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아들, 종 그리고 상전
선조에게 원균은 아들, 이순신은 종, 되놈은 사기꾼도 상전이었다.

최성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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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균의 무의식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말이 선조실록에 전한다.

  ...
   김수가 아뢰기를,
 “ 서성이 술을 차려 잔치를 베풀고서 두 사람이 화해(和解)하도록 했는데, 원균이 이순신에게 말하기를 ‘너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다.’【다섯 아들이란 권준(權俊), 배흥립(裵興立), 김득광(金得光) 등을 말한다. 】하였으니, 그의 분해 하고 불평함을 알 수 있습니다.”

 수(目+卒) 曰: “ 徐성( +省) 置酒開宴, 使二人和解, 則 元均 謂 舜臣 曰: ‘汝有五子’【五子指 權俊 、 裵興立 、 金得光 等也。】云。 其忿?不平可知。”
   ...  (선조실록 1597/1/27)

 


 권준, 배흥립, 김득광 등은 이순신 장군의 휘하 장수다. 원균은 이처럼 이순신 장군과 이들의 관계를 부자지간으로 파악한다. 서성은 선조의 딸 정신옹주의 시아버지니까, 선조의 사돈인데 1594년 순무어사(巡撫御史)로 한산도로 감찰하러 온 적이 있다. 그 때 술자리에서 원균이 술 힘을 빌어 미친 소처럼 발광하자, 서성이 눈살을 찌푸린다. 그 다음 날 서성은 직접 이순신의 군사훈련 장면을 구경한다. 나중에 이순신 장군이 그와 군사기밀도 밤늦도록 논의했다니까, 그가 크게 감동을 받았던 모양이다. 서성이 두 사람을 화해시켰다는 것은 1596년쯤일 것 같다.


 

 맑음. 순무어사 서성이 내 배에 와서 이야기했다. 우수사(이억기), 경상수사(원균), 충청수사(구사직)가 함께 왔다. 술이 세 순배 돌자 경상수사 원균은 짐짓 술 취한 척하고 미친 듯이 날뛰며 입에 나오는 대로 지껄이니, 순무어사도 여간 황당해 하지 않았다. 소행이 극히 흉악하였다. 삼가현감이 돌아갔다. (난중일기 1594/4/12)  
 晴 巡撫徐성來話于我船 右水使及慶尙水使 忠淸水使幷到 酒三行 元水使 陽醉發狂亂發無理之言 巡撫不勝怪怪 所向極凶 三嘉歸

 


 원균은 무의식중에 '죽느냐 사느냐, 유능한가 무능한가, 덕이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문제인 국가의 중대사를 한갓 '좋아하느냐 미워하느냐' 그것만이 대수인 가정의 사랑싸움으로  확신하고 있다. 이건 원균만이 아니라 적이 쳐들어온다는 소문만 듣고 자신과 제 식구만 살려고 천 리 만 리 도망가는 임금 이하 90% 조선 사대부의 무의식 세계다. 자식은 잘나고 못나고 곱고 밉고 착하고 못되고 이런 것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다. 오히려 못난 자식을 더 챙기고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고 못된 놈일수록 함함하다고 한다. 아픈 손가락에 더 신경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백성의 어버이인 선조가 친인척과 아첨꾼만을 '내 가족 내 자식'으로 생각한 것도 이런 가치관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선조의 외척 중에 이순신 모함에 가장 앞장선 윤두수가 있다. 윤두수의 손자 해숭위 윤신지가 인빈 김씨의 둘째 딸 정혜옹주의 남편이다. 그런데 원균은 윤두수의 친척(선조실록 1596/11/7)이다. 따라서 원균은 선조의 아들과 마찬가지다. 그가 아무리 잘못해도 그것은 허물이 될 수 없다. 사랑하는 아들이니까! 아니, 하는 짓마다 잘못하니까 더욱 파르르 떨며 아랫것들 앞에서 역성을 들어준다. 생사여탈권을 앞세워 엿장수의 논리보다 더 엉성한 논리로 감싼다. 동네 소문이 너무 무서우면 잠시 골방에 피신시켰다가 사람들의 기억이 좀 희미해졌을 무렵에 피둥피둥 살찐 몸뚱이에 화려한 비단 옷을 입혀서 으스대며 돌아다니게 한다. 

      

 【당시 정혜옹주(貞惠翁主)가 아직 어렸는데 피난길이 어수선하고 말을 준비할 수 없었으므로, 왕이 따르는 관리들에게 명하여 자원하여 다른 길로 데리고 가서 난리를 피하게 하면 후한 상(賞)을 내릴 것이라고 하였다. 내수사(內需司) 관원 윤백상(尹百祥)이 전지에 응하여 길을 바꿔 황해도 산길로 들어가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 적을 피한 뒤 겨울에야 사잇길로 의주(義州)에 이르렀다. 옹주는 뒤에 해숭위(海嵩尉)에게 하가(下嫁)하였다.】
 (선조실록 1592/5/1)


 

선조가 국가대사(大事)보다 가정소사(小事)를 더 중시한 것은 다음 기록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사관은 민심을 들어 준열하게 나무라고 있다. 명나라에 천추사(황제의 后妃 생일 축하 사절)로 가기로 내정된 윤두수의 아들 윤방 집안에 경사가 났다. 며느리 정혜옹주가 출산한 것이다. 그러자 선조는 희색이 만면하여 즉시 윤방을 동지사로 바꾸어 나중에 보내기로 하고 손주도 보고 며느리의 산후 조리도 지켜보게 한다. 윤방이 사돈이라 하여 중국의 사신으로 보내기로 한 것도 웃기는데, 선조는 그 사돈이 손주 곧 선조 자신의 외손을 싱글벙글 들여다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여겨 정해진 임무도 취소하고 날짜를 미루어 더 중요한 사절의 임무를 부여한다.    

  
 
이비(吏批)에게 전교하였다.
 “윤방(尹昉)을 천추사(千秋使)로 차정했는데 옹주(翁主)가 해탈(解脫=解産)한 뒤에 병이 있으니, 우선 천추사를 체차하고 동지사(冬至使)로 차임하여 보내도록 하라.”【 윤방은 곧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의 아비이다. 이때 왜적의 사자가 협박하므로 조석으로 변을 대기하고 있는데, 마침 이런 명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불쾌하게 여겼다. 】
 (선조실록 1604/3/12)

 


 윤두수의 손자이자 선조의 사위 윤신지는 임금의 총애만 믿고 정유재란 당시 왜적이 천 리밖에 있을 때부터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기다리다가 왜적이 상경한다는 소문을 듣고 얼씨구나 피난길에 오르는데, 처남인 왕자 정원군(定遠君: 인조의 아버지)과 더불어 백성들을 상대로 세도와 행패를 부리다가 사헌부로부터 쓴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이에 대해 선조는 종들이 한 일을 어찌 주인이 다 알 수 있겠냐며 아들과 사위를 적극 두둔한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변란 뒤에 더욱 두려운 것은 민심(民心)입니다. 민심을 한번 잃어버리면 도둑의 화란이 가볍지 않을 터이니, 오늘날은 오직 백성들을 위무하여 민심을 결속시키는 것으로써 급무를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정원군(定遠君) 이부(李?) 등이 후궁(後宮)을 배종(陪從)하여 서쪽으로 내려갈 적에, 그의 궁노(宮奴)를 방종하게 놔두어 지공(支供)이 풍부하지 못하다면서 향소(鄕所)를 마구 구타하고 기명(器皿)을 부수었습니다. 또 족속(族屬) 및 아는 사람들을 많이 거느리고 궁노라고 칭탁하여 더욱 공궤(供饋)를 요구하였으며, 불법으로 쇄마(刷馬)를 차지하여 타거나 짐을 싣도록 함으로써 처음 마전(麻田)에 이르렀을 때에는 쇄마 수가 30필에 불과하던 것이 매읍(每邑)마다 더 색출한 까닭에 수안(遂安)에 이르러서는 거의 2백 필에 이르렀으므로 연로(沿路)의 백성들이 분주하게 음식을 제공하고 쇄마를 징발하느라 원망하는 소리가 자자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성천(成川)에 이르러서는 끝없이 폐단을 저질러 온갖 물품을 마련하도록 요구하였는데 그 수에 있어서 한이 없어서 조금이라도 여의치 않으면 궁노가 바로 왕자(王子)에게 하소연하고 그러면 왕자는 금지시켜 단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대로 따라서 그들이 멋대로 구는 것을 조장함으로써 온 부(府)의 민심으로 하여금 이미 흩어지게 하였습니다. 본부(本府)에 머무른 지 날짜가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그 폐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장래의 걱정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지난해 북도(北道)의 변이 본보기가 되고도 남을 텐데 오히려 경계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 삼도(三道)가 모조리 어육(魚肉)이 되어버린 판에 서로(西路)만이 그런 대로 믿을 만한데, 왕자가 또 그곳을 무너뜨리고 있으니 참으로 지극히 한심스럽습니다. 정원군 부와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를 모두 파직시키소서. 그리고 검찰사(檢察使) 신잡(申?)과 수행한 재신(宰臣) 구사맹(具思孟) 과 허잠(許潛)은 폐단을 끼치는 일을 좌시하고 단속하지 않아 도무지 위임하여 보낸 의의를 망각하였으니, 모두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헌부(憲府)와 간원(諫院)에 답하기를,
 “이 일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폐단을 저지른 하인이 없지는 않겠지만 주인이라고 해서 꼭 그것을 다 안다고 할 수 없는데 어찌 이토록까지 해야 하겠는가. 그리고 또 재신이 어찌 금지시키지 않았을 리가 있겠는가. 성천(成川) 사람이 전미(田米) 7홉을 내줘 장차 굶주리게 되었다고 하는 달갑지 못한 소문을 듣고도 내가 차마 말하지 않았다마는 이 일은 잘못 들은 말이 아닌가 싶다. 지금은 우선 추고하거나 파직시킬 필요가 없다. 재신에게 글을 내려보내 각별히 단속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나머지는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1597/9/22)

 


 선조는 왕가인 전주 이씨로 봐선 어떤 왕보다 훌륭한 일을 했다. 국초(國初)부터 이씨 왕가의 가장 큰 문제였던 종계변무(宗系辨誣)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명나라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大明會典)>> 에는 어찌된 셈인지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었다. 제발 고쳐 달라고 애원했지만, 거룩한 태조 주원장과 관련된 기록은 절대 고칠 수 없다며 애를 태웠다. 이 문제를 선조대에 해결한 것이다. 1588년에 유홍이 마침내 고쳐진 <<대명회전>>을 갖고 온다. 난리도 이런 난리도 없다. 약 400년 후 35년간 일제의 질곡에서 해방된 날처럼 기뻐한다. 눈물의 바다! 선조는 친히 모화관(慕華館)으로 가서, 명의 칙사를 맞이한다. 2년 후 종계개정에 공을 세운 이들은 나라를 빛낸 인물 곧 광국공신(光國功臣)이라 하여 크게 표창 받아 왕족 대우를 받는다. 광국1등공신은 3명인데, 여기에 첫 번째로 윤두수의 동생 윤근수의 이름이 올라간다. 글을 썩 잘한 윤근수가 종계변무의 외교문서를 쓴 듯하다. 나머지 두 1등 공신 황정욱과 유홍은 직접 명에 주청사(奏請使)로 다녀왔다. 윤두수는 광국2등공신이다. 가문의 영광!   


 광국공신(光國功臣)과 평난공신(平難功臣)의 녹권(錄卷)을 반사하고 고유제(告由祭)와 회맹(會盟)을 의례대로 한 뒤 물품을 등급별로 하사하고 나라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백관이 진하(進賀)하니 궐정(闕庭)에서 사연(賜宴)하였다.
 

 광국공신은 종계(宗系)를 변무(辨誣)한 공인데, 1등 수충 공성 익모 수기 광국 공신(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은 윤근수(尹根壽) 【이상(貳相: 左右贊成)을 지냈고 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이다.】· 황정욱(黃廷彧) 【예조 판서를 지냈고 장계 부원군(長溪府院君)이다.】· 유홍(兪泓) 【우의정을 지냈고 기계 부원군(杞溪府院君)이다.】 등 3인이고,
2등 수충 공성 익모 광국 공신은 홍성민(洪聖民) 【이조 판서를 지냈고 익성군(益城君)이다.】· 이후백(李後白) 【이조 판서를 지냈고 연양군(延陽君)으로 추봉(追封)되었다.】· 윤두수(尹斗壽) 【영의정을 지냈고 해원 부원군(海原府院君)이다.】· 한응인(韓應寅) 【좌의정을 지냈고 청평 부원군(淸平府院君)이다.】· 윤섬(尹暹) 【교리를 지냈고 용성군(龍城君)으로 추봉되었다.】· 윤형(尹泂) 【공조 판서를 지냈고 무릉 부원군(茂陵府院君)이다.】· 홍순언(洪純彦) 【 당릉군(唐陵君)으로 역관(譯官)이다.】 등 7인이고,
3등 수충 공성 광국 공신(輸忠貢誠光國功臣)은 기대승(奇大升) 【대사간을 지냈으며 덕원군(德原君)으로 추봉되었다.】· 김주(金澍) 【 화산군(花山君)으로 추봉되었다.】· 이양원(李陽元) 【우의정을 지냈고 한산 부원군(漢山府院君)이다.】· 황임(黃琳) 【호조 판서를 지냈으며 의성군(義城君)이다.】· 윤탁연(尹卓然) 【순찰사를 지냈고 칠계군(漆溪君) 이다.】· 정철(鄭徹) 【좌의정을 지냈고 인성 부원군(寅城府院君)이다.】· 이산해(李山海) 【영의정을 지냈고 아성 부원군(鵝城府院君)이다.】· 유성룡(柳成龍) 【영의정을 지냈고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이다.】· 최황(崔滉) 【이상을 지냈으며 해성군(海城君)이다.】 등 9인으로 19인이다. 전후 사신으로 가서 허락을 받아냈거나 의논을 드리고 주문(奏文)을 지은 공이 뛰어난 사람들이다.
 

 평난공신(平難功臣)은 토역(討逆)한 공인데, 1등 추충 분의 병기 협책 평난 공신(推忠奮義炳幾?策平難功臣)은 박충간(朴忠侃) 【 상상군(商山君)으로 형조 판서를 지냈다.】· 이축(李軸) 【좌참찬을 지냈고 완산 부원군(完山府院君)이다.】· 한응인(韓應寅) 등 3인이고, 2등 추충 분의 협책 평난 공신은 민인백(閔仁伯) 【 여양군(驪壤君)이다.】· 한준(韓準) 【호조 판서를 지냈으며 청천군(淸川君)이다.】· 이수(李綏) 【 남계군(南溪君)이다.】· 조구(趙球) 【 전릉군(全陵君)으로 추봉되었다.】· 남절(南截) 【 남계군(南溪君)이다.】· 김귀영(金貴榮) 【좌의정을 지냈고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이다.】· 유전(柳?) 【영의정을 지냈고 시령 부원군(始寧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유홍(兪泓) · 정철(鄭徹) · 이산해(李山海) · 홍성민(洪聖民) · 이준(李準) 【형조 판서를 지냈고 전성군(全城君) 이다.】 등 12인이고,
3등 추충 분의 평난 공신(推忠奮義平難功臣)은 이헌국(李憲國) 【우의정을 지냈고 완성 부원군(完城府院君)이다.】· 최황(崔滉) · 김명원(金命元) 【좌의정을 지냈으며 경림 부원군(慶林府院君)이다.】· 이증(李增) 【 아천군(鵝川君)이다.】· 이항복(李恒福) 【영의정을 지냈고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이다.】· 강신(姜紳) 【 진흥군(晋興君)이다.】· 이정립(李廷立) 【 광림군(廣林君)으로 병조 참판을 지냈다.】 등 7인으로 모두 22인이다. 박충간 이하는 고변(告變)을 했고 민인백 이하는 역도의 괴수를 잡았고 김귀영 이하는 추관(推官)으로서 죄인의 복초를 가장 많이 받아냈기 때문이다.【혹자가 추관을 녹훈한 것에 대해서 지나치다고 하니 상이, 역적이 진신(縉紳) 가운데서 나왔는데 다행히 제때에 주벌했다고 여겨 추관에게 공을 돌렸다.】
(선조수정실록 1590/8/1)
 

 

 평난공신은 1589년 정여립의 난을 진압한 공신이다. 다소 긴 이 기사를 인용한 것은 이들이 바로 이를 계기로 준(準) 왕족이 되었기 때문이다. 부원군은 왕의 외척, 군(君)은 왕의 아들 중 후궁의 아들을 이르는 말인데, 이들 공신들은 하나같이 부원군 또는 군(君)이 된다. 이 중에는 유능하고 덕망 높은 충신도 있었지만, 입만 꾀꼬리처럼 앵무새처럼 발달한 형편없는 인간이 더 많다. 명나라의 종계 기록 실수나 정여립의 난에 비하면 수억 배 중요하고 수천만 배 위태로운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이들 새로운 왕족들은 요직만 차지하고 앉아 왜적의 머리 하나라도 베는 데 기여하기는커녕 미증유의 전란으로 인구의 3분의 1과 경지면적의 5분의 4를 잃어 버리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 주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자들이 대부분이다. 선조는 아무리 이들이 나라 말아 먹는 실정을 거듭해도 벌줄 줄 모른다. 벌을 준다고 해도 사람들의 입이 무서워 실은 일시적으로 쉬게 만든다. 당파와도 관계없다. 정여립처럼 역신으로 몰리지 않는 한, 용서 또 용서요, 중용(重用) 또 중용이다. 

 

 시문에는 능했으나, 이들은 한두 사람을 빼고는 군사에는 문외한의 문외한이었다. 그럼에도 전쟁 기간 내내 요직을 독차지한다. 오늘날로 말하면, 일등병의 경험도 안목도 없는 자들이 별을 주렁주렁 달고 현장 최고 사령관에게 역시 전쟁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임금의 뜻을 받들어 구름 잡는 명령을 내린 격이었다.     

 

 선조나 이들 공신들에게는 국가는 없고 전주 이씨 가문과 자신들의 가문만 있다. 김일성과 김정일로 이어지는 만경대 김씨 왕가도 이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선 전체가 전주 이씨 왕가의 재산이었듯이 북한 전체가 만경대 김씨 왕가의 재산이다. 대한민국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초대 대통령부터 장군 출신 대통령까지는 국가관이 투철했다.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중기 이후 이씨왕조보다 훨씬 못하고 조선총독부보다 못한 김씨왕조의 거짓과 폭력에 맞서 고뇌의 단호한 결단을 내리며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꽃을 피웠다. 그러나 그 후로는 네 명의 현대판 왕이 출현했다. 누구든 민주니 통일이니 민족이니 환경이니 평등이니, 아름다운 말을 입에 가득 품고 새로운 왕 또는 새로운 왕의 후보에게 접근하여 '지당하옵니다!'만 외치고, 머리에 붉은 띠를 묶고 왕이나 왕의 후보가 위기에 처했을 때 혀와 팔과 다리의 근육을 폭발적으로 사용하면 광국공신이 되고 평난공신이 된다. 왕의 사돈이 되고 왕의 아들이 된다. 그리하여 이들은 민주 국가에는 치명적 독(毒)인 치외법권의 특전을 누린다. 

 

 임진왜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선조와 얼마나 가까운 거리에서 찔찔, 훌쩍훌쩍 또는 펑펑 울었느냐에 따라, 눈물만이 아니라 콧물도 얼마나 줄줄 많이 흘렸느냐에 따라, 공신의 서열이 정해졌다. 왜적 한 명 물리치는 데 아무런 공이 없어도 관계없다. 하여간 도망 안 가고 왕의 곁에 맴돌기만 하면 되었다. 왕의 심신을 편안히 해 주면 되었다. 공신의 서열은 당연히 왜적을 많이 물리친 정도에 따라야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삼국통일 과정에서 50년 간 단 한 번도 패전하지 않은 김유신의 공이 너무 커서 임금 아래 최고직인 각간에 봉하고 그것도 모자라 대각간에 봉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태대각간으로 봉하여 사실상 왕과 같은 반열에 올라서게 만들고 죽어서는 흥무대왕으로 추존한 것과는 너무도 다르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김유신은 왕이 될 수도 있었지만, 절대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고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문무왕 김법민은 김유신을 끝까지 믿고 공훈을 새로 만들어 계속 올려 주었다. 그래서 김유신은 죽음에 임하여, "왕께서 믿어 주심에..."라는 말을 남겼다. 이것이 바로 군신유의(君臣有義)다.

 

 전쟁에 도움을 주기보다 방해만 한 문관들이 최고 공신 자리를 독차지했다. 임금 곁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내시 24명과 말고삐 잡은 자들(理馬: 정6품 잡직) 6명이 이순신 장군 휘하의 기라성 같은 장수들이나 유격전으로 왜적을 왕짜증나게 만들었던 의병들을 다 제치고 우르르 호성공신에 올랐다. 실지로 이씨왕가를 300년 더 이어지게 만든 일선 장수와 장병들은 철저히 소외되고, 단지 곁에서 왕과 함께 우왕좌왕하며 잔심부름하고 질질 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신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이들은 선조의 아들이고 일선에서 승전한 이순신 장군 이하 군인들은 선조의 일개 종이요 가축이었기 때문이다. 칼 들고 화살 메고 싸운 선무공신은 1등, 2등, 3등 다 합해도 전쟁 내내 임금 곁에서 적의 칼이나 총에 죽을 염려가 전혀 없이 호의호식하다가 호성공신이 된 내시 24명보다 적은 18명밖에 안 되었다. 무인(武人)은 주인을 먹여 살리기 위해 천한 일을 도맡아함이 마땅한 종이었기 때문이다. 힘만 센 천하고 무식한 종이었기 때문이다. 이들 중에서 18명을 등급은 낮지만 공신에 봉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했던 것이다.

 

 단, 원균은 선조의 종이 아니라 선조의 아들이었다. 따라서 그는 사실상 두 번의 큰 패전으로 정여립의 수백 배되는 대역죄를 저질렀지만, 임금의 엄명에 의해 선무1등공신의 반열에 올랐던 것이다. 방화로 경찰을 죽인 자들과 공산독재의 치하에 자유대한을 은근슬쩍 넘기려던 국가 반역자들이 권력의 힘에 빌붙어 해괴망측한 논리에 의해 민주인사로 둔갑한 것과 비슷하다.  

 

 호종(扈從) 곧 피난 중에 왕을 얼마나 졸졸 잘 따라다녔느냐, 그것이 제일이었다. 이를 호성(扈聖)공신이라 한다. 호성1등공신은 이항복과 정곤수 2명이다. 이항복은 이해가 가지만 정곤수는 누굴까? 그는 명나라에 가서 군사를 불러오는 역할을 담당했다. 원균이 이순신에게 원군을 청했으므로 공이 이순신보다 크다는 견강부회(牽强附會) 논리를 여기에서 엿볼 수 있다. 임란 내내 영의정으로 군계일학의 능력을 발휘한 유성룡은 오히려 호성2등공신이다.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느라고 이항복보다 피난 가는 임금 곁을 떠난 적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호성2등공신은 왕자 신성군과 정원군을 비롯하여 31명이다. 여기에 당당히 윤두수와 윤근수 형제는 이름을 올린다. 또 다시 가문의 영광! 이씨 왕가의 명예를 회복한 광국공신에 이어 임진왜란에 2등으로 공을 많이 세운 호성공신까지 되었으니, 마침내 왕의 외척까지 되었으니, 이들의 친척인 원균은 다시 한 번 선조의 아들로서 자리를 굳건히 지킨 것이다. 거기에 섭섭지 않게 한산도에서 서울까지 이어지도록 선물을 바리바리 실어 올려보냈으니, 인사정책에 세 정승 이상으로 막강한 힘을 휘두른 베개머리 청탁이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으랴!

 

 진주대첩의 김시민, 전라좌수영보다 더 많은 전함과 군인을 제공하여 이순신 장군의 싸우면 반드시 일방적으로 이기는 승첩에 혁혁한 공을 세운 전라우수사 이억기를 2등으로 밀어내고 원균은 선조의 노골적 두둔과 은밀한 비망기에 의해 이순신, 권율과 더불어 선무1등공신의 반열에 올라섰다. 바로 옆의 경상좌수영을 돕기는커녕 싸움 한 번 않고 전라좌수영의 2.5배되는 전함과 1만 명 수군을 스스로 침몰시키고 스스로 해산시킨 후 화살 한 개 없이 노 젓는 사람만 데리고 꽁꽁 숨어 있다가 전함 한 척만 끌고 졸졸 따라다닌 자가 이순신 장군이 6년간 피와 땀, 눈물과 한숨으로 일궈 놓은 전함 1백여 척과 2만 명 수군을 단 한 번의 전투에서 몽땅 수장시킨 자가 선무1등공신의 반열에 올라섰다. 원균보다 직급이 높았지만 도망갔기 때문에 바로 처형된 경상좌병사 이각처럼 원균도 임진년에 바로 처형하여 광화문 네거리에 효수함이 마땅했지만, 그는 사실상 임금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모든 죄를 사함 받고 도리어 선무1등공신으로 가문의 족보를 밤하늘의 1등별처럼 빛냈다.      

 


 공신(功臣)들의 명칭을 정하여 대대적으로 봉(封)했는데, 서울에서 의주까지 시종(始終) 거가(車駕)를 따른 사람들을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하여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이 있게 명칭을 내렸고, 왜적을 친 제장(諸將)과 군사와 양곡을 주청(奏請)한 사신(使臣)들은 선무 공신(宣武功臣)으로 하여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이 있게 명칭을 내렸고, 이몽학(李夢鶴)을 토벌하여 평정한 사람은 청난공신(淸難功臣)으로 하고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 있게 명칭을 내렸다. 
 
호성공신 1등은 이항복(李恒福) · 정곤수(鄭?壽)인데 충근정량갈성효절협력호성 공신(忠勤貞亮竭誠效節協力扈聖功臣)이라 하고, 2등은 신성군(信城君) 이후(李珝) · 정원군(定遠君) 이부(李?)· 이원익(李元翼) · 윤두수(尹斗壽) · 심우승(沈友勝) · 이호민(李好閔) · 윤근수(尹根壽) · 유성룡(柳成龍) · 김응남(金應南) · 이산보(李山甫) · 유근(柳根) · 이충원(李忠元) · 홍진(洪進) · 이곽(李?) · 유영경(柳永慶) · 이유징(李幼澄) · 박동량(朴東亮) · 심대(沈岱) · 박숭원(朴崇元) · 정희번(鄭姬藩) · 이광정(李光庭) · 최흥원(崔興源) · 심충겸(沈忠謙) · 윤자신(尹自新) · 한연(韓淵) · 해풍군(海豊君) 이기(李耆) · 순의군(順義君) 이경온(李景溫) · 순령군(順寧君) 이경검(李景儉) · 신잡(申?) · 안황(安滉) · 구성(具宬) 인데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 공신(忠勤貞亮?節協策扈聖功臣)이라 하고, 3등은 정탁(鄭琢) · 이헌국(李憲國) · 유희림(柳希霖) · 이유중(李有中) · 임발영(任發英) · 기효복(奇孝福) · 최응숙(崔應淑) · 최빈(崔賓) · 오정방(吳定邦) · 이응순(李應順) · 신수곤(愼壽崑) · 송강(宋康) · 고희(高曦) · 강곤(姜?) ·내시(內侍) 김기문(金起文) ·내시 최언준(崔彦俊) ·내시 민희건(閔希蹇) ·의관(醫官) 허준(許浚) · 이연록(李延祿) ·이마(理馬) 김응수(金應壽) ·이마 오치운(吳致雲) ·내시 김봉(金鳳) ·내시 김양보(金良輔) ·내시 안언봉(安彦鳳) ·내시 박충경(朴忠敬) ·내시 임우(林祐) ·내시 김응창(金應昌) ·내시 정한기(鄭漢璣) ·내시 박춘성(朴春成) ·내시 김예정(金禮楨) ·내시 김수원(金秀源) ·내시 신응서(申應瑞) ·내시 신대용(辛大容) ·내시 김새신(金璽信) ·내시 조구수(趙龜壽) ·의관(醫官) 이공기(李公沂) ·내시 양자검(梁子儉) ·내시 백응범(白應範) ·내시 최윤영(崔潤榮) ·내시 김준영(金俊榮) ·내시 정대길(鄭大吉) ·내시 김계한(金繼韓) ·내시 박몽주(朴夢周) · 이사공(李士恭) · 유조생(柳肇生) · 양순민(楊舜民) · 경종지(慶宗智) ·내수사 별좌(內需司別坐) 최세준(崔世俊) ·사알(司謁) 홍택(洪澤) ·이마 전용(全龍) ·이마 이춘국(李春國) ·이마 오연(吳連) ·이마 이희령(李希齡) 인데 충근정량호성 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이라 하여, 각각 작위(爵位)를 내리고 군(君)으로 봉했다. 모두 86인인데 내시(內侍)가 24명, 이마(理馬)가 6명, 의관이 2명이고, 별좌(別坐)와 사알(司謁)이 또 2명이다.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은 이순신(李舜臣) · 권율(權慄) · 원균(元均) 세 대장인데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 공신(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이라 하고,
2등은 신점(申點) · 권응수(權應銖) · 김시민(金時敏) · 이정암(李廷?) · 이억기(李億祺) 인데 효충장의협력선무 공신(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이라 하고,
3등은 정기원(鄭期遠) · 권협(權?) · 유사원(柳思瑗) · 고언백(高彦伯) · 이광악(李光岳) · 조경(趙儆) · 권준(權俊) · 이순신(李純信) · 기효근(奇孝謹) · 이운룡(李雲龍)인데 효충장의선무 공신(效忠仗義宣武功臣)이라 하였다. 각각 관작을 내리고 군(君)으로 봉했는데 모두 18인이다.
 
청난공신(淸難功臣) 1등은 홍가신(洪可臣)인데 분충출기합모적의청난 공신(奮忠出氣合謀迪毅淸難功臣)이라 하고, 2등은 박명현(朴名賢) · 최호(崔湖)인데 분충출기적의청난 공신(奮忠出氣迪毅淸難功臣)이라 하고, 3등은 신경행(辛景行) · 임득의(林得義)인데 분충출기청난 공신(奮忠出氣淸難功臣)이라 하였다. 각각 관작을 내리고 군으로 봉했는데 모두 5인이다.
 
 사신은 논한다. 국가가 임진년의 왜변을 만나 종사(宗社)가 전복되고 승여(乘輿)가 파천했으며 원릉(園陵)이 화를 입었고 생령들이 해독을 받았으니, 말하기에도 참혹한 일이다. 다행히 황은(皇恩)이 멀리 미침을 힘입어 팔도(八道)가 다시 새로워졌으니, 임금의 도리에 있어 논공 행상(論功行賞)하여 공로에 보답하는 특전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호종신(扈從臣)을 80여 명이나 녹훈(錄勳)하였고 그 가운데 중관(中官)이 24명이며 미천한 복례(僕隷: 종 또는 노복)들이 또 20여 명이나 되었으니, 또한 외람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이르러서는 주군(州郡)에서 불러 모은 도적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그것을 토평한 것이 어찌 공이 될 수 있는 일이겠는가.
... (선조실록  1604/6/25)


 

 이순신 장군은 선조에게 어떤 신분이었을까. 신하도 아닌 종이었다. 신하는 왕에 대한 상대 개념(君臣)이고, 종은 주인에 대한 상대 개념(主從)이다. 국가 개념이 정립 안 된 선조는 신하가 없었다. 친인척(공신 포함) 아니면 이씨 왕가를 섬길 종만 있었다. 그러나 부들부들 떨면서 중국이 빤히  바라다 보이는 의주까지 도망갈 때는 선조도 약간 철이 들어 나라를 구할 충신을 간절히 바랐다. 오매부망 왜군을 물리칠 장군에 대한 희소식을 기다렸다. 몇 십 명 죽인 소소한 전투  말고 수천 명 죽이고 수백 척의 적선(敵船)을 수장시켜 전쟁의 물줄기를 바꾼 승첩이 마침내 도착했다. 천만 뜻밖에도 섬나라 사람들이 장기로 하는 바다에서 승첩이 왔다. 너무도 꿈만 같아 임금과 신하들이 다들 끌어안고 몇 달 만에 처음으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바로 임금은 상을 내렸다. 그러다가 드디어 명나라의 군대가 왔다. 그러나 고작 3천 명을 끌고 와서 조승훈은 큰소리 뻥뻥 날리다가 평양성에서 왜군에게 참패했다. 말하기도 부끄러운 패전 후 조승훈은 조선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웠다.
--2만 명이 넘는 왜군을 왜 2천 명밖에 안 된다고 했느냐!
 그 말도 일리가 있었으니, 조선은 한 해가 다 가도록 왜적의 숫자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래저래 더욱더 이순신 장군이 돋보였다. 한산대첩은 왜군이 평양 이북으로 올라가지 못하게 만든 왕쐐기였다. 조승훈이 패할 때까지만 해도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종이 아닌 충신으로 대접했다. 

 

 마침내 이여송이 약 4만 명의 대군을 몰고 와서 바닷길이 막혀 굶주림에 시달리던 왜군을 평양성에 쫓아냈다.   
 이 때부터 선조의 태도가 급격히 달라진다. 이순신은 종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이여송은 하늘보다 높은 상전으로 우러러 본다. 이여송만이 아니다. 명의 관리는 아무리 지위가 낮아도, 심유경 같은 국제 사기꾼도 선조가 버선발로 쫓아가 큰절을 올려야 할 상전이다. 종은 공을 세우는 것이 당연하고 공이 너무 높으면 도리어 껄끄럽다. 공이 크면 일찌감치 밟아야 한다. 상전은 아무리 우대해도 지나침이 없고 종은 아무리 하대해도 모자람이 있다. 대신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아들은 못날수록 내리사랑을 단비처럼 쏟아 부을 대상이다. 선조가 명나라 사람은 지위의 높낮이에 관계없이 그토록 비굴하게 받들어 모신 것은 심리적으로 전쟁의 모든 공을 자신이 차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대인들을 성심성의로 섬김으로 그들이 가슴 뭉클 감동 먹어 우리나라를 구했도다.  
--이순신이 공을 세워? 명나라 장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그까짓 것 아무나 할 수 있다구. 원균한테 맡겨 봐. 못할 줄 알아? 더 잘해! 두고보라구, 이 바보들아! 우리나라 수군은 원래 강해!


 하늘에서 내려온 군대가 대번에 섬나라 오랑캐를 몰아낼 줄로 알았는데, 벽제관에서 대패한 후 다시는 싸움에 나서려 들지 않았다. 이 때부터 선조는 뭔가 찜찜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실수라고 생각하고 명나라 관리나 장수만 만나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굴하게 군다. 한 나라 왕이란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조폭도 이 정도로 비굴하진 않다. 그러면서 홀로 조선 전체 군사의 3분의 2를 양성한 이순신 장군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임을 끝내 모르고, 아니! 절대 인정하지 않고 이순신 장군을 감히 주인의 명에 대드는 건방진 종 취급한다. 임진왜란을 사실상 종식시킨 기적의 기적 명량대첩 후에도 선조는 이순신 장군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않고, 종 이순신에게 다른 사람에겐 다 내려도 상도 내리지 않는다. 종으로서 당연히 할 '사소한 일'을 했을 따름이다. 도리어 명나라 장수가 자기 공은 아무 것도 없다며 민망해 하면서 이순신에게 상을 내린다. 


 

...
상이 말하기를,
 “흉적이 조금 물러가고 종묘 사직이 다시 돌아왔으니 이는 참으로 대인의 공덕이라 감사함을 무엇으로 말하겠습니까. 절을 하여 사례하겠습니다.”
 하니, 양 경리(양호: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최고위직)가 말하기를,
 “이게 무슨 말씀이오. 제가 무슨 공이 있습니까. 이러한 예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고, 상이 굳이 청해도 따르지 않았다. 상이 말하기를,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은 바로 그의 직분에 마땅한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인이 은단(銀段)으로 상주고 표창하여 가상히 여기시니 과인은 마음이 불안합니다.”
 하니, 경리가 말하기를,
 “이순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다 흩어진 뒤에 전선(戰船)을 수습하여 패배한 후에 큰 공을 세웠으니 매우 가상합니다. 그 때문에 약간의 은단을 베풀어서 나의 기뻐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자, 상이 말하기를,
 “대인에 있어서는 그렇지만 과인에 있어서는 참으로 미안합니다.”
하였다.
...
上曰: “兇賊少却, 廟社重還, 實是大人之功, 無以爲謝。 請作拜以謝。” 經理曰: “惡, 是何言也? 俺何功哉? 不敢當此禮。” 上强請, 不從。 上曰: “統制使 李舜臣 捕捉些少賊, 是乃渠職分內事也。 非有大功伐, 大人賞以銀段, 褒以美之, 寡人未安于中。” 經理曰: “ 李舜臣 , 好漢子也。 收拾戰船於散亡之餘, 能立大功於?敗之後, 極可嘉奬, 故略施銀段, 以示俺嘉悅之意耳。” 上曰: “在大人則然矣, 於寡人, 實有所未安也。”
...
(선조실록 1597/1/20)
 

 

 선조가 하늘같은 상전인 중국인을 얼마나 극진히 모셨는지는 다음 기사 하나만으로 족할 것이다. 원균이 경상도와 전라도를 한꺼번에 잃기 한 달 전, '종 주제에 약간의 공을 세웠다고 적에 대해 군사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이행하지 않고 감히 기어오르려 한' 이순신을 백의종군 시켜놓고, 명나라의 고작 부총병에 지나지 않은 오유충에 오체투지 큰절하는 장면이다. 그 4일 후엔 이씨 왕가를 피신시키기로 결정한다. 실은 평양성 탈환 외에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명나라 군대도 믿지 못한다. 호랑이 같고 범 같은 명나라 제독 진린을 때로는 어르고 때로는 꾸짖으며 사실상 부하로 거느린 이순신 장군과 비교해 보라. 소련군 대위 김일성의 3백만 동족 학살에 뒤이어 3백만 동족을 아사시키고 4천8백만 중에서 한 천만 더 학살할 계획을 추호도 변함없는 자에게 꼬박꼬박 위원장이라 부르며, 벌벌 기며, 애국시민은 도리어 친일파 후손과 독재주구로 몰고, 노골적으로 또는 은밀히 무어든 바치지 못해 애걸복걸한 한국의 최근 대통령들과도 비교해 보라.


 

 오 부총병【 오유충(吳惟忠) 】이 왔는데, 상이 모화관(慕華館)에 행행하여 맞아 위로하였다. 사시(巳時) 정각에 동가(動駕)하자 왕세자가 궐문 밖에서 지송(祗送)하고 다시 문학(文學) 성이문(成以文)을 보내 모화관에서 문안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초혼(初昏)에 송석경(宋錫慶)이 총병에게 문안하고 와서 말하기를 ‘총병이 「오늘은 늦었으니 상께서는 환궁(還宮)하시고 입성(入城)하여 서로 뵙기를 바란다. 」 하였다.’ 하니, 이에 검열(檢閱)이지완(李志完)을 보내 ‘이미 교외(郊外)로 나왔으니 영위(迎慰)하는 뜻을 폐할 수 없다.’고 전하게 하였다. 초경(初更)에 총병이 도착하여 계단으로 들어와 막차(幕次)로 올라갔다가 잠시 후에 나오니, 상이 소차(小次)에서 나와 서로 읍하고는 배석(拜席)으로 나아갔다. 오유충이【그는 몸가짐이 참람하지 않고 군졸을 엄하게 검칙하였는데 우리나라에 온 여러 장수 중 그와 짝이 될 만한 자가 실로 없다. 】 말하기를,
 “조의(朝衣)가 상자 안에 있는데, 꺼내지 못해 청복(靑服)으로 뵙게 되어 미안합니다.”
 하였다. 상이 양배(兩拜)하기(두 번 절하기)를 청하니, 유충이 ‘명대로 하겠다.’ 하고, 자기 역시 양배하여 사은하기를 청했는데, 상이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했는데도 굳이 청하므로 상이 ‘억지로 어길 수가 없다.’ 하였다. 오유충이 또 자리를 바꾸어 절하기를 청하자, 상이 ‘그것은 결코 감당할 수 없다.’ 하고는 사배(謝拜)하였다. 상이 통사(通事)로 하여금 먼저 황은에 감격한다는 뜻을 말하게 하자, 유충이 말하기를,
 “황상께서 어찌 구해주지 않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다만 적들이 처음에 봉(封)함을 받고자 하므로 토벌하지 않았던 것인데, 끝내 천조(天朝)를 기만하고는 감히 다시 동병하였으니 이번 출사(出師)야말로 그냥 묵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유 총병(劉摠兵) 역시 1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어서 나올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유 대인(劉大人)이 또 나온다니, 황은이 더욱 망극하외다. 대인이 전에 평양 전투에서 제일 먼저 공략해 우리 나라가 거기에 힘을 입었는데, 이제 또 재차 나오니 우리 백성들이 다시 살아날 희망이 있게 되었소이다. 사배(謝拜)하겠소이다.”
 하니, 유충이 말하기를,
 “성상의 말씀이 당연합니다. 평양 전투에서 우리가 먼저 성을 탈환했습니다만, 이는 왕사(王事)로 나온 이상 본디 저희가 해야 할 직분이었습니다. 후에 경주(慶州)에 있을 때는 군마(軍馬)가 적어 군사 지원을 요청했는데 중간에 가로막혀 오랫동안 한산(閑散)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나가라고 해서 또 온 것이니, 사배는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통사에게 이르기를,
 “그가 죄(罪)를 입은 까닭에 대하여 말을 잘 꾸며 일러주라. 만약 모가 나게 이야기하면 중국 조정과 이 제독(李提督: 이여송)에게 폐가 될 것이니, 잘 꾸며서 말하라.”
 하고, 상이 말하기를,
 “대인의 공덕을 우리나라가 힘입었으니, 사배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하니, 유충이 말하기를,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곳의 수병(水兵)은 얼마나 되며, 육병(陸兵)은 얼마나 되고, 전비(戰備)는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사배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사배를 다시 청해야겠소이다. 말씀하신 것은 날이 저물었으니, 써서 올리겠소이다.”
 하니, 유충이 말하기를,
 “국왕께서 해주신 한 마디 말씀을 제 마음 속에 이미 받아들였으니, 번거로이 수고하실 게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대인의 덕이 지중하여 사례할 길이 없는데 사배를 허락하지 않으니, 읍(揖)을 하여 사례하겠소이다.”
 하니, 유충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좋습니다.”
 하였다. 마침내 두 번 읍하고, 상이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잔파(殘破)되고 배신이 태만하여 일로(一路)에서 미진한 일이 많았을 텐데 매우 황송하외다.”
 하니, 유충이 말하기를,
 “일로의 지공(支供)은 힘을 쓰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가산(嘉山) · 황주(黃州) 사람들은 비가 오는데도 술을 가지고 나와 호군(?軍)하였는데, 이는 국왕의 은혜입니다.”
 하자, 상이 말하기를,
 “말씀을 감당할 수 없소이다.”
 하고는, 앉기를 청하여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대인을 처음 보던 날에 주례(酒禮)를 행하려 하였는데, 대인이 굳이 하지 못하게 하여 매우 서운했었소이다.”
 하니, 유충이 말하기를,
 “제가 거느린 절강(浙江) · 복건(福建)의 군사는 척 총병(戚摠兵)이 훈련시켰고 저는 그의 문생(門生)입니다. 어찌 저의 분부를 어기고 폐단을 짓는 일이 있겠습니까. 일로의 간고(艱苦)함에 대해서는 정 통사(鄭通事) 【 정득(鄭得) 】가 아는 바입니다. 이제 듣건대 2부(部)는 하처(下處)를 구했는데 3부는 우사(寓舍)를 얻지 못했다 하니, 다시 분부하셨으면 합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대인이 전에 평양 전투에서 철환(鐵丸)을 맞기까지 하여 우리 나라 사람들이 지금까지 마음 아파하고 있는데, 지금은 어떻소이까?”
 하니, 유충이 말하기를,
 “박힌 철환을 아직 빼내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기억하고 물으시니, 감사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하처(下處)에 대한 일은 즉시 분부하겠소이다.”
 하니, 유충 이 말하기를,
 “감사합니다. 듣건대 국왕께서 일찍 이곳에 임어(臨御)하셨다니 미안하여 그만 물러가야겠습니다.”
 하자, 상이 말하기를,
 “어찌 수고랄 것이 있겠소이까. 다만 대인이 수고로울 것이니, 말씀대로 하겠소이다.”
 하고, 예단(禮單)을 올리니, 유충이 말하기를,
 “감사합니다. 저도 쉬고 싶습니다만, 군졸이 편안해야 주장(主將)의 마음도 편해지는 법입니다. 지난밤에 비를 맞고 왔으니, 속히 하처를 만들어 주시면 되지 어찌 예단을 주십니까. 후일에 받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정(軍丁)을 먼저 출발시키고 나서 총병이 들어가야 할 것이니, 도감(都監)으로 하여금 별도로 처리하게 하라.”
 하니, 이호민(李好閔)이 아뢰기를,
 “도감과 한성부(漢城府)가 힘을 합쳐 함께 해야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상이 오유충에게 답하기를,
 “말씀대로 했소이다.”
 하고, 이어 예단을 올리기를 청하니, 유충이 말하기를,
 “어른께서 주는 것은 감히 사양하지 못하는 법인데, 더구나 국왕께서 내리시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잔파된 곳에서 받기가 미안하고 또 날도 저물었으니, 단자(單子)만 받고 물건은 후에 받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처음 보는 날에 그처럼 물리친다면 무척 서운합니다.”
 하니, 유충이 말하기를,
 “단자를 받으면 물건을 받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제 날도 저물었고 감히 받지는 못하겠으나 감사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 중국 군사를 그냥 놔두고 혼자 들어가서는 안 된다.”
 하니, 이호민이 아뢰기를,
 “군인들의 숙소는 이미 분부하였으니 즉시 처리할 것입니다. 총병을 먼저 들어가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말하라.”
 하였다. 유충이 말하기를,
 “읍을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말씀대로 하겠소이다.”
 하였다. 유충이 말하기를,
 “배사(拜謝)해야 할 것이나 수고를 끼칠까 싶어 감히 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감당하지 못할 일이외다.”
 하고, 마침내 두 번 읍하였다. 상이 계단을 내려가 전송하려 하자, 유충이 굳이 사양하여 내려오지 말기를 청하였다. 상이 계하(階下)에 말을 대게 하니, 유충이 다시 청하였다. 상이 입차(入次)하였다. 상이 재차 읍하니, 유충이 마침내 말을 타고 떠났다. 상이 환궁하니, 왕세자가 궐문 밖에서 지영(祇迎)하고, 인하여 들어와 문안하였다. 정원(政院)·약방 제조(藥房提調)와 2품 이상의 옥당(玉堂)이 문안하였다.
(선조실록 1597/6/14)


 

 명나라 군은 조선을 구원하러 왔지만, 북한은 임란 때나 경술국치 때의 왜적보다 못한 것이 땅 욕심이 나면 만주로, 간도로 쳐들어갈 일이지 노예 동족을 날마다 굶겨 죽이고 때려죽이는 것도 성에 안 차는지 평화롭게 배부르게 잘사는 남쪽의 동족을 핵폭탄과 미사일과 땅굴과 화학무기와 120만 군대로 기어코 전면전을 벌여 노예 동족을 7천만으로 늘리겠다고 서슴지 않고 공언한다. 그런 자에게 명색이 정권교체했다는 이명박 정부는 무슨 사랑의 콩깍지에 씌었는지 진실과 사랑의 풍선 하나 날리는 것도 펄쩍 뛰며 못 보내게 한다. 법으로 엄단하겠단다!
 (2009. 2. 28.) 
 
 
 


 

[ 2009-02-28, 23:2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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