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교전으로 김정일은 통일대통령을 찜함
영웅은 천당에 가기도 거부하고 고향에 가기도 거부하고 조국의 암담한 미래를 바라보며 서해에서 오늘도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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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교전으로 김정일은 통일대통령을 찜함
 
   2002년 우리나라에서 교통사고로 숨진 사람은 모두 7천224명. 그 중에는 6월 13일 경기도 양주군 광덕면에서 숨진 두 여중생도 포함되어 있다.
  
   2002년 6월 29일 남북교전으로 자유대한의 국군 6명이 산화하고 18명이 크게 다쳤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이후 두 번째로 강성대국의 인민군이 바다의 군사분계선을 의도적으로 침입하여 도발한 교전에서 경제대국의 국군이 6명이나 산화했다. 1․21 사태를 능가하는 국가비상사태였다.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돌아온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전쟁은 없다’고 호언장담한 지 불과 2년 만에 남북교전이 발생하여 대한의 국군이 6명이나 산화했던 것이다. 40년 가까이 지켜지던 휴전협정이 1999년 6월 15일에 이어 다시 한 번 사문화된 것이다. 10․26을 능가하는 국가비상사태였다. 그로부터 불과 3년 전 연평해전에서 단 한 명도 다치지 않고 침략한 적을 일방적으로 패주 시킨 막강 대한민국의 해군이 왜 그렇게도 어이없게 당했던가. 그것은 해군참모총장보다 높은 곳에서 명령이 내려오기 전에는 절대 먼저 발포하지 못하게 한 5단계 교전수칙 때문이었다. 5․18을 능가하는 국가비상사태였다. 적의 의도적인 도발로 국가 안보의 꽃인 우리 국군이 산화했으니까! 그러나, 대한민국은 임진왜란 1년 전의 이씨조선보다 태평스러웠다. 5단계 교전수칙을 3단계로만 바꾸고!
  
   전국민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2002 월드컵 4강의 열기가 시나브로 사그라지려다가 초고속인터넷을 타고 한 촛불 두 촛불 피어올라 마침내 거대한 반미의 열기로 되살아났다. 7천222명은 그 친지 외에는 누구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지만, 오로지 두 여중생은 미군 장갑차에 의한 윤화 사고라는 이유만으로 유관순 독립열사보다 더 유명해졌다. 그들의 처참한 주검은 인정 많은 한국인의 심장을 사정없이 할퀴었다. 세계 최빈국에서 세계10위권 경제강국으로 우뚝 선 자유대한의 주한 미군을 2천만 조선인 중 단 한 명 일등 시민이 될 수 없었던 일제시대의 주한 일본군과 동일시하는 무리가 의도적으로 부추겨 세계제일의 초고속인터넷과 월드컵4강과 천만 촛불이 결합되었던 결과였다. 마침내 그것은 코드가 같은 정권 재창출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여섯 영웅은 아니었다. 그들은 바다의 휴전선인 북방한계선(NLL)을 죽음으로 지켰지만, 그들의 유족은 7천224명 중 치밀하고 집요한 계획에 의해 특별해진 2명의 유족이 받은 보상금의 3분의 1도 받지 못했다. 누구는 결국 무죄로 밝혀졌지만 석연찮은 이유로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았다고 해서 두 번이나 청와대 문 앞까지 갔다가 쫓겨났는데, 그렇게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하다가 우리의 영웅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군인정신에 입각해 괴이한 교전수칙을 지키다가 적의 총탄에 산화했건만, 그 유족에게는 고작 6천만 원이 지급되었을 뿐이다.
  
   더욱 쓸쓸한 것은 그들의 영결식! 수백만 개의 촛불이 1년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밝혀졌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세계최강 미국의 대통령도 조의를 표하고 그 영전에 머리를 조아린 2명을 뺀 7천222명의 장례식보다 초라한 영결식! 그들의 고결한 영혼은 국군 최고통수권자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각하는 빨간 넥타이 매고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으로 아무 일이 없었던 양 축구 구경하러 가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여섯 영웅은, 어쩌면 자유통일 후 히딩크나 박지성보다, 펠레보다 유명하게 될 여섯 영웅은 한사코 천당에 가길 거부하고 온몸에 수백 개의 파편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연평도 언저리를 맴돌게 되었다. 육체를 벗어난 그들의 고결한 영혼에게는 조국의 암담한 미래가 너무도 빤히 보이기 때문이다.
  
   1992년 9월 17일 남북이 외세의 간섭을 전혀 받지 않고 조인한 남북기본합의서에 의해 그 실효성이 보장된 바다의 휴전선 NLL을
  (제10조 해상불가침구역은 해상불가침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한다.)
  죽음으로 사수한 여섯 영웅은 초고속인터넷은커녕, 월드컵의 열기는커녕, 수백만 촛불은커녕 400년 전 외적의 침략을 알리는 봉화 수준 정도의 덕도 못 보았다. 군대내 숱한 의문사보다 못한 죽음이었다.
  
   6․25 때 바다를 완벽히 장악한 UN군과 국군은 서해를 모조리 차지할 수도 있었지만, 백령도까지만 차지하고 나머지는 북한에 돌려 주었다. 휴전선 직선거리 한참 위에 있는 서해 5도는 옹진반도와 개성의 목덜미를 단숨에 찌를 수 있는 비수이기 때문에, 북한의 심장부인 평양으로 단숨에 짓쳐들어갈 수 있는 항공모함이기 때문에, 김씨공산왕조의 오판을 막기에는 안성맞춤이기 때문에, 그것만은 한국과 UN이 돌려 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를 너무도 잘 아는 북한은 바다의 휴전선에 대해서는 휴전협정 당시 도장을 찍어 주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아쉬울 게 전혀 없었다. 울릉도나 독도처럼 실효지배하고 있으니까!
  
   일본이 한국을 우습게 보고 심심하면 독도문제를 꺼내듯이 북한도 한국을 우습게 보고 걸핏하면 NLL 문제를 꺼낸다. 10여년 전부터 한국 정부의 대응은 정반대다. 일본은 적으로, 북한은 친구로 본다는 의미다.
  
   노태우의 북방정책으로 정권이 붕괴 직전의 위기에 처했던 북한은 위장전술로 남북기본합의서를 통해 불가침협정을 맺었다. 애초에 이것은 지킬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것을 확실하게 깬 것이 1999년 6월 15일! 북한의 어선과 군함이 대대적으로 NLL을 침략한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해군은 불리한 교전수칙에도 불구하고 당시까지만 해도 일선 지휘관이 스스로의 판단으로 교전수칙을 다 지킨 후 공격에 맞서 즉시 응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방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표적을 자동 조준하는 함포를 장착한 한국의 군함에 수동식 함포에 기름이 없어 통통거리는 북한의 군함은 상대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무말랭이를 씹고 있던 인민군의 함정은 4~5척이 침몰 또는 대파되었고 수십 명이, 어쩌면 수백 명이 전사했다. 반면에 한국은 전사자가 한 명도 없었다. 부상자가 약간 있었을 뿐이고 고속정 한 척이 경미하게 손상 입었을 따름이다.
  
   정확히 1년 후 2000년 6월 15일,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나는 남북 정상회담이 하루 연기된 것은 5억 달러 입금 확인보다 이 날짜 때문이라고 본다.) 그걸로 남북기본합의서는 사문화되었고, 남북불가침선언도 박물관의 칼집으로 들어갔다. 무력으로 NLL를 무력화시키려다가 참담한 실패를 경험한 김정일은 그보다 한 수 위인 외교로 통쾌하게 복수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았다. 확실하게 도장을 찍을 필요가 있었다. 이번에는 승리가 너무도 확실했지만, 이론은 실험으로 검증되어야 하듯이 약속은 실천으로 증명되어야 했던 것이다. 2002년 6월 29일, 꿈같은 월드컵 4강 진출로 한껏 들떠 있던 한국은 그 날 터키와 3위 4위를 결정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겨도 좋고 져도 좋은 너무도 기분 좋은 날이었다. 바로 이 날 김정일은 NLL를 무력화하는 도발을 감행했다.
  
   식량과 비료와 달러는 군사와 경제 분리 원칙에 의해 단 하루도 단 1킬로그램도 단 1달러도 차질 없이 북으로 꼬박꼬박 넘어가는 것은 김정일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사람이 다 알았다. 1999년의 연평해전에서 승리한 박정성 제독은 해군참모총장 후보 영순위로 낙점된 게 아니라 푹 쉬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것을 김정일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거기에다가 해군참모총장 위, 국방부 장관 위, 다름 아닌 국군 통수권자의 명령 없이는 감히 국군은 인민군을 향해 발포하지 못한다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가슴을 관통 당한 후에나 발포할 수 있다는 것을 김정일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무조건 이기게 되어 있는 전쟁이었다. 과연 그랬다! 통쾌한 복수였다. NLL은 사라졌다....
  
   태연히 대통령은 빨간 넥타이를 매고 월드컵 구경하러 바다를 건너갔다. 북한의 군부 강경세력이 일으킨 우발적인 교전이라고 한국 정부는 최종 결론을 내렸다. 절대 NLL 북쪽으로 가서 복수하면 안 된다고 했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김정일은 대변인을 시켜 무엇이 유감인지 유감이라는 말을 했다. 한국 정부는 즉시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사과했다는 것이다.
  
   2006년 북한은 이제 노골적으로 NLL 협상을 요구하고 한국은 긍정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4주기도 쓸쓸하기만 했던 여섯 영웅의 빈소에 올해도 여섯 영웅은 들르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도 서해를 지키고 있다. 천당에 가기도 거부하고 고향에 가기도 거부하고 빈소에 가기도 거부하고 조국의 암담한 미래를 바라보며 서해에서 NLL 근처에서 오늘도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1999년 6월 15일 연평해전의 패배를 정확히 1년 후 2000년 6월 15일 남북공동선언으로 노르웨이의 오슬로까지 속이며 극적으로 뒤집고, 전국민의 축제의 날인 2002년 6월 29일 서해교전으로 통쾌하게 복수하고 NLL를 무력화시킨 김정일! 그가 이제 노골적으로 NLL를 협상하자고 한다. 세계 10대 경제강국 대한민국을 통째로 넘겨달라는 말이다. 반세기 평화번영의 수호천사 미군은 감히 친구 생일잔치에 가던 여중생 2명을 장갑차로 죽였으니, 전쟁의 원흉으로 몰아 전부 내쫓거나 전시작전권을 빼앗아 열중쉬어 시켜놓고, ‘조국통일의 희생양’이 된 6명 국군처럼 차렷 자세로 4800만이 정권장악을 위해 3백만을 굶겨 죽인 ‘천출장군’의 명을 받들라는 말이다.
  
   서해든 동해든 남해든 휴전선이든 땅굴이든 인민군이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넘어오면, 69만 국군은 태극기를 멀뚱멀뚱 쳐다보면서 높디높은 곳에서 명령이 하달되기만을 기다릴 것이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일제히 가슴이 관통되고 나서야 북한보다 월등한 성능의 총과 대포를 꺼내들 것이다. 그 때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국군의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어 있을 것이다. 잠시 후에 KBS와 평양중앙방송은 선포할 것이다.
  ---남북은 일부 반통일세력의 저항이 있었지만, 자주적으로 평화롭게 통일되었고, 통일대통령으로는 김정일 위원장이 만장일치로 추대되시었다. 고려연방만세!---
   (2006. 7. 3.)
[ 2006-07-04, 07:4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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