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 신의 사랑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열기는 왜 식을 줄을 모를까.

최성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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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더 높은 지식의 세계에 이르는 유일한 무형의 길이다. -베토벤

 [서기 2056년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서기 2056년이면 세상이 어떻게 변할까. <극단적 미래 예측> 같은 책도 있지만, 정확한 것은 누구도 잘 모른다는 것이리라. 그러나 제3차대전이 일어나 석기시대로 돌아가지 않는 한, 한 가지만은 확실할 것이다. 그것은 모차르트 열풍! 그 해는 모차르트 탄생 3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전세계에서 366일(그 해는 윤년) 내내 모차르트 음악이 흘러 넘칠 것이다. 아, 그 때까지 살 수 있는 사람들에게 축복 있으라!

 1756년 1월 27일에서 250년이 흐른 지도 어느 덧 2년이 다 되어 간다. 지난 2006년도 모차르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1년 내내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행복한 한 해였다.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을 맞아 라디오에서도 연주회에서도 음반 매장에서도 모차르트는 전세계에서 날마다 흘러나왔던 것이다. 이웃 일본에서는 모차르트의 전곡 626곡을 담은 CD판들이 우리 돈 약 300만 원으로 출시되었지만,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만 1만 개나 되는 음악 선진국다운 모차르트 '오타쿠'였다. 베토벤의 헤어스타일로 유명한 소천(고이즈미) 수상의 우향우 개혁이 성공하여 경제도 그만큼 좋아졌다는 간접적인 증거이기도 하고. 어느 쪽이든 부럽다. 샘 난다. 개인적으로 나도 그걸 꼭 사고 싶었는데, 경제사정이 제일 크긴 했지만 그것도 핑계이고 어찌어찌 하다 보니까 못 샀다. 뭐, 언젠가는 살 것이다. 땅을 치는 아쉬움을 못 느끼는 것은 웬만한 모차르트 곡은 내게 있다.

[이태리 여행길에 오른 14살의 모차르트]

 1769년 12월 11일 14번째 생일을 한 달 가량 앞둔 볼프강 모차르트는 종달새처럼 즐거웠다. 후일 스무 살 무렵에 파리로 단둘이 떠날 어머니와, 피아노 레슨으로 능히 생계를 꾸려갈 수 있게 된 누나 난네르는 소금도시(잘츠부르크)에 남겨두고, 볼프강은 아버지 레오폴트와 단둘이서 이태리 여행길에 올랐던 것이다.

 "사랑하는 엄마, 내 마음은 파릇파릇한 즐거움으로 더할 나위 없이 기뻐요. 여행이 너무너무 재미있걸랑요. 마찬 안은 덥지만, 마부는 친절해요. 그런데요, 그는 길이 좀 반반하다  싶으면 냅다 달린답니다. 앗싸!(1769. 12. 12.)" 

 얼마나 기뻤던지 그는 자신의 그리스어 세례명 '테오필루스'를 똑같은 뜻의 라틴어 곧 이태리어의 옛말로 바꾸었다. 아마데우스(Ama 사랑 Deus 신: 신의 사랑)!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 테오필루스 모차르트가 그의 본명이었다.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는 그가 태어난 날이 성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의 날이었기 때문에 붙인 것이고, 볼프강(늑대)은 외할아버지의 이름이다. 테오필루스는 다섯 명이나 어린 자식을 가슴에 묻은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에게 태어난 늦둥이의 대부가 되기로 지방유지인 페르크마이어가 기꺼이 허락해 준 그것이 곧 '신의(Theo) 사랑(philus)'이라고 여겨져서 지은 이름이다. 그러니까 긴 이름 중 부모가 지은 이름은 딱 하나 테오필루스 곧 아마데우스인 셈이다. 과연 그는 '신의 사랑'이었고 '사람들의 사랑'까지 독차지하게 되었다. 250년이 지나도록, 아마데우스는 전세계의 어린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요람에서 무덤까지 누구나 사랑하는 '음악 그 자체'가 되었다.     

[모차르트의 열기는 왜 식을 줄을 모를까?]

 모차르트는 왜 그렇게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 받을까. 그가 음악 역사상 최고의 천재이기 때문에? 그러면 그의 음악은 전무후무한 독창성으로 가득 찬 것일까? 그의 많은 음악은 선배 프란츠 요셉 하이든과 왜 그렇게 비슷할까?

 모차르트가 태어나 자란 시대는 음악적 자양분이 더 없이 풍부한 시대였다. 그 시대의 음악 밭의 한가운데 정성껏 뿌려지고 가꾸어져 가장 화려하게 핀 꽃이 모차르트라면, 그 음악의 밭둑에서 자라나 끈질긴 생명력으로 가장 영양가 있게 영근 열매가 베토벤이다. 

[어릿광대의 싸움]

 1750년은 서양 음악사에서 매우 중요한 해다. 1600년에서 그 때까지를 바로크 시대라고 하고 그 후 1900년까지를 고전/낭만주의 시대라고 한다. 그 해는 바로크 음악의 태산북두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죽은 해이다. 1752년 당시 유럽의 중심인 파리에서 격렬한 음악적 논쟁이 일어났다. <어릿광대의 싸움>이란 이 논쟁의 발단은 전원 어릿광대로 구성된 이태리 오페라단의 공연이었다. 그 오페라를 본 기존의 음악 애호가들은 경박하기 짝이 없다며 귀를 씻고 고개를 돌렸다. 반면에 수준이 좀 낮은 사람들은 박장대소하며 난리를 피우며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어릿광대의 춤을 췄다. 이 때 철학자이자 소설가이자 작곡가인 장 자크 루소가 '교양 없는 사람'들을 열렬히 지지하고 나섰다. 그는 그 오페라야말로 시대정신을 잘 표현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제 음악도 더 이상 귀족과 왕족과 성직자를 위한 권위와 이성의 예술이 아니라고 했다. 오페라가 왜 모두 심각해야 하느냐(오페라 세리에), 오페라는 오히려 재미있고 즐겁고 자연스러운 죄 없는 사치(오페라 부파)여야 한다고, 자연인 루소는 역설했다.

 그렇다, 음악도 문학과 미술과 마찬가지로 드디어 시대정신인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아 새롭게 떠오른 부르주아에게도 활짝 열려야 했던 것이다. 그 도도한 흐름을 루소는 정확히 꿰뚫어보았던 것이다. <의사 소통>과 <단순성>, 그것이 음악의 새 시대정신이었고, 그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임이 드러났다. 바로 이 <어릿광대의 싸움> 4년 후에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뱃속에서부터 날마다 음악을 들으며, 그 자신의 음악적 재능도 뛰어났지만 세기의 천재를 알아보는 안목과 음악 교육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볼프강은 음악 교육에는 아버지에 어림없이 미치지 못함) 음악가 아버지 슬하에 태어났다.

[의사 소통과 단순성]

 루소의 어릿광대 옹호 후 <의사 소통>과 <단순성>에 대한 많은 오해가 있었다. 여기저기서 조잡한 음악이 양산되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 하나도 남지 않고 즉시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던져졌다. 그러면 얼핏 보기에 그런 쓰레기 음악처럼 단순해 보이는 모차르트 음악은 왜 신과 인간의 사랑을 동시에 받을까. 그것은 모차르트가 이성적인 바흐의 음악을 자신의 감성적 음악에 용해시켰기 때문이다. 바흐는 1천 년에 걸친 서양 음악을 아름답고 웅장하고 성스럽고 기괴하고(바로크의 원래 뜻) 어렵고 복잡한 형태로 집대성했는데, 그의 사후 스카를랏티와 하이든 등이 나와 '단순한 시대'로의 튼튼한 새 다리를 놓았고, 모차르트는 그 다리를 폴짝폴짝 건너뛰며 자신의 천상 음악에 곧 <의사 소통>과 <단순성>의 음악에 바흐의 모든 음악적 전통과 유산을 용해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차르트의 음악은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렵다. 단순한 멜로디와 화음 속에 심오한 영혼과 감정이 녹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장일수록 나이가 들수록 해석하기가 어렵다고 하는 음악이 모차르트다.       

[아르스 노바]

 서양 음악에는 세 번의 질풍노도 시기가 있는데, 그것은 14세기초의 아르스 노바(Ars Nova=New Art)와 17세기초의 바로크 음악과 20세기초의 현대음악이다. 아르스 노바는 르네상스 음악을 탄생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십자군 원정 후 선진 문화인 아랍 문화에 충격을 받아 태어난 아르스 노바 음악을 듣고, 드뷔스의 회화적 음악을 듣고 음악 애호가들이 일대 소동을 일으킨 것처럼, 스트라빈스키의 현대 발레 불협화음을 듣고 사람들이 세상의 종말을 보았던 것처럼, 처음에는 다들 미쳤다고 난리가 났지만, 이윽고 그것이 르네상스 음악으로 자리잡자 사람들은 한층 풍부해진 시간 예술에 두 눈을 지긋이 감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신을 찬미하게 이르렀다.

 지금은 도저히 이해 안 되겠지만, 그 때 이전에는 아름다움의 정반대였던 두 요소가 서양 음악에 비로소 들어왔다. 그것이 두 박자요, 3도 음정이다. 그 이전에는 모든 음악이 3박자였기 때문에 처음으로 시대의 반항아들이 2/4박자, 4/4박자 등 두 박자 계통의 '소음'을 들고 나오자, 사람들은 특히 음악 전문가였던 성직자들은 가슴이 벌렁벌렁했던 것이다. 또한  두 음이 동시에 들릴 때, 완전 4도 완전 5도 완전 8도 아니면 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멜로디 파트를 소프라노가 맡을 때 알토가 3도 음정으로 아래서 받쳐 주면 얼마나 감미로운가. 그런데 그것이 14세기 이전에는 마녀의 소리로 들렸던 것이다!    

[기괴한(바로크) 음악의 탄생]

  르네상스가 문학에선 셰익스피어로 인해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른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음악계가 또 다시 미쳐 돌아가기 시작했다. 괴상망측한(baroque) 음악이 탄생한 것이다. 서태지가 처음 나타났을 때 10대들은 즉시 까무러쳤지만, 수학정석을 밀쳐놓고 방문을 꼭 잠그고 헤드폰을 끼고 하염없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지만, 20대 후반만 되어도 TV를 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던 것을 생각해 보면, 17세기초 사람들의 음악적 충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서태지가 선율도 없는 랩으로 분명히 우리말인데도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지껄이는 것을 듣고, 트로트와 로큰롤과 발라드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음악에 대한 정의가 송두리째 허물어지는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알고 보니, 그 중얼거림의 내용이 얼마나 유치하고 상스럽고 천박하던가.

 서양 고전 음악에서는 이미 17세기초에 그런 일이 발생했다. 그 이전에는 아름다운 선율을 예쁘고 거룩한 시가 장식해야 했다. 그런데, 노래 사이에 선율도 없이 중얼중얼하는 하는 것을 들고 나와 '이것도 노래!'라고 우기는 자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레치타티브(recitative)의 효시다. 그런데 이것이 발전하여 가사에 선율을 얹는 오페라가 탄생했다. 그것은 종교음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오라토리오와 칸타타도 꽃피웠다. 더불어 대위법에 의한 다성음악(polyphony)이 고도로 발달했다. 오늘날 대위법 하면 바흐가 떠오른다. 그 시대는 얼마나 대위법적 화성이 발달했는지, 교회 성가대의 10대들이 멜로디만 턱 던져주면 각기 주선율과 잘 어울리는 멜로디로 곧 대위법적 화성으로 4성부가 아니라 무려 8성부로 즉흥적으로 노래할 수 있었다. 현재는 줄리어드음대의 대학원 과정 학생도 그렇게 못한다.

[평균율]

 바로크 시대는 지역마다 제 각각이든 음악 언어가 하나로 통일된 시기이기도 하다. 평균율이 이 때 완전히 정착된 것이다. 평균율이란 쉽게 말해서 '도레미파솔라시도'인데, 이것은 '미파'와 '시도' 사이는 반음이고 나머지는 모두 온음이다. 따라서 이를 반음으로 나누면 모두 12음이 나온다. 그런데 이것은 자연음이 아니고 인공음이다. 가음(La, A)을 440 헤르츠(Hz)에 맞추고 이를 중심으로 위 아래로 반음씩 인위적으로 전체를 똑같이 12음으로 나눈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훨씬 후인 1885년 빈 회의에서 표준음고로 가음을 435 헤르츠로 통일하게 되는데, 현재는 연주효과를 위해 연주음고라고 하여 440 헤르츠에 맞춘다. (국악은 이런 인공음이 아니고 자연음이다. 따라서 국악도 똑같이 12음률이 있지만, 서양 악기로는 연주할 수가 없다.) 연주회에 가 보면, 지휘자가 지휘봉을 휘두르기 전에 오케스트라가 정신없이 삐리릭 끽 하는 이상한 불협화음을 내는데, 오보에가 가음을 내면 현악기들이 이에 맞추는 소리다. 조금만 진동수가 틀리면 귀에 상당히 거슬리기 때문에 이 때의 조율은 아주 중요하다.         

 이 평균율이 편리한 것은 조옮김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장조를 라장조로 또는 내림마장조로 얼마든지 간단히 기계적으로 바꿀 수 있다. 노래방에 가면 가라오케 반주가 나오는데, 자신의 음역과 안 맞으면 간단하게 곡 전체를 오르내릴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평균율이기 때문에 가능한 조옮김이다.

 얼마 전에 백건우가 완주한 베토벤의 32곡 피아노 소나타를 피아노의 신약성서라고 일컫는  반면에 바하의 평균율 클라비어(피아노) 모음곡은 피아노의 구약성서라고 부른다. 여기서 간단한 퀴즈 하나.
 --바하의 평균율 클라비어 모음곡은 1집과 2집이 있는데, 각각 몇 곡으로 이뤄져 있을까?

 힌트는 평균율이라는 말속에 포함되어 있다. 눈치 빠른 사람은 금방 24라는 숫자를 떠올릴  것이다. 둘 다 24곡으로 이뤄져 있다. 12음을 각각 으뜸음으로 하는 음열이 12개가 나오는데, 그것은 각기 장조와 단조 둘이 있다. 따라서 12의 2배는 24인 것이다. 이 모음곡은 실지로 바흐가 1717년 바이마르에서 쾨텐으로 갔을 때(쾨텐시대) 자신이 직접 설계해서 특별 주문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클라비어가 1719년에 도착하면서 이 때 9살이 된 장남 프리데만의 레슨을 위해 작곡하기 시작하여 수십 년에 걸쳐 완성한 것이다. 그러니까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모음곡은 아들에게 평균율을 완벽하게 익히게 하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고, 결과적으로 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럽의 통일 음악 언어로 자리잡은 평균율을 전 인류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더 없이 아름다운 예술로 승화시킨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천자문이 각기 4자로 이뤄진 멋진 시로서 한 개의 글자도 겹치지 않는 것과 나란히 대비된다.

 모차르트가 태어났을 때, 평균율은 완전히 정착되어 있었다. 이것을 이용해서 무한히 다양하고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내기만 하면 되었다. 거기에 더하여 바하가 집대성한 대위법도 있었고 이에 반발하여 나타난 단성률(homophony)도 하이든에 의해 거의 완성되었고, 스카를랏티에 의해 소나타 형식도 탄생했다. 단성률과 소나타를 활용하여 하이든은 교향곡도 작곡했다. 또한 헨델은 하이든과 더불어 오라트리오의 거작을 쏟아 내기도 했다. 한편 이태리에서는 오페라가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호모포니(고전.낭만음악)와 폴로포니(바로크 음악)]

 모차르트의 음악이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이유는 다름 아닌 이 단성률에 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 찬송가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대위법과 달리 멜로디 파트에 알토와 테너와 베이스가 3도와 4도, 5도, 8도 음정을 중심으로 음높이만 다르게 하여 노래를 불러 '층층층' 화음을 넣는다. 주요 3화음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이것이 바로 화성적 기법이다. 각기 멜로디가 다른 다성적 대위법의 결과적 화음이 단성률에서는 의도적인 화음으로 수렴되었다. 이렇게 하여 계몽주의의 시대 정신인 <의사 소통>과 <단순성>이 한꺼번에 달성되었다. 참고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대부분의 노래는 클래식, 팝, 대중가요, 국악 불문하고 반주를 빼면 화성(하모니)이 없는 하나의 선율(멜로디)만으로 이뤄져 있다. 이런 곡은 단선율(monophony)라고 한다.     
        
[이태리 여행의 좌절과 당대 최고의 대가로부터 받은 레슨]

 14살의 모차르트는 이태리에서도 가는 곳마다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의 신민이요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어린양에 지나지 않았다. 어릴 때 연주 후에 무릎에 올라가 입을 맞추며 커서 당신과 결혼할래요, 했던 그 마리아 테레지아도 밀지를 내려 방해했다. 그녀로선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신동인 아들을 이용해서 '천박한' 음악으로 인기나 끌려고 애면글면, 평생 음악만 하면서 편안하게 먹고 살 수 있는 황금 자리를 두 개 구해 자신과 아들이 각각 하나씩 차지하려고 전 유럽을 돌아다니는 게 영 마뜩찮았다. 그래서 그녀는 일이 될 만하면 오늘날 이태리 북부에 있었던 오스트리아의 영지를 다스리는 그녀의 아들 황태자 페르디난트로 하여금 침묵의 고개를 젖게 만들었다.

 "그대는 젊은 잘츠부르크 사람을 고용하자고 했지만, 나는 작곡가나 그런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사람들이 그대에게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아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려. 그 사람들은 거지처럼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우리의 품위를 떨어뜨릴 것이오. 게다가 그들은 대가족이오."  

 그래서 불과 14살에 작곡한 오페라 <알바의 아스키니오>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것은 모차르트에게 아무런 장래 보장을 못해 주었다.

 다행히 이 때 모차르트는 제대로 된 음악 교육을 받는다. 당대 최고의 음악가였던 64세의 마르티니 신부한테 엄격한 대위법 연습을 받은 것이다. 4개월 동안 볼프강은 너무도 얌전하고 진지하게 배웠다. 모차르트 음악 교육은 크게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과 연주 여행을 통해 듣고 즉시 배우는 현장 학습 두 가지였는데, 어쩌면 그 때 처음으로 대가로부터 제대로 된 음악 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모차르트는 바하의 대위법과 교회 음악을 완벽하게 숙지하게 이르렀다.

[모차르트는 기존의 음악 요소로 기존의 음악 장르를 꽃 피운 사람]

 모차르트가 새로이 창안한 악곡 형식은 없다. 그런 점에서 그는 독창성이 뛰어난 천재는 아니다. 대신 모차르트는 있는 음악 재료와 있는 악곡 형식을 이용하여 그 당시에 존재하는 모든 장르에 광채를 더하고 향기를 배게 하고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것이 바로 그의 독창성이었다. 그의 손에 닿으면 음악의 들꽃은 뜰과 방안으로 나비처럼 사뿐사뿐 날아와 사시사철 화려하면서도 우아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나는 듯 마는 듯 괜히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사랑의 페르몬을 뿌렸고, 그의 숨결이 닿으면 곳간에 버려진 음악의 씨가 민들레꽃씨처럼 하늘하늘 날아가 아무 데서나 싹을 틔우고 바람도 없는데도 살랑살랑 고개를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 

 아마데우스는 엄격한 형식을 지키면서도 마치 그 형식이 존재하지 않는 듯 더없이 감미로운 선율과 황홀한 리듬과 풍요로운 화음으로 귀족과 왕족과 성직자만이 아니라 지식인과 새로운 중산계층에게 미지의 신세계를 보여 주었다. 그는 불과 35세에 신의 품으로 돌아갔지만, 그의 음악은 오스트리아의 빈 악파만이 아니라 독일의 만하임 악파, 프랑스의 노트르담 악파,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악파, 이태리의 로마 악파와 베네치아 악파, 바다 건너 영국, 음악 변두리 헝가리와 체코 등 그 어디에서나 자연스럽게 흘러 넘쳤다. 마침내 유럽이 모차르트에 의해 하나의 음악 세계로 통일된 것이다. 그의 음악은 <의사 소통>과 <단순성>이라는 시대정신을 완벽히 구현한 것이다. 베토벤은 그를 이어받아 한 단계 더 유럽의 음악을 발전시켜 모차르트의 음악 꽃이 열매맺게 하고 음악에 개인의 감정과 사상을 집어넣어 낭만적인 음악 꽃봉오리를 맺었다.

[모차르트처럼 오페라도 잘하고 싶었던 베토벤]

 오페라는 모차르트에 의해 관현악이 매우 풍부해지고 다채로워졌다. 오페라는 종합예술로서 성악과 관현악을 조화시켜야 하기 때문에 25살 이전에는 손대기 어렵다. 음악 애호가로선 연극과 음악을 동시에 보고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좋은 작품은 금방 팬클럽을 형성한다. 루드비히 판 베토벤 역시 오페라를 통해서 인기도 얻고 돈도 벌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 진지했다. 단 한 곡뿐인 오페라 <피델리오>를 여러 번 쉽게 고쳤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사람들의 음악 수준을 탓했지만, 그게 아니라 그는 오페라에 소질이 없었다. 그는 모차르트가 죽을 때까지 간직한 천진난만함이 없었던 것이다.
            (2008. 1. 24.)

[ 2008-01-25, 08:5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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