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忠이 조선의 孝를 유린하다
임진왜란 때의 폐습이 대한민국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최성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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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중 조선이 한꺼번에 가장 많은 군대를 동원한 전투는 1592년 5월 5일(이미 이틀 전인 5월 3일에 왜군은 한양을 무혈점령) 용인전투로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삼도 연합의 근왕병(勤王兵) 6만여 명이었다. 이이의 10만 양병설이 인구에 회자(膾炙)하는데, 그것은 사료의 뒷받침이 되지 않는 것이어서 그의 문하생들이 후에 붕당을 강화하기 위해 지어낸 말인 듯하지만, 어쨌건 단시일에 6만여 명이 모인 걸로 보아 여기에 의병을 포함하더라도 장부상으로는 조선이 임진왜란 당시 10만 명에서 20만 명의 군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겉이 아니라 속이었다.

 

 용인에 집결한 6만 대군은 왜장 협판안치(脇坂安治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일사불란한 지휘 아래 프로 전사 1천6백 명이 공포탄을 몇 방 쏘자, 어미 날개 죽지에 숨어 고개만 내밀고 사방을 호기심에 어려 둘러보던 꿩 병아리들이 무슨 일로 어미가 푸르륵 날아가면 즉각 사방으로 흩어지듯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그게 끝이었다. 그 후 7년 동안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 외에는 두 번 다시 육지에서는 실력은 둘째치고 숫자만이나마 일본과 대등한 대군을 동원할 수 없었다. 8도에서 다 긁어모아야 최대 만 명밖에 모을 수 없었다. 일본은 얼마나 통쾌했던지 지금도 임진왜란 중 최대의 쾌거로 이 용인 전투를 꼽는다.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수),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尹先覺) 등이 치계하였다.
 “신들이 기병·보병과 6만여 인을 거느리고 이 달 3일에 수원(水原)에 진을 쳤는데 양천(陽川) 북포(北浦)를 경유하여 군사를 건너려고 합니다. 앞뒤 양쪽에서 들이치는 계책을 조정에서 급속히 지휘해 주소서.”【 김수 등이 올 적에 행군(行軍)함에 규율이 없어 앞뒤가 서로 호응하지 못하였다. 선봉(先鋒) 백광언(白光彦) · 이지시(李之詩) 등은 땔나무하고 물긷는 왜적 10여 급(級)을 참하고서 더욱 왜적을 경시(輕視)하여 교만한 기색이 있었다. 수는 이미 누차 패전하여 수하에 군사도 없어 형세가 고단하고 기운이 꺾이었으며, 광은 본시 용렬하고 겁이 많아 계책을 세워 대응할 줄을 몰랐기 때문에 조정에 명령을 청하여 진퇴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선조실록 1592/6/21)

○ 慶尙道 觀察使 金수, 全羅道觀察使 李洸, 忠淸道觀察使 尹先覺 等馳啓曰: “臣等率騎步及六萬餘人, 以本月初三日, 陣于 水原 , 欲由 陽川 北浦濟師矣。 腹背挾攻之策, 請自朝廷急速指揮。【 수 等之來也, 行軍無律, 首尾不相應。 先鋒 白光彦 、 李之詩 斬賊之樵汲者十餘級, 益輕賊有驕色。 수旣累敗, 手下無軍, 勢孤氣挫, 洸 本庸怯, 不知所以策應, 請命於朝廷, 以爲進退之計。】
 

 

 윤선각이 또 치계하였다.
 “신이 5월 4일에 수원에서 전라도 군사와 길을 나누어 신은 안산(安山)을 경유하고 이광(李洸)은 금천(衿川)을 경유하여 양천(陽川)의 북포(北浦)에서 회합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전라도 선봉장 백광언(白光彦)은 이미 용인에서 적과 서로 대치하였습니다. 신은 행군하여 수원부 앞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유숙하였습니다. 5일 아침에 병사(兵使) 신익(申翌), 방어사 이옥(李沃) 등으로 하여금 각각 병마를 거느리고 나아가 전투하도록 하고, 신 및 이광 ·김수 등은 모두 전쟁터에서 10리쯤의 거리로 진을 옮겨 계속 응원할 계획이었는데, 신익 ·이옥 등이 비보(飛報)를 보내 위급함을 알리기에 신이 정예병 2백 명을 뽑아 계속 달려가 응원하게 하여 3위(衛)가 합력해 싸워 10여 급(級)을 베었습니다. 그런데 곽영(郭嶸)의 진영이 적의 침박(侵迫)을 받아 황망히 달아나자, 또 한 부대의 적이 동쪽에서 쫓아와서 갑자기 신익을 핍박하니 모든 군졸도 흩어져 버렸습니다. 신의 진중(陣中)에 상하(上下)가 아직 아침밥도 먹지 않고 군사들도 미처 정돈하지 못했는데 양진(兩陣)의 패전하여 흩어진 병졸들이 토붕 와해되어 진영 앞으로 달아나 지나가기에 신이 경악을 금치 못하여 즉시 군관 10여 명으로 하여금 칼을 휘둘러 6∼7명을 참하게 하였지만, 그래도 중지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신은 다만 군졸 두어 사람들과 진중에 외로이 남아 있을 뿐이어서 어찌할 방법이 없어 부득이 적의 예봉(銳鋒)을 피해 행군하여 갈원(葛院)에 이르렀습니다. 김수가 뒤이어 도착하기에 신이 김수와 평택현(平澤縣)에 이르니 이옥(李沃)이 어둠을 틈타 뒤따라 왔습니다.
 
 신들이 처사를 잘못하여 이렇게 무너져 패전하게 되었으니 만 번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으므로 행재소(行在所)에서 거적을 깔고 앉아 주책(誅責)을 기다려야 되겠지만, 승세를 탄 적들이 만약 직산(稷山)의 길로 곧장 내려가면 우도가 패망될 것이 염려되었습니다. 이에 신은 병사 신익, 방어사 이옥, 조방장 이세호 등과 서울에 가까운 고을에 나누어 주둔하면서 흩어져 도망한 병졸들을 소집하여 뒷일을 도모하고자 합니다.”(선조실록 1592/6/28)
 

  
 얼마나 장수가 전투에 서툴렀던지 적을 벤 숫자(10여명)나 명령에 불복한다고 아군을 벤 숫자(6~7명)나 비슷했다. 오합지졸도 이런 오합지졸이 없었다. 임금부터 어찌나 잘 달아나는지 쫄쫄 굶으며 하루에 120리도 예사로 도망갔다. 원균만 도망간 게 아니다. 군인이든 관리든 백성이든 90%가 도망갔다! 왜군이 4월 14일 부산성 함락에서 서울 무혈입성까지 걸린 시일은 고작 19일! 당시의 꼬불꼬불 좁은 길을 감안할 때, 부산과 서울의 거리는 족히 600km는 되었을 것이니까(경부고속도로는 430km), 왜적은 하루 평균 32km, 80리나 달렸다. 과거 보러 가는 선비보다 빨랐다. 16만의 군대는 엄청난 규모인데, 이런 대군은 하루 20km 행군해도 엄청난 속도다. 전투는 사실상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졌을까. 당시 일본에서라면 그 정도 땅을 빼앗으려면 아무리 적어도 10년은 족히 걸렸다. 1582년 어느 절에서 통일의 기초를 거의 다 닦은 직전신장(織田信長)이 암살된 후, 그 기업을 그대로 이어받은 전쟁귀신 풍신수길이 통일한 것은
1590년이었다. 다 된 밥을 떠먹기만 하는데도 꼬박 8년이 걸렸던 것이다. 일본은 막부시대(1185~1466)와 남북조시대(1336~1392)와 전국시대(1467~1590)를 거치는 동안 지역마다 크고 작은 대명(大名 다이묘)이 버티고 있어서 만만한 놈이 한 놈도 없었다. 칼싸움이라면 조선사람이 말싸움하는 것보다 잘했다. 칼의 시대가 무려 400년간 지속되면서 살아남기 위해 누구나 무예를 닦고 병법을 익혔다. 여기에 전국시대 말기에 포르투갈로부터 조총이 도입되면서, 이를 가장 먼저, 빨리, 많이, 몰래 도입한 자가 통일을 꿈꾸게 이르렀다. 그가 바로 직전신장이었다.

 

 나는 일본사의 전통적인 시대구분 대신 막부시대부터 1615년 대판(大阪 오사카) 전투까지를 전란(戰亂)시대 내지 내란(內亂)시대라고 이름짓는다.

 

 1368년 중국에서는 몽골의 원을 몰아내고 한족의 명이 들어선다. 약 한 세대 후 1392년 청구(靑丘)에서는 조선이 들어선다. 두 지역에 거의 동시에 사대(事大)하고 교린(交隣)하는 붓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명의 영락제와 조선의 세종까지는 원래 칼로 세운 나라답게 두 나라는 군사도 막강했다. 명은 정화를 시켜 아프리카 동안까지 진출했고, 조선은 신라통일 이래 그렇게도 오매불망 원했던 고구려 옛 땅 중 꽤 많은 부분을 되찾아 처음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동시에 국경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그에 앞서 바다 건너 왜구의 소굴도 짓밟았던 것이다. 문무의 조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스스로 외적보다 내부의 적을 더 두려워 하여 군대를 의도적으로 약화시키면서 군사력이 형편없이 약화되었다. 다행히 몽골은 예년의 위엄을 다시는 못 찾았고 여진은 뿔뿔이 흩어져 있었고, 왜구는 잠잠했다. 그래서 명과 조선에서는 장장 200년간 평화가 지속되었다. 이 두 나라에서는 철저히 문관 우위가 지켜져서 독립적으로 자신의 군대를 가진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왕조를 뒤엎으려는 반란은 누구도 꿈꾸지 못했다. 1,000명의 정예병도 독자적으로 거느린 장군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따금 대역죄를 덮어쓰고 참살되는 자가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적을 제거하는 구실밖에 안 되었다. 왕실 안에서 겨우 군사 100여 명을 동원하여 왕을 바꾸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것은 왕조를 바꾸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명(明)은 중국의 역대 왕조 중 가장 시원찮고 가장 부정부패가 심한 왕조였다. 명의 시조 주원장이 관리는 청렴해야 한다며 녹봉을 터무니없이 적게 주는 바람에 생계형 부정부패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조선도 비슷했다. 백성과 가장 가까운 관리인 지방의 아전은 아예 과전도 녹봉도 없었기 때문에 다들 알아서 해 먹었다. 그 수단이 고도로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생활은 토지를 바탕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벼슬과 학문과 연줄과 뇌물과 패거리로 토지를 챙겨서 세금을 안 내거나 거의 안 내는 것이 양반의 최대 관심사가 되었다. 오로지 내 가문, 내 가족, 내 동문, 내 붕당뿐이었다. 입으로는 곧 죽어도 삼강오륜이었고!

 

 이렇게 하여 조선은 중기에 접어들면서 철저히 효(孝)의 나라로 바뀌었다. 나라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로지 내 가문, 내 가족뿐이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부모가 죽으면 나라 일은 그 날로 팽개치고 그 무덤 곁에서 초막을 짓고 3년 동안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지 않는 자는 인간도 아니었다. 충(忠)은 더 이상 국가나 백성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임금에게 잘 보이는 것으로 전락했다. 그것은 일종의 효에 다름없었다.

 

 언제 누구에게 죽을지 모르는 일본에서는 잘 싸우는 자가 되거나 잘 싸우는 자를 모시는 것이 가족을 돌보는 것보다 중요했다.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누라도 바치라면 기꺼이 바쳤고, 자식도 인질로 내놓으라면 언제든지 내놓았다. 일본은 전세계에서 가장 철저한 충의 나라로 변한 것이다. 이 전통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살아 있다. 사원은 회사에 충성을 다하고 회사는 사원을 최대한 보호한다. 아랫사람의 충성에 대해서 윗사람은 신의로 갚는다. 시야가 넓다. 법을 잘 지킨다.

 

 대신 한국은 그저 내 부모 내 자식이다. 시야가 좁다. 법을 잘 안 지킨다. 내 가족이나 내 정신적 부모를 위해서라면 못하는 짓이 없다. 과외하지 말란다고 과외 못하는 자는 부모도 아니다. 법이 무서워 못하는 게 아니라 돈이 없어서 못할 따름이다. 신성한 국회에서도 어제 한 말 오늘 획 뒤집고 난장판을 만든다. 부모와 똑같은 어르신의 칭찬 한 마디면 머리에 피가 철철 흘러도 하나도 안 아프다. 그 영광의 상처 하나로 평생 직업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 어르신이 이 당을 만들면 이 당으로 가고 저 당으로 가면 저 당으로 가고 그 당을 만들면 그 당으로 간다. 아버지가 무조건 옳듯이 어르신은 무조건 옳다. 아버지한테 바른 소리 못하듯이 어르신한테 꿈에도 바른 소리를 못한다. --우리는 한 가족! 

 

 국가가 존망지추에 이르렀음에도 국가는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제 가족의 안위만 챙기는 데는 만백성의 어버이 선조가 가장 앞장섰다. 1597년 6월 14일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장계가 올라왔다. 그에 따르면, 이순신 장군을 하옥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간첩 요시라가 일러 준 건데, 기존의 3만에 더하여 15만이 곧 들이친다고 했다. 통제사 원균이 지키고 있는 조선의 바다를 거쳐 대대적으로 침략하는 것은 여반장이라 생각하고 드디어 왜군이 행동을 개시하기 시작하려고 한 것이다. 이 첩보를 듣고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다가 불과 나흘  만에 선조는 제 식구부터 챙긴다. 일말의 양심은 있는지 명나라 군사가 서울로 오기 전에 왕비와 자식을 피난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비겁한 인간이다. 아귀같이 남의 돈 잘 뜯어먹는 제 형님 하나 살리려고 전 국민이 보는 TV 앞에서 왜곡된 정보로 좋은 학교 나온 인재에게 망신을 주어 그로 하여금 수치에 부들부들 떨며 이승과 하직하게 만든 어느 대통령을 보는 듯하다.

 

 

 ...
 요시라가 자기의 의견을 말하기를, ‘뒤에 나올 군사가 15만, 이 곳의 왜군이 3만, 합계 18만이다. 3∼4만 명은 진영에 유둔할 것이고 그 나머지 군사는 깊숙이 들어가는데 잇대어 진영을 치지는 않을 것이다. 
 ...
 조선의 수군은 이미 정돈되었는가? 지금쯤은 출전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1597/6/14)

...
“적의 형세가 이러하여 마 도독(麻都督)과 양 경리(楊經理)가 올 예정이다. 그러나 중국군[天兵]이 나오더라도 적을 꼭 토벌한다고 기약하기 어렵고 양식이 떨어질까 염려되니, 일이 매우 어렵게 되었다. 마 도독과 양 경리가 나오기 전에 중전(中殿)을 피난시키고 싶은데 자세히 헤아려 결정하라.”
...
(선조실록 1597/6/18)


 

 임금이 천리 밖에서 적이 쳐들어온다는 소문만 듣고도 제 식구부터 피난시키려 하는데, 백성들이 가만있을 리 없다. 사간원, 사헌부, 승정원에서 석 달에 걸쳐서 제발 그러지 말라고 애원하지만,
'알았다.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 이미 조치를 취했다. 너희는 가족을 도망시키면서 왜 나만 못하게 하느냐. 이미 중지하라고 했다.'
등등으로 짜증과 명령과 부인(否認)의 연막을 치다가, 기어코 선조는 가족을 9월 13일에 피신시킨다. 그 장면이 아비규환이다.


 

 경기 감사 홍이상(洪履祥)이 치계(馳啓)하였다.
 “중전(中殿)과 동궁(東宮)이 상수참(湘水站)에서 주정(晝停)하였는데, 지정된 각관(各官)들이 모두 나와 대기하지 않아 공상(供上)을 전폐하였습니다. 저녁에 마전(麻田) 앞 강에 이르렀는데 작은 배 4척 만이 있었으므로 수많은 인마(人馬)와 배종한 사람들이 도로를 꽉 메운 채 밤중에야 강을 건너 마전에 도착하였습니다. 전도되고 미안스러운 상황을 차마 말할 수 없는데 몹시 비통스러운 심정으로 석고대죄(席蒿侍罪)합니다.” 
 (선조실록 1597/9/13)

 


 그 사이 진짜 왜군이 대대적으로 쳐들어와서 7월 16일 원균이 참패하여 영남에 이어 호남도 무인지경이 되고, 아니나 다를까, 왜군은 바로 6년간 전쟁 무풍지대였던 호남으로 소풍가서 8월 16일 남원을, 골목대장이 심심풀이로 막대기로 두어 번 때려서 설익은 감을 후루룩 떨어뜨리듯이, 중국과 조선의 연합군이 지키는 호남의 보루를 장난 삼아 무너뜨린다. 조선 전체가 공포에 휩싸인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도성 백성들이 남원의 패전 소식을 듣고 며칠 동안에 모두 도피하여 몇 명 남지 않았는데, 그나마 남은 자들도 모두 짐을 꾸려놓고 내전(왕비)의 동정만을 기다리다가 어제 또 전주 사태의 소식을 듣고 더욱 놀라며 궤산되고 있으니, 지금 조처를 잘 하지 않으면 성안이 텅 비게 될 염려가 목전에 임박해 있습니다. 중국 장수가 이런 실정을 트집잡아 군사를 철수하여 귀국하겠다고 하면, 모르겠습니다만 장차 무슨 말로 답변하겠습니까. ...
 (선조실록 1597/8/21)


 

 왕비를 비롯하여 임금의 가족이 '솔선수범'하여 몽땅 도망가자, 9월 15일 도성은 텅 비게 된다.

  

승정원이 아뢰기를,
 “도성(都城)의 주민들이 모조리 도피해 나가고 남아 있는 사람은 얼마 안 되는데, 현재 머무르고 있는 자들은 노약자나 의지할 데 없는 고독한 사람들뿐입니다. 상께서 혈혈 단신으로 의탁할 데 없는 아동과 여인들을 염려하시어 쌀을 주라는 분부를 특별히 내리셨으니, 이는 실로 긍휼히 여기는 훌륭한 뜻에서 나온 것으로 또한 위안하고 진정시키는 한 방도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부(五部)의 관원들이 명을 받들어 초록(抄錄)하는 즈음에 이미 그 쌀을 주라는 명령을 알려 버렸으니, 지금 중지하여 그들의 큰 기대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탁지(度支)의 관원이 군량을 걱정하여 수대로 다 줄 수 없다고 하는데 식구 수대로 다 줄 수는 없다 하더라도 현재 남아 있는 집 및 호소할 곳 없는 여인과 아동들에게는 쌀과 소금을 나누어 주고 성상께서 구휼하는 뜻을 포고하도록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선조실록 1597/9/15)
 

 

 하느님이 조선을 보우하사, 바로 그 다음날 이순신 장군이 세계해전사상 가장 빛나는 명량대첩을 일궈낸다. 그리하여 왜군도 썰물같이 물러가고 피난 갔던 왕비와 백성도 호호깔깔 돌아온다. 그러나 그것이 이순신 장군 덕분이라는 걸 선조와 조정 대신들은 죽어도 모른다. 오로지 직산에서 명의 해생이 왜군을 크게 무찌른 것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실록에 따르면, 명과 왜 중 어느 부대가 많이 죽었는지도 불분명하다. 그냥 유리하게 명나라 군사도 많이 죽었다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유구한 사대주의 정신을 이어받아, 지금도 국사 책에서는 이것을 직산대첩이라고, 정유재란의 변곡점이 된 획기적인 승첩이라고 가르친다.

 

 실은 직산전투는 천안까지 무인지경으로 밀고 온 전쟁의 달인 10만 명이 전초부대의 119 구조 신호를 받고 본격적으로 한 판 벌이려고 하자, 중과부적임을 알고 덜컥 겁이 나서 명나라 군이 혼비백산 도망쳤던 전투에 지나지 않았다. 그 후 왜군은 명나라 병사의 코를 모조리 베어 버리려고 본격적으로 준비하다가, 천만뜻밖에도 남해안과 서해안이 봉쇄되었다고 하자, 전쟁의 신 마르스가 부활하여 자신들을 독 안에 든 생쥐로 만들까 봐 허겁지겁 마르스도 난감해 하는 난공불락의 왜성(倭城)이 위치한 남해안 지역으로 썰물같이 물러난 것이다.     


 

제독 접반사(提督接伴使) 장운익(張雲翼)이 아뢰기를,
“방금 직산(稷山)의 전쟁터로부터 돌아온 중국 병사가 말하기를 ‘천안(天安)과 직산 사이에서 뜻밖에도 왜적의 선봉이 모두들 흰 옷을 입고 들판을 뒤덮어 오기에, 중국 병사들이 처음에는 조선 사람으로 생각하여 진격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후에 왜적의 선봉이 먼저 포를 쏘므로 중국 병사들이 일시에 말을 달려나가 시살(시殺)하며 한참 동안 교전(交戰)하였는데, 화살에 맞거나 곤봉에 맞아 죽은 왜적이 거의 5백∼6백 명에 이르렀고 수급(首級)은 30여 개를 베었으며 해 부총(解副摠)과 양 참정(楊參政)도 각각 손수 수급 2개를 베었다. 그런데 왜적이 산에 올라가 백기(白旗)를 드니, 천안의 대군(大軍)이 즉각 구름처럼 모여들었으므로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각자 퇴각하여 지켰는데 해 부총 등 네 장수는 지난밤에 직산을 떠나 올라오고 있으며 중국 병사들도 죽은 사람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독이 즉각 각 군영에 명을 내려 모조리 강변(江邊)으로 나가 진을 치고 그대로 야영(野營)하게 하였다고 하며, 또 영기(令旗)를 보내 파 유격(擺遊擊)으로 하여금 정예병 2천5백 명을 뽑아 거느리고서 수원(水原) 길에서 왜적을 맞아 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註] 해 부총(解副摠) : 이름은 해생(解生)이다.
[註] 양 참정(楊參政) : 이름은 양등산(楊登山)이다.
(선조실록 1597/9/9)
 

  
 말은 선비가 잘하고 싸움은 무사가 잘한다. 닭 한 마리 못 잡는 효자는 담 밖에서 칼이 번득이면 아무리 잘해야 고함만 지르다가 이윽고 맨몸으로 부모를 감싸는 효도밖에 못한다. 전쟁터에서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죽지 않기 위해 적의 목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수도 없이 베어 본 무사는 담 밖에서 칼이 번득이면 잽싸게 가족을 피신시키고 번개같이 갑옷을 갖춰 입고 칼을 들고 아드레날린을 마구 분비하며 침입자가 휘두르는 칼의 허점을 노린다.

 

 이런 지극히 당연한 이치를 조선은 철저히 무시했다. 문관이 항상 최고 사령관이 되어 시시콜콜 꿩 병아리 한 마리 못 잡을 명령을 마구 내렸다. 앞뒤가 전혀 안 맞는 그 명령 중 하나라도 안 지키면 아무리 전투마다 대첩을 거둔 상승장군도 괘씸죄를 추상같이 적용하여 오랏줄에 꽁꽁 묶어 죽도록 팼다. 그러다가 김덕령처럼 진짜 죽이기도 했다.    
 

 전쟁을 잘하려면 군대가 있어야 하고, 군대가 있으려면 평소에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하고, 평소에 준비에 만전을 기하려면 군인을 우대해야 하고, 군인을 우대하려면 그들이 드높은 긍지와 사명의식으로 군사훈련에 전념하게 해야 하고, 군인이 군사훈련에 전념하게 하려면 식량과 무기를 충분히 대 주어야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군사는 경제다.

 

 일본은 400년 전란시대를 통해 이를 몸으로 터득했다. 특히 풍신수길이 전쟁은 보급이라는 걸 가장 잘 이해했다. 일본은 농업과 공업과 상업이 골고루 발달했다. 그 중에 근간은 역시 농업이었다. 1만 석에 군인 250명--이것이 공식이었다. 10만석 영주라면 2천5백 명의 군인을 동원할 수 있었다. 100만석에 2만5천 명, 풍신수길은 2백만 석의 대명이었으니까, 직할부대가 5만 명이었고 임란 후에 덕천가강(德川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은 7백만 석의 장군이었으니까, 직할부대가 17만5천 명이라는 말이다. 민두기의 <<일본의 역사>>에 의하면 16세기 말 일본의 총석고는 1850만 석이었다. 46만2천5백 명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조선에 16만 명을 파견하고도 30만 명의 여력이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1600년 일본의 운명을 결정짓는 관원(關原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서 양군은 각각 10만과 8만을 동원한다. 1615년 긴긴 400년 전란시대를 종식시키는 대판전투에서는 덕천은 20만, 풍신의 아들은 10만을 동원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불과 20년도 안 되어 큰 전쟁을 두 번이나 치른다. 그 정도로 당시 일본의 잠재력은 대단했다. 

 

 조선 중기 이후 가족을 최우선으로 하여 양반이 나라의 세금 떼어먹는 게 정상인 중앙집권체제의 조선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영주가 영지에서는 사실상 왕이었기 때문에 대체로 사공육민(四公六民)의 원칙에 따라 소득의 4할은 조세로 걷었다. 5할도 걷었지만, 조선처럼 사실상 6할 7할 이렇게 가렴주구하여 국가에는 거의 내지 않고(조선에선 중앙에서 총 10만 석을 못 걷었음) 개인이 대부분 착복하는 짓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민심을 잃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만 석에 군인 250명의 상비군을 둘 수 있었다는 것은 군인 한 명에 40석이 필요했다는 말이다. 세금을 이 중에서 4할 걷는다면, 군인 한 명에 16석이다. 이 중에 군사비로는 얼마나 쓰였을까. 1352년 일본에는 저 유명한 반제법(半濟法)이 공포된다. 중앙에서 파견된 수호(守護)는 원래 군사상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그러나 이 법에 의해 각 지방의 수호는 조세 중 50%를 군사비에 충당할 수 있었다. 군사비가 항구적으로 확보된 것이다. 생산 40석에 대한 조세 16석 중에 8석이 군사비인 셈이다. 그러면 농민이 생산한 1만 석 중에서 4천 석이 조세이고 그 중 2천 석이 군사비란 말이다. 요새 식으로 말하면 GDP의 20%가 군사비이다. 이 정도 비율이면 경제와 군사가 충분히 나란히 발전할 수 있다. 이 중에 먹는 것은 이순신 장군의 장계에 의하면 일인당 하루 1000g(2차대전 직전 조선인의 하루 식량 소비는 일인당 756g, 1984년 북한 주민의 하루 식량 소비는 800g, 1996년 북한 주민의 하루 식량 소비는 540g-木村光彦-), 1년에 365kg이면 되었으니까, 250 × 365 = 91,250 곧 9만1천250kg이다. 1석은 160kg이니까, 총 570석이다. 군사용 2천 석 중에 570석은 식량이고(29%), 나머지는 각종 무기와 의복, 말[馬]과 배[船] 등에 쓰인 비용이다. 

 

 한국의 2009년 군사비는 28조5천억 원인데, 이 중에서 식비는 미미하다. 하루 급식비가 5,210원에서 5,399원으로 인상되었으니까, 군인을 70만으로 잡으면 1년에 식비는 1조3천8백억 원밖에 안 된다. 군사비의 5%다. 현대의 군대는 그만큼 무기와 장비가 상대적으로 고가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옛날 역시 군사비의 70%는 기본적으로 무기에 쓰였다. 이순신 장군이 지휘한 수군은 전함과 화포가 기본 장비였기 때문에 육군에 비하여 식량에 대한 무기의 비중이 월등히 클 수밖에 없었다. 모든 걸 스스로 조달해야 했던 이순신 장군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반제법에 의하여 수호대명이란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들 하나하나가 사실상 독립국가를 만든 것이다. 자신의 영지요 군대요 백성이기 때문에, 최대한 효율적으로 유지하고 관리하면서 다른 영지를 침략하여 더 키울 야망이 생기게 되었다. 군사에 재능 있는 자, 장사에 소질이 있는 자, 무기 만드는 데 재주가 있는 자, 각 영주는 이들을 최대한 우대하고 무럭무럭 키웠다. 농업이 근간이었으니까, 농토와 농민을 지키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난공불락의 성을 쌓고 군사훈련을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고, 농업생산을 높이기 위해 관개시설을 갖추고, 농토를 넓히기 위해 개간을 하는 등, 일본 전체로 보면 군사뿐만 아니라 경제도 해마다 발달했다. 특히 군대는 수십 년 간 함께 생활하면서 피나는 훈련과 생사를 넘나드는 실전을 통해 주군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기 때문에, 가공스러운 군사집단으로 거듭났다. 천하무적 스파르타의 군대와 비슷했다.

 

 조선은 어떤가. 너도나도 군대 빠지는 것이 대유행이었다. 조선 초와는 달리 양반은 군대에 다 빠졌다. 양반 유무는 군 복무 여부로 결정되었다. 돈 몇 푼 내면 되었다. 그나마 힘센 자들은 돈도 안 냈다. 더군다나 장수는 조정의 명령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다. 무기도 제대로 없었고 먹을 것도 제대로 없었다. 군인도 규정대로 갖춘 곳은 이순신 장군의 전라좌수영이 유일무이했다. 이런 형편이니, 제대로 훈련 한 번 할 수 없었다. 거의 날마다 실전을 치른 왜군에 비해 조선은 두만강 유역의 일부 군인 외에는 실전 경험이 전혀 없었다.  

 

 이런 상태로 조선이 일본의 상대가 되었을까. 더군다나 왜적은 다 쓰러져 가는 자가 안 보이는 곳에 편안히 엎드려 50미터 밖에서 빙그레 웃으며 천하의 상산 조자룡도 한 방으로 즉사시킬 수 있는 조총까지 들고 왔다. 너도나도 왜군만 나타나면 혼비백산 늙으신 부모님을 모시고 철부지 자식을 들쳐업고 소 고삐를 쥐고 신바람 난 강아지를 앞세우고 무턱대고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충이 조선의 효를 무인지경으로 유린한 것이다.
 
 사족을 하나 달면, 협판안치는 원래 수군의 맹장이었는데, 후에 풍신수길의 명을 받고 기세등등 폭풍처럼 연합 함대를 이끌고 이순신 장군에게 힘을 다하고 꾀를 다하고 용기를 다하여 덤비다가 한산도 앞 바다에서 귀신에 홀린 듯 처참하게 패하여 배 밖에 나왔던 간과 쓸개를 냉큼 바다에 내던지고 간신히 목숨만 보존하여 천 리 만 리 달아났다.

 

 안타깝게도 조선의 충 없는 효 사상이 오늘에 되살아났다. 붓이 칼을 능멸하는 유습이 되살아났다. 세종(재위 1419~1450) 문종(재위 1451~1452) 이래 무려 500년 만에 동족상잔과  월남전을 통해 피와 땀으로써 세계적 강군을 양성하여 드디어 文武가 조화를 이루는가 했더니, 민주의 '民'자도 모르는 자들이 잇달아 국가 최고 지도자가 되더니, 민주(삼강오륜과 마찬가지의 명분)를 앞세워 세계적으로 빛나는 대한민국 현대사 60년을 통째로 부정하고 역대 군인 지도자는 모조리 역적으로 만들고 말만 번드레한 무능한 자들에 둘러싸여 뒤로는 몰래 자식이나 형제를 소통령이나 소황제나 대군(大君)으로 임명하여 호가호위(狐假虎威) 뒷돈을 챙기다가 발각되고도 서로가 서로를 욕하는 척 봐 주며, 동족 학살이 전공이요 동족 학대가 副전공인 부자(父子)가 어여뻐할 일만 골라서 한다. 대한민국의 국군을, 대역죄와 인권유린과 부정부패가 들끓는 집단으로 매도하고, 야금야금 무조건 평화주의와 절대 평등의식으로 거듭난 오합지졸로 만든다.  
     (2009. 2. 21.)      

[ 2009-02-21, 20:5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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