음 열의 병사가 불을 뿜었다.
  
  이들이 물러가면 다음 열이 나섰다. 조총은 그 당시 화승총이어서 다시 장전하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이런 기막힌 전법을 썼던 것이다.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기세등등하던 명군과 말은 일제히 폭폭 꼬꾸라졌다. 반면에 왜병은 손가락하나 건드릴 수 없었다.
  
  이후로 이여송은 간이 콩알만해져서 도무지 싸우려 들지 않고 오히려 조선을 괴롭히기만 하고 휴전만 궁리했다. 조선왕도 그 앞에서는 슬슬 기었다. 조선 백성들은 치를 떨었다.
  
  제2의 강점은 칼이었다. 예리하기도 했지만, 100년 이상의 전국 시대를 통해 갈고 닦은 적의 칼춤 솜씨는 가히 하늘을 가르고 땅을 뒤엎을 정도였다. 조선인 열 명이 왜병 한 명을 못 당했다.
  
  제3의 강점은 왜선의 속도였다. 조선 수군 눈에 그것은 쏜살같았다. 따라서 이 강점과 부딪치는 순간 아군은 일패도지(一敗塗地)할 수밖에 없었다. 원균이나 박홍이나 혼비백산 도망간 것은 바로 이런 강점을 보고 갑자기 하늘이 캄캄했기 때문이었다. 이건 육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도망가기 바빴다.
  
  제4의 강점은 용감무쌍한 적의 패기였다. 왜병은 아귀(餓鬼)와 같았다. 일단 전쟁에 돌입하면 왜군은 약졸이 전혀 없었다. 일사불란하게 얼마나 용감하게 덤벼드는지 이건 지옥의 마귀와 같았다. 피에 굶주린 드라큘라 같았다.
  
  반면에 충무공의 말대로 조선의 군인은 열에 아홉이 겁쟁이였다. 싸움도 하기 전에 부들부들 온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다가 바지를 축축하게 적시고 이를 마구 부딪쳐 이빨이 모조리 흔들거릴 정도였다.
  
  충무공은 이 적의 강점과 정면으로 부딪치면 질 수밖에 없음을 한 눈에 알아보고 적이 이 강점을 한 번도 못 쓰게 만들었다. 치밀한 연구 끝에 충무공은 적의 제일의 강점인 새총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그건 바로 우리의 강점 대포를 주무기로 사용함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이런 사실은 20세기말에 와서야 겨우 밝혀진 사실이다. 이건 바로 저 유명한 함포전으로 19세기 말에야 본격적으로 사용되었으니, 충무공이 3세기 앞서서 사용했다는 것을 아무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천지현황 총통의 유효사거리가 적의 조총 유효 사거리 110미터를 두 배 이상 앞선다는 것을 간파하고(유효사거리를 고려하지 않으면 조선 대포는 무려 1,000미터를 날아감) 이를 실전에 그대로 이용했다. 항상 멀찌감치 떨어져서 쏜살같이 달려오는 적선을 가라앉혔다. 불태워 버렸다. 조총은 그저 바닷물만 엄청나게 출렁거리게 했을 따름이었다.
  
  이리하여 적의 조총을 무용지물로 만든 다음에도, 절대 근접전을 허용하지 않아 적이 오로지 그 잘 드는 일본도로 분해서 허공만 가르게 했다. 우리 수군은 칼을, 적이 바다에 빠져 대부분 물고기 밥이 되고 몇 명이 허우적거릴 때 유유히 다가가서 목을 따고 귀를 베는 데만 사용했다.
  
  적의 배는 빨랐지만, 우리의 전선 판옥선은 튼튼했다. 속도는 느렸지만 함께 부딪치면 적선이 마구 부숴졌다. 게다가 배가 육중해서 대포를 실어 쏠 수 있었다. 반면에 왜선은 대포를 장착하면 배가 그 반동으로 뒤집힐 정도로 심하게 흔들렸다. 이런 점들을 충무공은 십분 활용했다. 가라앉는 배에서 허둥거리는 적을 보고 들입다 받아 버렸다. 황소가 네 다리 중 두 다리, 세 다리를 절뚝거리는 말을 뿔로 확 받아 버리는 식이었다.
  
  적이 아직 많이 살아 있어서 조총의 유효 사정거리에 들 때가 문제였다. 이 때에 바로 바다의 전차 거북선이 달려갔던 것이다. 조총이 핑핑 튀는 사이에 바로 앞에서 대포를 쏘고 혼비백산한 적선을 그대로 깨뜨린 것이다. 거북선의 용머리 밑 바닷물이 닿는 부위에 쳐서 부수는 곧 당파용(撞破用)의 돌출부가 있었던 것이다. 미리 대포로 적선을 어느 정도 깨뜨리지 않고는 거북선도 별 소용없었다. 달아나면 따라갈 수가 없었다. 위험을 알아차리고 말이 도망가면 호랑이 열 배의 힘을 가진 소도 속수무책인 법이다.
  
  아군의 겁쟁이들은 배에 갇혀 있으니 도망갈 수가 없었다. 도망가 봐야 물고기 좋은 일만 시킬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가만 보니까 충무공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싸우다 보니까, 아군은 다치거나 죽는 사람이 희한하게도 거의 없었다. 조선 수군은 그래서 왜군을 압도하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반면에 왜군은 이순신 장군만 만나면 너무도 맥없이 귀신 곡할 정도로 허무하게 죽었기 때문에 간이 콩알만해졌다. 이순신만 만나면 하나같이 겁쟁이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마침내 풍신수길이 지상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순신을 만나면 무조건 도망쳐라.'
  
  임진왜란 중 전쟁이 발발한 1592년과 정유재란이 발발한 1597년 그리고 전쟁이 끝난 1598년 외에는 큰 전쟁이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 풍신수길의 기막힌 전략 때문이었다. 그는 과연 경천동지할 전쟁의 달인이었다. 달아나서 꽁꽁 숨는 데야 천하의 이순신 장군도 별 수 없었던 것이다. 육지에서 바다로 몰아내기만 하면 모조리 수장시킬 수 있었지만, 조선군이나 명군이나 그럴 힘이 없었다. 왜군이 삼남 지방에서 쌓은 성은 그야말로 철옹성이었다.
  
  충무공 이순신의 두 번째 필승 전략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사람들이 잠재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는 것이었다. 원균의 예에서 보듯이 아무리 군사력이 뛰어나도 민심을 잃으면, 군심을 잃으면 그건 그저 병들어 다 죽어 가는 호랑이 이빨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들 수 있다. 징기스칸이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을 때 몽골 인구는 100만이 안 되었다. 반면에 그가 정복한 중원(이 당시는 금, 양자강 이남은 송)을 비롯한 광대한 땅에는 그 100배의 인구와 그 천 배의 경제력, 그 100배의 무기가 있었다. 이미 이 때 금은 몽골의 용맹한 기마병을 혼비백산하게 할 막강한 화포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만주에서 흥기한 누르하치가 명을 정복할 때 만주족 인구는 불과 30만, 중국은 무려 1억 5천만이었다. 영국을 이긴 워싱턴, 장개석을 이긴 모택동, 미국을 이긴 베트남의 호지명 등을 생각해 보라. 그건 누가 봐도 객관적으로는 싸움이 안 되는 싸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적적으로 이겼다. 이유는?
  
  민심이었다. 군심(軍心)이었다. 풀보다 여린 것 같은 민중이 이들을 지원했고, 굶어서 뼈만 남은 군인들이 장군을 자기 몸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
  
  이순신 장군은 이 민심을 누구보다도 잘 얻었다. 백성을 내 몸보다 사랑하고 군인을 내 몸보다 더 위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도 차별하지 않았다. 이 당시 전쟁에서 이기면 최고 장수가 그 공을 싹쓸이하는 게 당연했지만, 충무공은 모든 공을 부하들에게 돌렸다. 심지어 상갓집 개 같은 원균도 자신보다 위로 쳤다. 오직 자신에 대해서는 한 마디만 했다. 장계 맨 끝에 그저 이렇게 썼을 뿐이다.
  '신도 싸웠습니다.'
  
  전쟁 중에 농사도 짓고 소금도 만들고 무기도 만들고 배도 건조했다. 농사 지은 것은 또 중앙 정부에 보내기도 했다. 밥은 항상 두 끼만 드셨다. 싸움에서는 항상 제일 앞장섰다. 언제나 문을 열어 놓고 주무셨다. 갑옷을 입은 채 군화도 신은 채였다. 누구든지 들어가서 얘기할 수 있었다. 사람은 특히 조선 사람은 차별 대우를 가장 싫어한다. 차별 대우하기는 가장 좋아하면서 말이다. 충무공은 이런 조선 사람의 기질을 잘 알고 그 누구도 차별 대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엉터리 짓 하는 자는 가차없이 처단하거나 곤장을 쳤다. 그래서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지 불과 1년 2개월만에 군, 관, 민, 장군, 병졸이 그야말로 하나로 똘똘 뭉쳤다. 부모 자식 사이 같았다. 바로 이 시점에서 전쟁이 터졌던 것이다. 조선인의 잠재 능력은 그 어떤 민족보다 크다는 것을 속속들이 아시고 20세기에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민주주의를 충무공은 실천했던 것이다. 북한의 해괴한 무리들이 김일성 가문을 회칠하는 과정에서 이런 이순신 장군을 1967년부터 봉건주의자라고 욕했으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인민을 위한다면서 인민을 다 굶어 죽이는 자들이 말이다.
  
  과연 민심과 하나된 힘은 가공했다. 4월 14일에 부산에 침략 불과 19일 만인 5월 3일에 서울에 무혈 입성한 왜군은 이 때까지 거의 무인지경을 달려갔었지만, 충무공이 5월 7일 첫 해전인 옥포전에서 대승한 이후부터 적은 갑자기 속도가 뚝 떨어져 6월 17일에야 평양성에 겨우 들어갔다. 서울서 평양 거리는 서울서 부산 거리의 2분의 1이다. 그러나 이 거리를 가는 데 전쟁다운 전쟁 않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무려 두 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충무공에게 제해권을 빼앗겨 먹을 식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과 조선군에게 평양성을 빼앗길 때는 왜병은 빌어먹는 거지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포위하고 고함만 지르면 저절로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이 밖에도 이순신 장군의 필승전략은 많지만, 이 둘을 이해하면 나머지는 대개 쉽게 이해되는 편이다. 대부분 이 둘 안에 포함된다. 이 전략은 오늘날의 정보화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철두철미 정보전에서 이겨야 한다. 이어 민심을 얻어야 한다. 이건 군사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적용되는 철칙이다. 진리이다.
  
  오늘날 한국이든 북한이든 정부가 민심을 거의 얻지 못하는 상태에서 어느 쪽이든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민심이 이반되기는 북한이 한국보다 열 배는 심하지만, 김정일이 국방위원장이란 명함으로 군심 하나는 군대를 최우선으로 치고 비전향 장기수를 전원 데려가는 등의 수법으로 완전히 얻고 있다.
  
  뿐이랴, 정보전에서 북한은 한국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들여다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는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북이 어떻게 나올지 전혀 감도 못 잡는다. 오로지 희망찬 꿈만 있을 뿐이다. 햇볕 정책이다, 남북화해다 요란스럽지만, 남북간의 회의 의제, 일정, 장소 모두 남은 북의 의도를 종잡을 수가 없다. 한도 없이 끝도 없이 이해하고 또 이해해 주는 형편이다. 반면에 북은 남이 어떻게 나올지 바보 아니면 다 알게 되어 있다. 이건 북을 위해서도 장기적으로 보아 전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이건 '내'가 상대방에게 죽을죄를 지은 적이 너무나도 많아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서 크게 뉘우치고 무조건 상대방이 하자는 대로 따라갈 때에만 성립되는 일이다. 반면에 상대방은 '나'한테 과거에 엄청나게 잘해 주었을 경우에 해당되는 일이다.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있을 수 없다. 완전히 거꾸로 되었다. 과거에 한국이 그렇게 북한에게 몹쓸 짓을 많이 했던가. 북한이 한국에 그렇게 끝없이 잘해 주었던가.
  
  정보면에서 북은 어둠 속에 있고 남은 밝음 속에 있다. 정말 무서운 일이다.
  
  임진왜란시 선조는 왜국에 대해 까막눈이었지만, 풍신수길은 조선에 대해 부처가 손오공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재주피우게 하듯이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만 그는 조선에 무엄하게도 천하의 풍신수길을 새끼손가락 끝에 올려놓고 말없이 내려다보는 불세출의 영웅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이 영웅은 그냥 영웅이 아니라 거룩한 영웅, 곧 성웅(聖雄)이었다.
  
  (2000.10.2.) (2004. 1. 29.)
  
  
[ 2006-04-28, 07:1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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