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행 방주를 마련한 70대 정치인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던 중국과 인도와 베트남에서 70대의 세 노인이 자신이 누울 작은 관 대신 21세기로 질주할 거대한 방주를 준비했다.

최성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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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년 등소평이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74세였다.
 1980년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69세였다.
 1986년 구엔(응웬)반 린이 베트남 공산당의 총서기장이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71세였다. 

 1991년 나라시마 라오가 인도의 총리로 선출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20세기 말부터 변화의 속도가 그 이전 어느 때보다 가팔라져서, 노인들은 새 시대 새 물결을 환영하고 즐기기보다 지레 겁이 나서 피하다가 외로운 섬에 갇히거나 익사하기 일쑤다. 변화의 중심에는 컴퓨터와 인터넷과 통신이 있다. 이들을 통해 지식과 정보가 너무도 빠르게 유통되기 때문에 오늘의 1등이 내일의 1등으로 남아 있기는 여간 어렵지 않다. 오늘의 1등이 내일의 꼴찌가 되는 것도 전혀 예외적인 사항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의 1등이 내일의 1등으로 군림하는 것이 예외다.

 바로 이런 변화의 태풍전야에 4명의 늙은 정치인이 10여년 간격으로 국가 지도자로 올라서서 아무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의 국민을 21세기로 향하는 거대한 방주에 태웠다. 2007년 현재 21세기행 방주에 탄 그들의 국민은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만끽하고 있다. 특히 전세계에서 가장 뒤떨어졌던 세 나라 중국, 인도, 베트남에는 불과 한 세대 만에 전세계에서 가장 싱싱한 생명력이 넘쳐 흐른다. 21세기 후반에는 이들이 미국과 유럽과 일본을 능가할 것이라는 전망이 이제는 전혀 생소하게 들리지 않는다. 그 정도로 이들 나라에서 풍요와 자유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인류의 3분의 1이 넘는 인구가 위대한 세 구루(guru) 덕분에 빈곤과 억압의 굴레에서 급격히 벗어나고 있다. 반면에 미국의 국민은 현재 전세계에서 가장 좋은 상품과 서비스를 가장 저렴하게 향유한다.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과 인도 없이는 상상할 수 없는 경제요 문화다.  

 중국과 인도와 베트남은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와의 기나긴 싸움을 겪으면서 국민들이 굶주림은 숙명으로 피 흘림은 필요악으로 여겼다는 공통점이 있다.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주의는 길게는 200년 짧게는 100년 이 세 나라의 핵심 화두였다. 인도는 1947년, 중국은 1949년, 베트남은 1975년, 각기 독립을 쟁취했을 때, 그들은 환호했다.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았고 노래하지 않아도 즐거웠다. 이들의 정신적 지주는 하나같이 소련이었다. 마르크스와 레닌이 이들의 스승이었다.

 그런데 순진한 그들의 믿음과는 달리 소련은 이들 세 국가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무엇보다 소련은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제정(帝政) 러시아와 공산 소련은 제국주의의 본산이었다. 단지 독일처럼 후발 산업국가였기 때문에 아프리카나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개척할 수 없었을 따름이다. 그래서 제정 러시아와 그 후임 공산 소련은 유라시아의 주변국을 닥치는 대로 식민지로 만들었다. 동구와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 및 몽골과 북한은 공산 소련이 식민지로 삼거나 자국 영토로 편입한 대표적인 땅이었다.

 레닌은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국내의 봉건주의만 타도하면 되었던 것이다. 스탈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레닌에 의해 러시아의 봉건주의가 이미 타도되었기 때문에 반제국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신판 공산 제국주의를 추구하면 되었다. 스탈린과 히틀러의 싸움은 인도나 중국 같은 약소국의 반제국주의가 아니라 제국주의 강대국끼리의 싸움이었다. 그것은 제국주의시대에 영국과 프랑스가 싸운 것과 마찬가지다.

 공산 소련은 스스로 역사상 그 어떤 나라보다 강한 제국주의를 추구하면서 도리어 인도와 중국에게 반제국주의의 이념을 수출했다. 이 때 공산 소련이 제국주의로 주목한 나라는 바로 미국이었다. 자국의 사정과 전혀 다른 반미라는 반제국주의 이념이 독립국가로 거듭난 인도와 중국과 베트남에 들어맞을 리 없었다. 이들 국가의 독립 또는 통일 후에는 제국주의도 없었고 봉건주의도 없었다. 공산 소련과는 달리 미국은 2차대전 후에 GATT 체제를 출범시켜 식민지 경영이 아니라 주권 국가끼리의 자유무역 체제로 상호 이익을 보장하는 국제 관계를 재정립했다. 미국은 국경을 활짝 열어놓고 어떤 나라의 상품도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독립 또는 통일 후에도 중국과 인도와 베트남은 공산 소련을 가장 고마운 은혜의 나라로 여기고 미국은 가장 가증스러운 철천지원수로 여기고 국경을 굳게 닫고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주의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소련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던 인도는 중국이나 베트남과 반봉건주의에서 사뭇 달랐다. 네루와 그 가문은 약 반세기 동안 인도를 통치하면서 식민지 종주국 영국을 계승한 미국에 대한 반제국주의는 크게 내세웠지만, 인도의 전통과 가치를 중시하여 인도의 봉건주의는 단지 선거를 도입했다는 것뿐이지 거의 그대로 온존시켰다. 봉건주의를 사회주의로 말만 바꾸고 카스트제도를 거의 그대로 유지한 것이다. 그 카스트의 제일 꼭대기에는 네루 가문이 있었다. 그들은 선거로 당선되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브라만의 브라만인 줄도 몰랐다. 그 결과 네루 가문은 인구 10억의 대국 인도를 전세계의 거지를 다 합한 것보다 많은 거지들이 사람들에게 극락왕생의 입장표인 적선의 기회를 주기 위해 거리를 헤매는 나라로 만들었다.
           
 통일된 이후 갑자기 증오의 대상인 적이 없어진 중국과 베트남의 공산당은 소련에서 수입한 반제국주의의 방패와 반봉건주의의 몽둥이로 무장하고 깡통과 숟가락을 들고 길게 늘어선 자국민을 때려잡기 시작했다. 새로운 지배층으로 올라선 그들은 멀쩡한 사람들을 오로지 심증과 조작으로 제국주의의 앞잡이나 봉건주의의 잔당 또는 자본주의의 숭배자로 몰아 2차대전에서 죽은 사람보다 많은 사람들을 말 그대로 때려 죽였다. 소련 공산당은 그보다 앞서 자국민을 상대로 펼친 대량학살의 원형을 선보였다. 공산 제국주의에 혈안이 된 스탈린이 군수산업 중심의 중공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농민과 노동자를 강제동원하는 과정에서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주의의 거짓 이념으로 고의로 또는 미필적 고의로 수천만을 학살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던 아시아의 중국과 인도와 베트남에서 70대의 세 노인이 자신이 누울 작은 관을 준비하는 대신 오랫동안 때를 기다리며 21세기로 질주할 거대한 방주를 준비했다가, 최고지도자로 올라서자마자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는 방주의 문을 활짝 열고 전 국민을 몽땅 태웠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도 70대 노인이 최고지도자가 되자마자 오랫동안 준비했던 21세기행 방주에 굳이 싫다는 사람 외에는 대부분의 국민을 태웠다. 레이건이 계란형 탁자(oval office)의 터줏대감으로 앉던 해에 미국은 이미 서비스업의 비중이 63.6%였다. 지구촌을 하나로 묶어 굴뚝 공장은 전세계로 이전하고 서비스업 비중을 80%로 앞당겨 끌어올릴 개혁을 단행하지 않으면, 미국은 부지불식간에 2류 국가로 전락할 수도 있는 위기 상황이었다.

 그는 배우 시절에 소득의 94%를 세금으로 내면서 미국도 형태만 다른 사회주의 국가임을 깨달았다. 서둘러 큰 정부를 작은 정부로 바꾸지 않으면, 자유의 바람을 대대적으로 불어넣지 않으면, 일본과 아시아의 4룡에 일류 국가의 자리를 내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그는 체험과 직관으로 케인즈는 '보이는 손'의 증오와 착취를 사모한 마르크스의 아류요, 하이예크가 '보이지 않는 손'의 박애와 공리(公利)를 신뢰한 아담 스미스의 본류임을 알았다. 70년대에 스태그플레이션을 겪으면서 케인즈는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마르크스와 모택동과 네루를 열렬히 추종한 소련과 중공과 인도가 빈곤의 악순환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된 것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레이건은 때마침 케인즈의 마법에서 깨어난 영국의 억세고 슬기로운 한 숙녀와 함께 제조업의 군살을 쏙 빼고 서비스업의 겨드랑이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등소평과 라오가 우방 소련을 등지고 적대국 미국과 직거래를 튼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다. 그것이 바로 21세기행 방주에 타는 일이었다. 소련으로부터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얻을 게 없었지만, 미국으로부터는 스스로의 영혼에 채운 빗장만 열면 무진장 원하는 대로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미 1980년대에 21세기가 시작되었지만, 소련은 아직도 20세기 초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 최빈국에 세계최대 인구대국이지만, 중국과 인도는 개혁하고 개방한 것만큼 아니 그 수십 배 많은 것을 미국과 그 우방들로부터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소련과 중공으로부터 정신적 물질적으로 엄청난 지원을 받고 어떤 나라보다 치열하게 미국과 총칼로 싸웠던 베트남도 위대한 노인이 등장하면서 과거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현재와 미래를 위해 미국과 급격히 가까워졌다. 그는 적화통일 후 바로 감금시킨 적이 있는 응웬 수안 와잉에게 경제를 일임했다. 옛 월남에서 중앙은행총재와 경제재정부총리를 역임한 응웬 수안 와잉 박사는 일본의 경도대와 하버드에서 배우고 IMF에서 익힌 솜씨를 여지없이 발휘하여 옛 선비처럼 자기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베트남을 쇄신(도이모이)했다.  

 상부상조였다. 환상의 파트너였다. 미국도 아시아의 4룡이나 동남아시아보다 수십 배 잠재력이 큰 중국과 인도와 베트남에 제조업을 넘겨 주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을 알았다. 이들 세 나라의 공통적인 정치안정과 유구한 문화와 뛰어난 인적 자원 그리고 24억 인구의 풍요와 자유에 대한 목마름, 이것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거대한 잠재력이다. 때마침 철의 장막 속에 감춰진 암 덩어리를 속속들이 들여다본 레이건의 엄포와 강수에 소련도 제 풀에 넘어졌다.

 인도에서는 마침내 독립의 영웅 네루의 가문이 두 번의 암살로 거의 몰락했다. 어리석게만 보이던 라오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불과 5년밖에 집권하지 못했지만 그는 누구도 되돌릴 수 없게끔 방향을 제대로 잡아주고 시장경제를 너무도 잘 아는 소수파의 소수파인 시크교도 맘모한 싱(현 총리)에게 경제를 통째로 맡겼다. 레이건은 이미 물러났지만, 낮은 세금과 규제 혁파로 21세기행으로 방향을 제대로 잡은 만큼 미국은 누가 국가 지도자이건 관계가 없었다. 싱은 인도의 항구와 공항을 활짝 열고 미국의 항구와 공항으로 조잡한 상품과 유창한 영어를 실어 날랐다. 인도에는 또한 전세계의 수재들 중에서도 문제해결능력에서 단연 돋보이는 인도공과대학(IIT)의 천재들이 때만 기다리고 있었다. 실리콘 밸리와 나사(NASA)를 주름잡던 그들이 드디어, 괜히 미움의 대상이 되었던 시장경제를 대대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조국을 충심으로 돕거나 조국으로 대거 돌아오고 국내의 IIT 천재들도 재능을 마음껏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길 불과 반세기 만에 인도에서는 봉건주의가, 5천년 뿌리 깊은 카스트 제도가 급격히 와해되기 시작했다. 중산층이 두터워지면, 국가 전체의 부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팽창하기 시작하면, 봉건주의는 시나브로 절로 없어진다. 인도에서도 마침내 이런 법칙이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허울뿐인 민주주의가 드디어 꽃 피기 시작한 것이다.     

 일찍이 식민지배와 공산 침략으로 전세계에서 가장 비참하던 한국이 전세계 모든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한강의 기적을 낳았다. 한때 군복을 벗었다가 김일성과 스탈린과 모택동의 남침 때문에 다시 군복을 입게 되어 훗날 사단장으로 진급한 대한민국의 박정희 소장이 소련군 대위 김일성과 정반대의 길을 갔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모택동을 흉내내고 스탈린을 흠모하여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주의를 내세워 자립자족한다며 대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조선조와 일제시대보다 수십 배 억압적인 김씨 봉건주의를 만들어, 지상의 염라대왕 역할을 즐길 때, 박정희는 미국과 일본에게 배울 것은 배우고 이용할 것은 이용하고 대들 것은 대들면서 아무 것도 없는 나라에 공장과 학교와 자존심을 세우고 또 세우고 도로와 항구와 희망을 건설하고 또 건설했다.

 박정희는 등소평보다 17년 앞섰고 응웬 반 린보다 25년 앞섰고 라오보다 30년 앞섰다. 그러나 국민의 70%가 우러러보는 박정희를 반대하는 것에 목숨을 건 두 노인이 국가지도자로 잇달아 등극하면서 대한민국은 죽은 지 이미 30년이 다 되어 가는 박정희가 일궈놓은 공장들로 간신히 현상유지하거나 한 발 한 발 뒷걸음질 쳤다. 놀랍게도! 평양방송의 99.999999999%가 거짓이라는 것이 들통날까 봐 천만 이산가족이 기껏 한 통에 300원도 안 되는 편지 한 통도 주고받지 못하게 하고 국제통화라야 웬만하면 1,000원도 안 드는 전화 한 통 주고받지 못하게 하고, 대량살상무기 개발비와 200만 공산당원 및 100만 군대의 식량을 맡겨놓은 돈과 식량을 찾아가듯이 큰소릴 뻥뻥 치면서 유유히 챙기는 북한공산독재정권과 한국의 자칭 민주정권이 급격히 가까워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들은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주의와 반박정희의 이념을 공유하니까!

 권력밖에 모르는 반박정희파의 두 노인이 연이어 최고지도자로 선출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인 김일성과 김정일이 대를 이어 인류의 악몽인 모택동과 스탈린 시대를 지속함에 따라 총과 대포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저주의 땅으로 전락한 북한과, 가치관이 뒤죽박죽이 된 대한민국이 급격히 가까워졌다. 월급 5천 달러의 한국의 귀족노조가 월급 1달러의 북한의 노예 노동자를 끌어안고 '우리는 하나!'라며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스스로 얼마나 가증한 짓을 하는지도 모른다.

 급기야 김씨왕조의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주의 선전선동이 직수입되고 가공되어 대한민국의 지성과 문화마저 황폐화해졌다. 한국의 지성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뒤떨어졌다. 특히 71세에 국가지도자로 당선된 노인이 3백만 동족을 굶겨 죽인 희대의 살인마 김정일과 뜨겁게 포옹하면서, 대한민국은 북두칠성의 국자가 북극성을 향해 기울 듯이 급격히 북쪽으로 기울어졌다. 386대통령 이후 이 암담한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평생 동안 연방제통일을 꾸준히 준비한 듯한 그 대통령이 물러나면서 꼭 집어 낙점한 덕분에 스스로의 지분으로는 한 지역구의 국회의원에도 당선되기 어려운 386운동권의 동지가 대한민국의 최고권력자가 된 후, 그가 갖은 악담과 반칙으로 언론과 문화계를 한 손안에 장악하자(그보다 한 끗발 낮은 총리가 한 말, 

“조선과 동아는 까불지 마라. 내 손안에 있는 것들이여!”) 한국의 지성과 문화는 사할린 사막처럼 메마르게 되었다.


 공포와 기아에 시달리는 2천만 동포와 탈북자와 납북어부와 국군포로는 정신과 말로만 도와 주고, 물질과 행동으로는 오로지 북한공산당을 도와 그 체제가 유지됨을 대한민국 전체를 깽판으로 만드는 것보다 중시하는 386대통령이 모든 가치관을 뒤집어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주의를 반미와 반박정희로 구체화함으로써, 이제 영혼을 잃은 야당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말하면 극우로 몰리는 상황이다. 이런 데서 지성을 찾을 수 없다. 정보가 공개되기 전 모택동의 문화혁명을 극찬한 자가 자신의 제자들이 대한민국을 꽉 잡고 있다고 호언장담해도 별로 놀라는 사람이 없다. 그 정도의 말은 방송만 틀면 언제나 쏟아져 나오니까!


 등소평이 기다렸듯이, 응웬 반 린이 기다렸듯이, 라오가 기다렸듯이, 레이건이 기다렸듯이,

이 광란의 시대가 북한공산당의 몰락과 더불어 일시에 끝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새 시대 새 천 년은 그 뒤에야 올 수 있을 듯하다. 그 후에야 21세기행 방주를 탈 수 있을 듯하다. 누군가 우리나라에도 나이에 관계없이 자신이 들어갈 작은 관 대신 남북한 7천만이 탈 21세기행 방주를 마련해 놓고 때가 오기만 기다리는 사람이 있길 간절히 바란다.


             (2007. 5. 28.)


[ 2007-05-29, 11:1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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