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의 자주외교와 강감찬의 자주국방
서희의 빛나는 외교와 강감찬의 튼실한 국방으로, 고려는 자존심을 굳게 지키고 당당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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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의 자주외교와 강감찬의 자주국방
 
   많은 사람들이 서희(徐熙 942~998)를 '말 한 마디'로 요(遼)의 침략을 물리친 위인으로 기억하는 듯하다. 8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소손녕이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는 요라고 주장하며 국왕이 직접 와서 항복하라고 다그치거늘, 서희가 당당히 나아가, 고려라는 나라 이름만 보아도 고려가 도리어 고구려를 계승한 것임을 알 수 있지 않느냐고 크게 꾸짖자, 소손녕이 몹시 부끄러워하며 물러갔다더라.
  
   이상과 현실을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는 초등학생에게야 이렇게 가르치는 게 좋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할 줄 알아야 하는 중학생만 되어도 이런 식의 '위인만세'는 곤란하다. 하물며 성인(成人)이랴!
  
   하긴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名君)으로 일컬어지는 당 태종 이세민에 관해서도 구당서(舊唐書)에 이런 낭만적인 이야기가 있다. 10만 대군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당의 수도 장안에서 불과 70km 떨어진 곳까지 쳐들어온 돌궐의 힐리가한(왕)에게 당 태종 이세민은 불같이 노하여 불과 6기(騎)를 이끌고 달려가 '불가침협정'을 위반하고 왜 쳐들어왔느냐고 준엄하게 꾸짖자, 힐리가한은 몹시 부끄러워 하며 물러가고 한 달 후에 말 3천 필과 양 1만 두를 바치고 납치한 중국 주민을 송환했다고 한다. 당 태종은 그러나, 말과 양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얼마나 황당무계한 이야기인가.
  
   지난 10여년 간 한국의 통치 세력이 바로 위의 두 경우처럼 순진무구한 생각을 하고 있다. 어쩌면 그들은 속으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이런 식으로 순진한 국민을 우롱하는지도 모른다. 우리 민족끼리 외세의 간섭 없이 평화협정을 맺으면 남북의 자주평화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는 식이다. 작전통제권을 기존의 50%에서 100% 가져도(단독행사), 저들 말로는 0%에서 100% 가져도(환수), 미군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그대로 주둔할 것이고 자주국방을 위해서 현재 국방비의 약 25배에 해당하는 621조원도 15년 만에 능히 마련할 수도 있다고 한다. 세계 국방비의 약 50%를 차지하는 미국도 연간 400조원 정도인데, 무슨 수로 그런 천문학적인 세금을 걷는단 말인가.
  
   당 태종부터 먼저 제대로 알아 보자. 당 태종은 형과 동생을 죽이고 즉위한 지 12일밖에 안 되어 권력 기반이 몹시 취약했다. 돌궐의 기습 침략에 도저히 맞설 수 없었다. 그래서 보석과 비단을 있는 대로 긁어 모아 바치고 항복한 것이다. 아마 여자도 한 10만 명 바쳤을 것이다.
  
   --국고를 털어서 강화를 청하다.
   이정(李靖)이 이런 방책을 진언했다는 말이 나온다. 유목민은 약탈이 가장 큰 목적이란 것을 간파하고, 이세민은 치욕을 감수하고 후일을 도모한 것이다. 과연 그로부터 3년 후(629년) 이세민은 이정을 장군으로 삼아 돌궐을 박살내 버렸다. 돌리가한 항복, 힐리가한 생포!
  당 태종은 4개 오랑캐 나라의 수장들에게 추대되어 천가한(天可汗)이라 일컬어졌다.
   구당서의 이정전(傳)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 위세가 이렇듯 북적(北狄)에 떨치기는 고금에 일찍이 없는 일이요, 왕년의 위수의 역(役)을 갚기에 족하도다.
  
   바로 여기에 이세민의 위대함이 있다. 힘이 약할 때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국민의 안녕과 국가의 백년대계를 생각하여 자존심을 훌훌 벗어 던지고 일개 오랑캐에게도 천자의 옥체를 개돼지 취급하여 깨끗하게 항복한다. 그러나 거기서 절대 그치지 않고 힘을 길러 후에 치욕을 눈처럼 하얗게 씻어 버린다. 과연 이세민은 명군이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김춘추와 이승만과 박정희가 바로 이런 위인이다. 알량한 자존심으로 뒤에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거나 말거나 그냥 팍 죽어 버리는 그런 '밴댕이 속' 소인은 김춘추와 이승만과 박정희를 수십 번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가 없다. 중국의 역사에서 보면, 유방(劉邦)한테 딱 한 번 진 항우(項羽)가 바로 그런 소인이다. 능히 후일을 도모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을 건너지 않고 애첩에게 감상적인 시 한 수 읊어 바치고 적진에 홀로 뛰어들어가 별 볼 일 없는 졸병들을 마구 죽이다가 피떡이 되었던 것이다. 잘 죽었다. 그런 자가 천하를 통일했으면 틀림없이 백성을 못 살게 구는 독재자가 되었을 테니까.
  
   서희는 926년 발해를 멸망시킨 요가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나라였던 송을 압도하는 군사력을 길러 993년에 쳐들어오자, 그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했다. 또한 고려는 조선이 아니었다. 고려 성종은 전쟁의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수도인 개경에서 서경으로 군사를 이끌고 북상했다. 정종 이후 고려는 광군(光軍) 30만을 유지한 강국이었다. 요군(遼軍)은 말이 80만이지 실지로는 40만이 채 안 되었을 것이다. 능히 맞붙을 만했던 것이다.
  
   서희는 이 때 중군사(中軍使)로서 시중 박양유와 함께 북계(北界 평안북도)로 나아갔다. 불과 19세의 나이에 대과에 급제한 서희는 당시 52세로 이처럼 문무겸전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 사이 소손녕은 봉산군을 함락시켰다. 서희는 즉시 말머리를 돌려 봉산을 구하려 가다가 소손녕이 펴는 심리전에 말려들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되돌아왔다.
  
   소손녕: 우리나라가 이미 고구려의 옛 영토를 점령했다. 그런데 너희 나라에서 우리 강토를 강점하므로 이제 토벌하러 온 것이다. 우리나라는 천하를 통일하고 있으며 아직까지 우리에게 귀순하지 않는 나라는 기어코 소탕할 것인즉 속히 투항할지어다.
   서희: 폐하, 그들과 화의할 조짐이 보입니다.
  
   성종은 이에 이몽전을 사신으로 보내어 화의를 제의했다. 그러나 소손녕은 만만찮았다. 성종이 직접 와서 항복하라며 이몽전을 쫓아 보냈다. 고려의 문무백관은 부들부들 떨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마침내 성종은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황주 이북을 요에게 떼어 주기로 하고 서경의 군량미를 백성들에게 나눠 주었다. 아무리 나눠 주어도 쌀이 산더미같이 남았다. 그처럼 고려는 민생이든 안보든 소홀함이 없었던 것이다. 성종은 남은 쌀이 적군의 식량이 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대동강에 죄다 버리라고 명령했다. 보다 못한 서희가 바로 이 때 나섰다.
  --폐하, 식량이 넉넉하면 능히 성을 지킬 수 있고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전쟁의 승패는 병력의 강약에만 있지 않고, '적의 약점'을 잘 파악하는 데 있습니다. 식량을 그렇게 버리다니, 하늘이 두렵지 않습니까!
  
   서희는 이어서 소손녕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당시 고려와 요 사이엔 여진족이 있었다. 광종 때 이들을 물리치고 땅을 일부 되찾은 적이 있었는데, 서희가 보기에 소손녕은 그 때 편입한 가주와 송성 이 두 곳에만 영토 욕심이 있다고 했다. 그 근거로서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적의 주장을 따른다면, 삼각산 이북이 모두 옛 고구려 영토이므로 결국 거기까지 다 주어야 한다는 말인데, 그게 어디 말이 되느냐고 했다. 그리고 조상이 피로써 얻은 나라의 땅은 단 한 뼘이라도 내줄 수 없다고 눈을 똑바로 뜨고 성종을 쳐다봤다.
  --너는 왕이 아니라 역적이다!
  그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성종은 말귀를 알아듣는 임금이라 즉시 식량을 버리라는 명령을 취소했다. 그리곤 다시 서희를 쳐다보았다. 서희는 그쯤 해 두고 가만히 있었다. 마침 그 무렵 고려와 요는 아주 큰 싸움은 아니었지만 다시 한 판 붙었다. 다행히 고려가 이겼다. 강화하기에 유리한 조건이 형성된 것이다. 성종은 곧 장영을 강화 사신으로 보냈다. 그러나 이번에도 금방 쫓겨났다. 소손녕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저 전쟁만 잘하는 그런 장군이 아니었던 것이다. 김춘추가 당 나라에 사신으로 가기 전에 신라는 먼저 어떤 사신을 보낸 적이 있는데, 그 때 그는 조롱이나 실컷 받고 쫓겨났었다. 그 상황과 비슷했다. 외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다시 고려 조정은 사시나무 떨 듯 다리를 떨고 겨울바람에 마주치는 나뭇가지처럼 이빨을 딱딱 마주쳤다. 다들 사색이 노래졌다. 성종은 좌우를 살피며 도움을 청했다.
  --누가 거란 영문으로 가서 언변으로써 적병을 물리치고 만대의 공을 세울 사람이 없는가?
  다들 눈을 내리뜨고 서로 살금살금 눈치만 살폈다. 마침내 서희가 조용히 나섰다.
  --신이 비록 불민하나 소손녕이를 맛있게 요리하고 오겠나이다.
  
   서희는 과연, 서양으로 말하면 알렉산더 같고 시저 같았던 소손녕을 어떻게 요리했을까.
   우선 기(氣) 싸움에서 이겼다.
  
   소손녕: 나는 대국의 귀인이니 너는 뜰에서 절하라.
   서희: 신하가 임금에게 절할 때야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지만, 내가 언제 네 신하더냐! 우리는 둘 다 임금을 대신하여 온 사람이므로 동격이다.
  
   소손녕이 누구던가. 버럭 화를 내며 쫓아 버렸다. 서희는 누구던가. 외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서희는 숙소로 돌아와서 기생을 끼고 유람이나 온 듯이 유유자적했다. 그 사이 심부름꾼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교섭했다. 마침내 서희가 불같이 화를 내며 소손녕의 부하를 쫓아 버렸다. 소손녕은 비로소 임자를 만났다는 것을 알았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지라 서희를 정중히 모셨다. 마침내 둘은 맞절을 나눴다.
  
   이제부터 불꽃 튀는 외교 곧 말(言) 전쟁이다.
  소손녕: 우리나라는 고구려를 계승했소. 그런데 왜 당신들이 쳐들어왔소이까? 그리고 왜 가까이 있는 우리나라를 섬기지 않고 바다 건너 송을 섬기시오?
  
   서희는 이로써 속으로 짐작하던 바였지만 상대를 완전히 파악했다. 거란의 노림수는 천하통일이었고 그 천하통일의 가장 큰 걸림돌이 송이었던 것이다. 거란은 송을 도모하기 전에 후방인 고려를 안정시켜 놓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배후가 기습당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서희: 무슨 소리! 나라 이름만 봐도 우리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소. 그건 그렇고 우리나라도 귀국과 사귀고 싶소만, 가운데서 여진이 가로막아 갈 수가 없소. 그래서 불편해도 송과 사이좋게 지낼 뿐이오.
  소손녕: 좋소! 그럼 이제 송의 연호 대신 우리나라의 연호를 쓰시오.
  서희: 돌아가서 건의해 보겠소. 대신 우리 두 나라의 화목을 가로막는 여진족은 우리가 손 좀 봐 주갔소.
  소손녕: .....
  
   연호를 쓴다는 것은 상대국을 상국으로 섬긴다는 의미가 있다. 서희는 명분을 주고 실리를 취한 것이다. 고려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994년(성종13년) 처음으로 거란의 통화(統和) 연호를 시행하였다(始行契丹統和年號).
  
   소손녕은 급히 전령을 보내 자초지종을 요의 임금에게 아뢰고 승낙을 받았다. 화의의 예로 크게 잔치를 베풀어 주려고 했지만, 서희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고려의 군인과 백성이 애꿎게 피를 흘렸는데, 곡을 했으면 곡을 했지 차마 즐거워할 수 없다고 정색한 것이다. 소손녕은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라며 또 미래의 영광을 위해서 자축하자고 애원했다. 그러자 서희는 못 이기는 척 제의를 받아들이고 크게 취했다. 7일 만에 서희가 돌아가려고 하자, 소손녕은 못내 아쉬워 하며 예물을 잔뜩 딸려 보냈다. 낙타 10두, 말 100필, 양 1,000마리, 비단 500필!
  
   성종은 너무도 기뻐서 오늘날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시중 박양유를 강가에까지 보내어 서희를 환영했다. 서희는 바로 다음 해(994년)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가서 여진을 남김없이 내쫓고 압록강까지 국경을 넓혀 강동 6주를 개척했다.
  
   소손녕은 바보였던가? 천만에! 그도 얻을 건 다 얻었다. 송을 도모하기 위해선 고려와 쓸데없이 싸워 군사력을 약화시킬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송을 멸망시킨 후에는 고려를 얼마든지 '잡술' 수 있었던 것이다. 과연 요는 10년을 더 준비하여 1004년에 송을 침략하여 저 유명한 전연의 맹으로 황하 이북을 차지했던 것이다. 이 때 요가 얼마나 강성했던지 서양까지 널리 알려져 중국을 이전까지 불러오던 차이나(秦) 대신 거란 곧 카테이(Cathay)라고 불렀던 것이다. 오늘날 홍콩의 항공사 커세이 퍼시픽(Cathay Pacific)이 바로 그 흔적이다.
  
   서희 이후 고려는 어떻게 했을까. 서희가 강동 6주를 개척한 것은 그 기회에 재빨리 영토를 넓히고 후일에 대비한 것이다. 요가 송을 도모한 후에는 반드시 다시 고려를 침범한다는 것을 알고 안보를 튼튼히 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요는 전연의 맹 이후 연이어 고려에 쳐들어왔다. 고려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므로 어려움은 있었지만, 그 때마다 요의 대군을 물리쳤다. 마침내 1019년(현종10년) 강감찬(姜邯贊 948~1031) 장군에게 귀주에서 대패한 이후로 거란은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않았다. 소손녕은 이 때 개경을 거의 함락 직전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강화하는 척하고 기습했던 것이다.
  
   서희의 빛나는 외교와 강감찬의 튼실한 국방으로, 고려는 당시 아시아 초강대국 송도 꼼짝 못한 요에 맞서 땅을 한 치도 내주지 않고 도리어 국경선을 확 끌어올리고 자존심을 굳게 지키고 당당하고 평화롭게 잘살 수 있었다. 이게 바로 자주외교이고 자주국방이다.
  
   오늘날 친북좌파는 도대체 어떤 자들인가. 적이 쳐들어오면 허겁지겁 도망가고 승전한 장군은 모함하고 국토는 사나운 개에게 가래떡을 떼 주듯 뚝뚝 떼어 주던 송 나라와 너무도 흡사하다. 마치 시 한 수로 백만 대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듯이 해괴한 명분을 내세워 큰소리 뻥뻥 치다가 막상 적이 다가오면 천 리 밖에서 혼비백산 도망가던 송 나라의 딱따구리들과 너무도 흡사하다. 심지어 송은 후에 요를 물리친 금이 쳐들어왔을 때는 더 황당한 짓을 했다. 곽경이란 자가 이렇게 말했다.
  '신병(神兵)에게 맡기어 금 나라를 물리쳐 버리겠습니다.'
  
   송의 흠종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군대를 철수시키고 금의 군사를 도성으로 맞아들였다. 물론 곽경이란 자는 자취를 감추어 찾을 길이 없었다. 틀림없이 금의 간첩이었을 것이다. 금은 너무도 쉽게 흠종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송의 딱따구리들은 양자강 이남으로 날아갈 수밖에 없었다. 남송(南宋)은 그렇게 해서 생긴 나라였다. 금의 태종이 무릎을 꿇은 휘종과 흠종에게 내린 칭호가 정말 웃긴다. 휘종은 혼덕공(昏德公 바보씨), 흠종은 (重昏候 바보 멍청이님)!
  
   제국주의가 횡행하던 19세기에나 통용되던 자주니, 자립이니, 하는 우습지도 않은 명분을 내세워 이미 반세기 전에 소련과 중공이란 두 외세를 빌어 기습남침한 전력이 있고, 협동농장을 해체하고 주민들에게 땅만 돌려 주어도 한 명도 굶겨 죽이지 않을 수 있는데, 무려 300만이나 굶겨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아직도 민생은 전혀 돌보지 않고 어디서 '돈이 났는지' 오로지 대량살상무기만 대량생산하여 무력으로 적화통일할 생각밖에 없는 공산독재자에게 바른 소리를 단 한 마디도 못한다. 이젠 대놓고 그런 자를 찬양하는 무리도 있다.
  
   내정은 전혀 간섭하지 않고, 요 나라처럼 무슨 연호를 쓰라는 것도 아니고, 자유무역으로 자동차를 겨우 8천대 수출하고 그 100배인 80만대나 수입해 주는 등 풍요의 대문을 활짝 열어 주고, 북한 따위가 아니라 중국이나 러시아나 일본도 감히 넘보지 못할 군대를 연간 무려 30조원을 들여 공짜로 주둔해 주는 미국에 대해서 '속이 너무도 빤히 보이는' 자주국방이란 말을 내세워 '진짜 신병(神兵)'을 쫓아 버리고 세계 10위의 경제강국을, 아시아 2위의 민주국가를 통째로 흡혈귀에게 바치려 광분하고 있다. 장차 이 나라 이 국민을 어이할꼬! 어이할꼬...
   (2006. 8. 9.)
  
[ 2006-08-10, 07:5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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