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원칙 있는 실용주의
실용주의는 과학기술 중시 사상이요, 원칙 있는 실용주의는 자유민주에 기반한 철학이다.

최성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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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정부는 실용정부를 자처한다. 반갑다. 기쁘다. 신난다. 한국의 실용정부 원조는 박정희 정부다. 박정희의 실용정부는 500년을 건너뛰어 세종의 실용정부를 이어받은 것이다. 정조는 어디까지나 성리학의 지상낙원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한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실용정부를 이끌었다고 할 수 없다. 그의 사후 조선이 급격한 몰락의 과정으로 접어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역시 성리학을 신봉한 사대부들이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정조 이전보다 더한 반동세력으로 등장하여 백성의 등골을 빼먹은 것이다.

 실용주의의 핵심은 무얼까. 이명박 정부는 시장경제라고 보는 듯하다. 그럼 시장경제의 핵심은 무얼까. 이명박 정부는 규제완화와 토목공사와 영어몰입교육이라고 보는 듯하다. 규제완화는 이해가 가는데, 나머지 둘은, 영어 좋아하는 인수위를 흉내내어 영어로 표현하면, 옆구리를 터지게 만든다.-- That splits our sides. 우리말로는 김밥 옆구리 터진다는 썰렁한 뜻이 아니라, 배꼽 잡게 만든다는 뜻이다. 

 실용주의(pragmatism)는 미국에서 탄생한 철학이다. 영국의 귀납적 경험론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실용주의로 꽃 핀 셈이다. 두 나라의 중심 인종이 앵글로색슨족이라는 공통점과, 브리튼 섬과 아메리카 대륙 사이에 가로놓인 자연환경과 사회구조의 차이점이 유럽의 연역적 합리론과 대조되는 미국판 경험론이 탄생한 배경이다.

 미국은 알렉시스 토크빌(Tocqueville 1805~1859)이 1831년~1832년에 미국을 둘러보고 1835년과 1840년 <<미국의 민주주의 상, 하>>를 발간하기 전까지 유럽으로부터 상놈 국가 취급을 받았다. 유럽의 중하류층이 대서양을 건너가서 세운 나라이기도 하고, 사는 꼴도 보니 야만과 문명 사이로 보였던 것이다. 문학, 음악 등 문화수준도 한참 미달되었다. 애드거 앨런 포(1809~1849)와 나다니엘 호손(1804~1864)의 작품이 나왔을 때 정작 미국인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유럽의 중심 프랑스에서 전율적인 인정을 받자 양키들이 뒤늦게 호들갑을 떨면서 위대한 미국 작품으로 추인할 정도로 그들의 예술적 안목도 형편없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1830년대와 1840년대의 유럽에서 민주주의는 불안, 무질서, 독재의 도화선과 동일시되었다. 그런데 이류 국가로 손가락질 받던 미국에서 토크빌은 이미 민주주의가 아무런 불안과 무질서와 독재의 가능성 없이 정착된 것을 보고 영혼의 눈이 번쩍 뜨이는 충격을 받았다. 거기서 그는 유럽 나아가 세계 민주주의의 희망을 보았다.

 미국은 유럽에서는 상반된 개념인 자유와 평등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신생 독립국 미국은 애초부터 귀족계급이 없었기 때문에 절로 평등한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또는 일확천금의 기회를 찾아 온 사람들이 총 한 자루 들고 또는 칡덩굴 하나 들고 '내가 차지한 땅은 내 것'이 되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신성한 자유를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다. 자유의 작은 집을 떠받치는 주춧돌인 재산권을 침해하는 큰집의 과도한 상납 요구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인구 3백만의 식민지가 인구 약 10배의 당시 세계최강 종주국에 분연히 맞서 싸운 것은 바로 자신의 재산과 자유를 지키고 독립과 평등을 쟁취하기 위한 처절한 생존투쟁이요 양보할 수 없는 명예전쟁이었다. 미국은 이렇게 건국 초기부터 자유와 평등이 사이좋게 손잡은 결과 지방자치와 배심원제도도 자연스럽게 도입했고, 이러한 구체적인 민주 실험 덕분에 시민의 정치참여가 높아졌고 법치주의가 손쉽게 뿌리내릴 수 있었다.   

 영국의 경험론과 경험론의 새 버전인 미국의 실용주의는 불확실성의 아들이요 변화의 딸이다. 브리튼 섬은 대서양과 따뜻한 멕시코만류의 영향으로 안개와 비가 잦다. 날씨가 언제 어떻게 변덕을 부릴 줄 모른다. 날이 궂어도 우산이 필요하고 날이 맑아도 우산이 필요하다. 불확실성과 변화는 브리튼의 자연 그 자체다. 거기다가 대륙의 잦은 침략과 피비린내 나는 내전으로 지배세력이 수시로 바뀌었다. 여러 인종이 섞였다. 순수혈종이 없었다. 언어도 완전 짬뽕이 되어 버렸다. 자연만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도 만연한 이런 불확실성과 변화의 요소는 자연도 인간사회도 상대적으로 평온했던 대륙 유럽과 달리 브리튼에서는 변수(變數)라기보다 상수(常數)였다. 거기 사는 사람들은 말과 행동이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선 어떤 것도 경험해 보지 않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신천지 미국도 불확실성과 변화의 땅이었다. 날씨는 허리케인이나 토네이도 외에는 어느 정도 예측 가능했으나, 인간의 생존과 생활은 영국보다 더 불확실했고 변화무쌍했다. 서부로 땅이 끝없이 넓어지고 이주민이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불확실성의 파고와 변화의 파장은 한층 높아지고 넓어졌다. 구 대륙의 고상한 이론을 따르는 것은 우스개가 되어 버렸다. 대신 신대륙에서는 유럽이나 영국과는 달리 언제나 오늘보다 내일이 더 좋으리란 희망이 있었다. 불확실성과 변화가 새 땅에서는 희망의 계단 또는 가능성의 사다리가 되었다. 게다가 무한한 땅과 자원에 비해 인구는 아무리 몰려와도 항상 부족했다.

 무한한 땅과 자원을 이용하여 적은 인구로 불확실성과 변화를 예측가능성과 희망으로 바꾸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손발만 열심히 놀리는 게 아니라 그 못지않게 머리도 많이 쓰는 것이다. 당장 내게 유용한 것을 손쉽게 만들어내는 과학기술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얼키설키 모여 영국의 경험론이 미국의 실용주의로 업그레이드되었다. 경험론이 실험과 관찰(경험)에 기초를 둔 과학적 사고 체계라면,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용주의는 현재의 불확실성과 변화를 재료로 하고 희망을 촉매로 하여 미래의 행복을 현실화시키는 기술이다. 신천지는 유럽의 철학자들이나 문학가들이 상상의 날개를 펴고 공간의 끝에서 끝, 시간의 끝에서 끝까지 날아다니며 구경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자극적인 것들이 바로 눈앞에 날마다 깜짝깜짝 펼쳐졌다. 관념론의 상상력이 도리어 변화무쌍한 현실에 미치지 못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따라서 사고(思考) 실험을 할 필요가 없었다. 현실을 따라가고 현실에 적응하기에 급급했다.

 신대륙에서는 자유와 평등도 이론적으로 따지기보다 현실에 바로 적용하면 그만이었다. 그게 바로 미국의 민주주의였다. 그게 바로 정치의 실용주의였다. 실용주의는 <<미국의 민주주의>> 이후 다시 20년이 지나 미국 민주주의의 치명적 결함이었던 노예제도를 둘러싸고 북부의 현실적 자유와 남부의 위선적 공화가 거칠게 갈등을 해소한 후, 1870년대부터 체계화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필연적 귀결이었다. 모든 인간의 잠재능력을 끌어올리는 교육의 보편화와, 과학기술로 인간의 근육을 대신하는 생활 속의 실용주의가 일반화된 북부의 인종을 초월한 자유민은 노예 노동에 바탕을 둔 백인 주인끼리의 천국을 소외계층이 없는 공동체라 주장하는 남부의 시대착오적 그리스로마 식 공화주의와는 양립할 수가 없었다. 헤겔의 말을 어설프게 원용하여 사상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남북전쟁은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한 인문주의적인 북부의 실용주의가 노예노동을 바탕으로 한 비인도적이고 위선적인 남부의 공화주의로부터 가면을 벗겨내고 주인으로서 정신세계가 황폐해진 백인만이 아니라 노예로서 오히려 고결한 영혼을 소유한 흑인까지 확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860년대 이래 실용주의의 전국적인 확산과 정착으로 미합중국은 민주화와 산업화의 모범국으로 폭발적으로 발전하여 단숨에 영국을 제치고 실용주의 철학이 완성되는 1910년경에 세계의 지도국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유럽의 갈등과 모순이 폭발한 양차 세계대전은 미국만이 해결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가 영국이 아니라 미국에 갔다면, 그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하나로 묶는 이론을 개발했을지 모른다. 미국에는 무한한 자원과 상시 부족한 인구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에 너도나도 기술개발에 매달렸다. 현실적으로 미국 실용주의의 핵심은 기술개발이었다. 유럽과 달리 미국은 기술개발이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실업률을 높이는 게 아니라 단순하고 귀찮은 일은 기계에게 맡기고, 노동자는 새로운 기계가 나올 때마다 그 기계를 다루는 새로운 기술자로 신분이 상승하여 공장에서 쫓겨나기는커녕 이전보다 임금을 더 많이 받게 이르렀다. 링컨의 말처럼 "어제는 노동자, 오늘은 기술자, 내일은 사장"이 미국의 보편적 사회현상이었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다 함께 잘사는 공화주의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지만, 기술개발을 증오하고 재산권을 제한하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관념론이어서 남부든 북부든 발붙일 데가 없었다.

 세종과 박정희가 실용주의자가 된 것은 그들이 불확실성과 변화의 시대에 살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사고방식으로는 현실의 불확실성과 변화에 대처할 수 없었다. 그들은 희망을 갖고,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고 국민을 부유하게 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품고, 작은 목표를 세워 하나하나 차근차근 주어진 현실을 최대한 이용해야만 작은 목표의 티끌이 모여 원대한 계획의 태산이 된다는 것을 알고(세종은 왕궁의 돼지를 백성들에게 무료 분양하여 잔칫집의 돼지고기 상식(常食)을 정착시키기도 함), 중국의 이론이나 미국의 이론도 하나의 이론으로 받아들일 뿐 현실에 맞지 않으면 과감히 버리고 실용성을 유일한 잣대로 삼아 기존의 여러 이론을 절충하거나 없으면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불확실성의 안개를 하나하나 걷어내고 변화의 비를 때로는 농업용수로 때로는 식수로 때로는 공업용수로 다양하게 이용했다.

 영국의 경험론, 미국의 실용주의, 세종과 박정희의 실용주의에서 공통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좋든 싫든 현실을 인정하고 현실을 왕창이 아니라 조금씩 개조하는 것이다. 그 밑바탕에는 과학적 합리주의와 생활 개선의 원동력인 기술개발이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과학기술이 있었다. 18세기의 영국과 19세기의 미국, 15세기의 세종과 20세기의 박정희, 그들의 공통점은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이다. 이로써 실용주의는 과학기술 중시 사상임을 알 수 있다.

 박정희는 누구보다 고독했다. 그는 항상 국가 존망의 위기 속에서 살았다. 흉탄에 쓰러지는 날까지 공산주의의 끓는 화로를 머리에 이고 살았다. 육이오 후에도 북한의 국가 총동원 전시체제는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김일성의 사후에 선군정치라는 노골적인 군사독재정치의 간판을 내걸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1975년에는 월남이 적화통일되었다. 제일 큰 문제는 한국의 명분론적 관념론적 지식인이었다. 그들은 조선의 성리학을 민주주의로 또는 사회주의로 민족주의로 이름을 바꾸어 밀교처럼 신봉하며 박정희의 실용주의는 개똥철학으로 비하하며 그를 악마와 동창생인 독재자로 몰아세웠다. 정신적으로 그들은 월남의 베트콩과 유사했다. 만약 이들이 대세를 장악하면, 아무리 미군이 지킨다고 해도 월남처럼 내전이 일어나거나 한국이 적화통일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따라서 박정희는 실용주의만으로는 곤란했다. 원칙 있는 실용주의가 필수불가결했다. 그에게 원칙은 자유민주였고, 공산주의의 창에 맞서는 자유민주의 방패는 반공이었다. 전세계  개도국에서 유일무이하게 그는 보통.평등.비밀.직접 선거의 원칙 하에 군복을 벗고 스스로 대통령의 후보로도 나왔고 통치 기간 내내 국회의 약 절반이 야당으로 채워지는 것을 물리적으로 막은 적이 없지만, 반공은 누구에게나 강요했다. 그는 누구든 반공을 부정하는 자는 자유민주의 적으로 간주했다. 박정희의 원칙 있는 실용주의가 화려하게 꽃 핀 서울올림픽이 끝난 후 도미노처럼 악의 제국을 비롯하여 공산권이 줄줄이 무너지면서, 박정희의 반공은 레이건의 반공처럼 자유민주의 보루요, 싸우지 않고 싸우는 손자병법의 제1 원칙이었음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한국은 몽환적 민주화의 알록달록 깃발 아래 전세계와 정반대의 길로 들어섰다. 박정희의 반공은 한국 지식인의 타도대상이요 조롱거리였다.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는 두 가지 점에서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그것은 과학기술의 주춧돌이 없다는 것과 자유민주의 기둥과 대들보가 보일 듯 말 듯 아른거린다는 것이다. 과학기술부와 정보통신부의 폐지 그리고 '비핵개방3000'은, 아무리 화려한 '작은 정부'의 꽃다발과 아무리 눈부신 상호주의의 꽃가루로 장식한다 하더라도,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가 짠 맛 잃은 소금이요 빛 없는 등불임을 스스로 증명한다.
                (2008. 2. 1.)
     
 

[ 2008-02-02, 11:3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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