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과 충무공 이순신
세종대왕의 총통등록은 호랑이 이순신에게 이빨과 발톱과 날개를 달아 주었다.

최성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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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7년 4월 1일 옥문에서 나온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를 새로 쓰지만, 매달 초하루 또는 보름에 꼬박꼬박 기록하던 의식(儀式)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실행하지 않은 일이어서 기록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망궐례(望闕禮)로 멀리 북녘의 임금 계신 곳을 바라보며 절하면서 임금에게 충성을 다짐하고 임금의 만수무강을 비는 의식이었다. 선조가 직접 국문(鞠問)하진 않았으니까, 이순신 장군이 그 전에 하늘처럼 우러러 봤던 선조와 대면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여간 그는 선조에 대한 실망이 여간 크지 않았을 것이다. 선조가 알고 보니, 지방의 수령 직분도 감당 못할 소인배임을 간파했던 것 같다. 그 후로 이순신 장군의 충성은 오로지 국가와 백성으로 향했다.  

 

 조선의 스물 일곱 왕 중에서 군사 부문에서 가장 탁월한 왕은 누굴까. 다들 태조 이성계라고 할 것이다. 장군으로서는 왕조를 새로 세운 이성계의 발끝도 따라갈 왕이 없다. 그러나 업적으로 말하면, 단연 동시대 서양의 르네상스를 무색하게 하는 문치(文治)로 태양처럼 빛나는 세종대왕이다. 신라의 삼국 통일 후 우리나라의 강역(彊域)을 가장 크게 넓힌 왕이 세종대왕이니까. 그 때 이후로 조선은 단 한 뼘도 국토를 넓히지 못했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동서 양쪽에서 아작냈던 여진족은 임진왜란에서 아무 교훈도 못 얻은 조선을 두 번이나 유린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고토(故土)에 이어 중국 대륙 전체를 정복했다. 새삼 눈을 비비고 다시 보면, 세종대왕은 문무 양쪽에서 탁월한 군주였다. 세종대왕의 군사상 위대한 업적은 150년 후 이순신 장군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당대의 왕으로부터는 당신이 신하도 아닌 종 취급이나 받았지만, 승하한 지 150년이나 되는 왕으로부터는 음덕(陰德)을 듬뿍 받았다.  

 

 세종실록에는 가슴 뭉클한 이야기가 곳곳에 보이는데, 그 중에서 다음은 온 몸에 저릿저릿 전율을 일으키고 눈가에 이슬이 절로 송알송알 맺히게 한다.

 

 조선이 압록강을 국경선으로 삼게 된 데는 최윤덕(1376~1445) 장군의 공이 가장 크다. 1410년(태종 10년) 무과에 급제한 최윤덕은 1419년(세종 1년)에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 이방원의 명을 받들어 이종무와 함께 대마도를 평정한다. 그 공으로 최윤덕은 삼정승 바로 아래인 종1품 우찬성(右贊成)으로 승진한다. 세종대왕은 이처럼 무(武)도 문(文)과 똑같이 대우했다. 이순신 장군이 홀로 나라를 구하고도 죄 없는 죄인이 되고 벼슬도 끝내 종2품에서 더 올라가지 못한 것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세종대왕 당시 상대도 안 되던 고작 총인구 30만의 여진족에게 후에 인조가 머리를 바위에 찧어 피를 철철 흘리며 항복한 것은 철저한 문존무비(文尊武卑) 사상이요 정책이었다. 16년 전 모양만 살짝 바꾸어 이런 뿌리깊은 병폐가 되살아나 갈수록 기승을 부리고 있으니, 한국의 장래는 암담하기만 하다.        

 

 최윤덕은 대마도 정벌에 이어 오늘날 평안북도의 여진족을 진압하고 백성을 대대적으로 옮겨 그 땅을 영구히 우리 땅으로 만드는 데도 혁혁한 공을 세운다. 승전 소식을 듣자마자, 세종대왕은 최전선에 있는 최윤덕을 바로 정1품 우의정으로 승진시킨다. 정말 파격적이다. 철저한 신분 사회에서 이보다 큰 상은 없다. 마침내 우의정 최윤덕이 돌아온다고 하자, 세종대왕은 사람을 보내 도성 밖 멀리 홍제원에서 대왕이 친히 내리신 술로써 성심성의껏 환영하게 한다.


 

  내가 작은 벼슬을 제수할 적에도 반드시 마음을 기울여서 고르는데 하물며 정승이리오. 윤덕은 비록 배우지 않아서 건백(建白: 윗사람에게 의견을 드리는 것)의 일에 어두우나, 밤낮으로 게으르지 아니하고 일심봉공(一心奉公)하여 족히 그 지위를 보전할 것이다. (세종실록 1433/5/16)

 

 우의정 최윤덕이 평안도에서 돌아오자, 지신사 안숭선에게 명하여 선온(宣온)을 가지고 홍제원에 가서 맞이하게 하고, 임금이 사정전에 나아가 윤덕을 인견하고 간략한 술자리를 베풀어 위로하였다. (세종실록 1433/5/25)

 ○丁丑/右議政 崔閏德 回自 平安道 , 命知申事 安崇善 , 齎宣온往迎于 洪濟院 。 上御 思政殿 , 引見 閏德 , 仍設小爵以慰。
 

 

 온몸을 짜릿하게 하는 장면은 이 미담 다음에 나온다. 바로 다음 날 정식으로 개선식이 베풀어진다. 왕세자와 문무백관이 참여한 근정전에서 세종대왕은 친히 우의정 최윤덕에게 술을 따르는데, 다른 무장과 달리 가장 공이 큰 최 장군만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 임금은 공손히 서서 술을 따르고 신하는 턱 버티고 앉아서 술을 받도록 한 것이다. 문맥을 보면, 왕세자에게도 술을 따르게 한다는 말 다음에 이 말이 있어서 마치 왕세자가 술을 따를 때만 최 장군이 일어서지 못하게 한 듯하지만, 임금이 술을 따르는 것과 왕세자가 술을 따르는 것은 내용이 비슷하기 때문에 구문이 따로 떨어질 수 없다. 만약 이 부분을 왕자가 술을 따르는 것보다 앞에 두면, 임금이 술을 따를 때는 앉아서 받고 왕자가 술을 따를 때는 일어서서 받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따라서 최 장군이 앉아서 술을 받는 것은 임금이 술을 따를 때나 왕자가 술을 따를 때나 똑같이 적용된다. 이 기사에는 또 다른 미담도 전한다. 한 장수가 공무상 늦게 오는 바람에 예복을 갖추지 못하여 참가하기 난감하게 되자, 세종대왕은 임금의 옷(御衣)을 하사하고 신발도 하사하여 잔치의 원래 뜻이 사사로운 예절로 손상되지 않게 한다.     

 


 근정전에 나아가 잔치를 베풀고 출정한 장수들을 위로하였다. 우의정 최윤덕 · 판중추원사 이순몽 · 중추원사 이징석 · 중추원 부사 김효성 · 홍사석 등과 왕세자 및 여러 종친과 대언들이 연회에 입시하였다. 전 상호군 서침(徐?) 등 62명은 동쪽 월랑[廊]에 앉고, 전 판사 김재(金滓) 등 66명은 서쪽 월랑에 앉았다. 이에 앞서 상의원(尙衣院)에 명하여 옷과 신을 만들게 하고, 이날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모두 입고 잔치에 나오게 하였다. 김효성은 영변에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옷과 신을 준비하지 아니하였는데, 이날 막 연회를 시작하려고 할 때 효성이 평안도에서 왔다. 임금이 승정원과 의논하기를,
 “오늘의 잔치는 오로지 출정한 장수를 위로하기 위함인데, 효성이 올 것을 알지 못하고 옷과 신을 준비하지 아니하였으니 어떻게 처리할까.”
 하매, 여러 대언들이 논의해 아뢰기를,
 “만약 옷과 신을 갖추지 못했다고 해서 연회를 나오지 못하게 하면 옳지 못하고, 만약 연회에 나오게 한다면 지위가 사석의 위에 있는데, 도리어 옷과 신을 하사하지 아니하는 것도 불가하오니, 우선 연회에 나오게 하고 옷과 신은 뒤에 하사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어의(御衣)와 신을 내어 주면서 즉시 입고 연회에 참예하게 하였다. 임금이 친히 술잔을 잡아 윤덕 · 순몽 · 효성 · 징석 · 사석 등에게 주고, 또 세자로 하여금 윤덕 등의 앞에 나아가서 술잔을 돌리게 하고, 인해 윤덕에게 명하여 일어나서 술을 받지 말게 하였다. 군관(軍官)에게 명하여 마주 대하여 일어나서 춤을 추게 하니, 윤덕도 술이 취하여 일어나 춤을 추고 임금에게 술잔을 드렸다. (세종실록 1433/5/26)

 

 ○御 勤政殿 , 設宴慰赴征將帥, 右議政 崔閏德 、判中樞院事 李順蒙 、中樞院使 李澄石 、中樞院副使 金孝誠 · 洪師錫 、王世子諸宗親諸代言侍宴, 前上護軍 徐침 等六十二人坐於東廊, 前判事 金滓 等六十六人坐於西廊。 前此, 命尙衣院, 造衣及靴, 是日分賜將帥, 皆令服以赴宴。 金孝誠 在 寧邊 未還, 未備衣靴。 是日將宴, 孝誠 來自 平安道 , 上議於承政院曰: “今日之宴, 專慰赴征將帥也。 未知 孝誠 之來, 未備衣靴, 處之何如?” 諸代言議啓: “若以未備衣靴, 不令赴宴, 則不可, 若令赴宴, 則位在 師錫 之上, 而反不賜衣靴, 亦且不可, 姑令赴宴, 從後賜之何如?” 上乃出御衣及靴以賜, 卽令衣以參宴。 上親執爵, 賜 閏德 、 順蒙 、 孝誠 、 澄石 、 師錫 等, 又命世子就 閏德 等之前行酒, 仍命 閏德 勿起受酒。 命軍官相對起舞, 閏德 亦酒?, 起舞獻爵。

 

 

 이런 왕 아래서 어떤 신하인들 충성을 다하지 않으랴! 세종대왕은 가서 싸우고 오라, 이렇게 빈말로 충성을 도둑질하지도 않았다. 군사와 무기와 군량미를 충분히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이 중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 무기다. 최무선의 화포는 세종대왕의 정책에 의해 성능이 크게 향상되었다. 문종실록 1450년 10월 5일자에 따르면, 화포가 1리(釐) 단위로 정확해졌다. 박재광의 <<화염조선>>에 따르면, 1리(釐)는 0.3mm라고 한다. 그래서 천자총통은 사거리가 개량 전 400보 내지 500보(약 550m~690m)에서 1300보(약 1800m)로 약 2.5배 늘어났다. 지자총통은 사거리가 500보에서 800~900보(약 1100m~1250m)로 약 2배 늘어났다. 왜적 조총의 사거리가 약 100m였던 것과 대조해 보면, 후에 이순신 장군이 세종대왕에게 얼마나 큰 음덕을 입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세종대왕은 1448년 <<총통등록(銃筒謄錄)>>을 펴낸다. 조선의 무기를 집대성한 기념비적 서적이다. 이는 단지 각종 무기에 대해 주섬주섬 설명한 책이 아니다. 박재광에 따르면, 이를 통해 한 나라의 무기 체제에서 제일 중요한 무기의 표준화와 규격화와 전문화를 달성한 것이라고 한다.

 유성룡의 <<서애집 중 잡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한양에는 화약이 무려 2만7천 근이나 있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이 한 번 출전할 때, 화약을 1천 근 정도 썼음을 알 수 있는데(유황을 보내 달라는 장계), 정광수는 <<이순신과 임진왜란>>에서 이순신 장군이 원균에게 인수인계한 화약이 4천 근이었다고 한다. 이에 비추어 보면, 2만7천 근은 어마어마한 양이다. 그런데 이걸 단 한 번도 못 쓰고 울화통이 터진 조선의 백성들이 폭파시켰다고 한다. 그 후에 화약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애쓰지만, 염초 만드는 전문가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중국한테 잘 배우지도 못하여, 바다에서는 조선의 주무기였던 화포가 육전(陸戰)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못했다. 진주와 행주와 경주와 울산에서 일부 사용되었을 따름이다.


 

 이 무렵에는 염초가 심히 귀하였으니, 국초(國初)에 군기시에서 보유하고 있는 것은 겨우 화약 6근이었다. 뒤에 해마다 보태어 준비하니 임진 난리가 있기 전까지는 군기시의 창고에 화약 2만7천 근이 비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적이 경성에 미치자 성안 백성들이 먼저 군기시와 다른 무기를 불사르니, 하루저녁에 다 타 버리고 말았다. <<서애집>>  
 是時焰硝甚貴。國初軍器寺只有火藥六斤。後逐年加備。壬辰變前。軍器庫有火藥二萬七千斤。及賊入京。城中之民。先焚軍器寺。與他器械一夕(火+畏)燼。


 

 고려 말 무신란 때보다 10배는 심한 무인 천시 사상과 정책 때문에, 조선은 세종대왕에 의해 군사강국으로 거듭나고 체제도 완벽하게 갖추었지만, 150년 후에는 간신히 그 명맥이 이순신 장군에게만 전해졌다.

 

 이순신 장군이 태어나기 4년 전인 1541년(중종 36년), 조선은 망국의 주춧돌을 놓았다.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가 시행된 것이다. 암묵적인 관행을 합법화한 것이다. 군(軍)에 가는 대신 포(布)를 조금 내다가 이 법령과 더불어 이제 양반은 아예 군 면제자가 되어 입대하지도 않고 돈도 안 내어도 되었던 것이다. 군 복무가 특권이었던 유럽과 일본과 여진족에 비해, 조선은 군 면제가 특권으로 자리잡음으로써 문약(文弱)의 나라로,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완전히 괴리(乖離)된 나라로, 누구든 국경을 넘어 1만 명만 쳐들어오면 나라가 바로 망하게 될 정도로 허약한 나라로 전락했다. 

 

 군사체제가 더 망가질 수 없을 만큼 망가진 나라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룩한 일은 하나에서 열까지 기적 아닌 것이 없다. 그런 사정을 알아야만 이순신 장군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며, 그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시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었는지를 알 수 있다. 천하제일 명장 충무공 이순신도 만약 세종대왕이 없었더라면, 왜적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것이다. 한두 번의 싸움에서 장렬히 전사했을 것이다.   
  (2009. 3. 7.)

[ 2009-03-07, 21:2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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