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대동아공영권을 저지시킨 이순신
이순신 장군이 아니었으면 조선과 명은 풍신수길을 황제로 모셨으리라.

최성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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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 장군의 거짓말 같은 연전연승은 당시부터 지금까지 400년이 넘도록 질시와 폄하와 과소평가의 대상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나무가 너무 크면 바람도 그만큼 많이 받고, 산이 너무 높으면 일년 내내 구름에 휩싸이는 이치와 같다. 큰 나무는 직접 찾아가서 보고, 큰 산은 직접 올라가 봐야 그 높이와 크기를 알 수 있다. 혀의 칼로 전쟁하고 발의 날개로 줄행랑치던 선조도 이순신 장군의 승전이 처음에는 너무 반가워 전라도로 파천할 생각까지 한다. 명의 만력제가 이르되, 이연(선조)이 굳이 요동에 들어오려면 일개 사또 변학도로 취급하여 100명 이하의 신하만 거느리고 오라고 하자, 죽더라도 천자의 나라에서 죽겠다고 어리광을 피우다가 너무 큰 충격에 기가 팍 죽어 중국으로 도망갈 생각은 영영 단념하고 이순신 장군이 승승장구하는 전라도로 피난 갈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던 것이다. 1592년 5월 23일 이순신 장군이 올려 보낸  '옥포에서 적을 무찌른 장계'를 받아들고 대성통곡하던(징비록) 마음이 그 때까지 변함없었다. 

 


상이 대신들에게 하문하기를,
 “이곳으로 온 것은 오로지 요동으로 가기 위해서였는데 이미 요동으로 갈 수 없다면, 수상(水上)도 지극히 위험하니 항해(航海)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은밀히 의논하여 아뢰라.”
 하자, 윤두수 등이 아뢰기를,
 “왜적이 평양에 있으니 바닷길로 가게 되면 왜적에게 저지 당할까 두렵습니다. 황해 감사에게 바닷길을 정탐하고 와서 보고하도록 한 뒤에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약 왜적이 가까이 오면 창성(昌城)으로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렇게 하면 더딜 것 같다. 끝내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이 좋으니 지금 배를 준비하도록 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1592/6/26)
   ○甲寅/上問大臣曰: “來此全爲赴 遼 , 旣以赴 遼 爲不可, 則水上亦爲極危。 航海何如? 密議以啓。” 尹斗壽 等曰: “賊在 平壤 , 若由海路, 則恐爲賊?。 令 黃海 監司, 哨探海路來報, 然後決之, 何如? 若賊迫, 則可避 昌城 。” 答曰: “然則似遲, 雖終不行, 有備而待, 可也。 今可措置船隻。”


 

윤두수가 선천(宣川) · 곽산(郭山) 등의 바닷길을 경유하여 남쪽 지방으로 갈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만약 간다면 수로를 따라 갈 것이고 다시 선천 · 곽산을 경유하여 가지는 않겠다. 이 곳 의주로부터 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충청 · 전라도로 가서 정박하면 역시 군사들을 모집하여 부흥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이에 반드시 육지로 올라가 가야 할 곳도 있을 터이니, 이 곳 의주에서부터 가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인근 고을의 수령들에게 배와 격군(格軍)을 준비하도록 하라. 비록 준비하였다가 쓰지 않더라도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윤두수 등이 아뢰기를,
 “다시 생각해보니 장산곶(長山串) 근처는 뱃길이 대단히 험하여 평상시에도 평안도 배들이 언제나 장산곶에서 파선 당하곤 했으니, 대가가 이 곳을 지나서는 안 됩니다. 용천(龍川)을 경유하여 급히 안악(安岳)에 정박하고 육로로 올라가 해주(海州)를 지나 아산(牙山)에 도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편으로는 선전관을 보내어 사공들을 소집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그와 같이 하겠으니, 실행하든 않든 간에 속히 준비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1592/6/26)
 尹斗壽 請由 宣川 、 郭山 之海路, 以達南方。 答曰: “若去, 則當由水路以往, 今不更由 宣川 、 郭山 以往。 自此州以往何如? 往泊於 忠淸 、 全羅道 , 則亦可以召募, 以圖興復。 其間必當有登陸以行處, 不可自此以往乎?” 又曰: “令近官守令, 措置船隻及格軍。 雖備而不爲, 預備可也。” 尹斗壽 等曰: “更思之, 則 長山串 近處, 水路甚險, 常時 平安道 船隻, 每於 長山串 見破, 大駕不可過此。 由於 龍川 , 急泊於 安岳 , 登陸路, 過 海州 , 到 牙山 可也。 一邊發遣宣傳官, 召集水手。” 答曰: “知道。 如是爲之, 爲不爲間, 速爲措置。”


명나라에서 우리나라가 내부(內附)를 청한 자문(咨文)을 보고 장차 우리 나라를 관전보(寬奠堡)의 빈 관아에 거처시키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상이 드디어 의주에 오래 머물 계획을 하였다. (선조실록 1592/6/26)
 ○聞天朝見本國內附咨, 將處本國於 寬奠堡 空?, 上遂爲久住 義州 之計。

 

만일 해국(該國)이 위급하여 참으로 도망해 오면 정리에 있어 막기가 어렵다. 당연히 여러 해 공순했던 점을 생각하여 칙령(勅令)으로 용납할 것이니, 반드시 인원수를 짐작하여 1백 명을 넘지 않도록 하게 하라. (선조실록 1592/7/11)
  萬一該國危急固奔, 情難盡拒。 宜俯念恭順有年, ?令容納, 亦須酌量名數, 無過百人。


 

 배은망덕(背恩忘德)은 범인의 본성이요, 결초보은(結草報恩)은 위인의 한 조각 붉은 마음이다. 선조와 윤두수와 원균 등은 바로 그런 범인으로서 너무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이다. 그래서 살 만해지자 처음에는 은혜를 망각했고 다음에는 엉뚱한 마음이 들었다. 이윽고 그까짓 것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겨져서, 스스로 위대한 공을 세워 보겠다는 야심을 품다가 패가망신(敗家亡身)하고 나라도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하게 만든다.

 

 선조 이하 조선의 집권층은 전쟁 책임에 대한 죄의식도 강했다. 더불어 전쟁이 끝난 후 권력과 명예과 부를 한꺼번에 잃어버릴 것 같은 위기의식도 새록새록 일어났다. 이를 동시에 극복하는 방법은 영웅의 뒤통수를 치는 것과 승전의 공을 제3자에게 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기를 쓰고 의병장 김덕령과 정문부 등이나 상승장군 이순신을 죽이거나 하옥하거나 무시한다. 또한 제3자인 명나라 군대의 공은 굽신굽신 하늘 끝까지 높인다. 중국군이 있으면 전쟁은 승리로 끝난다는 확신을 갖고, '충성 없는 효도'밖에 모르는 썩은 유학도(儒學徒)인 선조 이하 문관들이 전쟁 후 자신들의 위로 오를 수도 있는 국내의 '천한' 무인들이 이룬 구국의 공로를 온갖 꼬투리를 잡아 벌떼같이 폄하한다.    

 

 오늘날도 이런 현상은 그대로 적용된다. 군인 출신 대통령과 대기업은 현대의 선조 이하 문관들에겐 눈엣가시다. 그들의 공이 없다면, 있어도 보잘것없다면 그렇게 대를 이어 이를 갈고 거품을 품으며 박정희와 이건희를 폄하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입을 벙긋하기도 전에 국민이 일찌감치 단죄해 줄 테니까! 국민은 다르다. 국민은 요상한 이론이나 알쏭달쏭한 정통성에는 관심 없다. 그들에게 가장 이익을 많이 준 지도자와 경제인이 누구냐,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먹고살기 바쁜 그들은 봄바람과 겨울바람을 피부로 느낀다. 나날이 살림이 늘어나던 때가, 희망이 넘치던 때가, 집안에 웃음꽃이 만발하던 때가 언제인지 그들은 몸으로  안다. 어디에 취직하면 돈도 많이 벌고 배움도 많이 얻고 인간 대접도 제대로 받는지 본능적으로 안다. 김씨공산왕조는 이들보다 더 다급하다. 한국의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인정하면 설 땅이 없어진다. 친북좌파와 김씨공산왕조는 이 점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을 인정하되, 그것이 그렇게 호들갑을 떨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객관적인 관점에서 나름대로 신화와 역사를 구별하려고 한다. 언뜻 보면 대단히 합리적인 사람들 같다. 그런데 그들이 내세우는 근거를 들어보면, 어디서 대충 얻어듣고 좋은 머리로 얼렁뚱땅 조합한 것들이다. 이순신 장군을 처음으로 성웅이라 한 사람은 이은상이 아니라 신채호다. 신채호와 이은상은 각각 일제시대와 한강의 기적 시대에 현실을 타개하고 이상의 별을 바라보기 위해 이순신 장군에게 최상의 찬사를 보냈지만, 그들도 이순신 장군을 제대로 연구하고 이해한 것은 아니다. 이순신 장군의 겉을 보았지 속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반감을 갖는다. 그들의 느낌표 만발은 도리어 설득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의 서론과 총평에서 꼭 언급되는 말이 있다. 그것은 풍신수길의 과대망상이 빚은 비극이라는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가 황소한테 덤비기 전에 어린애의 우연한 돌팔매에 맞아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비유다. 언감생심 제까짓 게 어떻게 조선한테 이기고, 설령 조선한테 이기더라고 어떻게 일본의 마흔 배(당시에 북해도는 일본의 통치권이 미치지 못함)나 큰 대명(大明)을 이긴단 말인가. 하, 하, 하!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후 명나라는 곧 망한다. 그것도 만주벌판에서 뿔뿔이 흩어져 토끼나 쫓고 물고기나 잡고 어쩌다 호랑이를 잡아 가죽을 명나라의 변방 장수에게 팔던 자들이 10만도 안 되는 군사로 눈 깜짝할 사이에 중국 대륙을 석권한다. 이들과 풍신수길의 군대를 비교해 보라. 조선의 군대도 형편없었지만, 명나라의 군대도 엉망이었다. 군기(軍紀), 무기, 식량 등이 왕조 초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해졌고 무디어졌고 부실해졌다. 둘 다 왕조 말기 증상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일본은 400년 전란 시대를 막 끝내어 새 왕조 초기로 원기왕성했다. 공성전(攻城戰), 수성전(守城戰), 대회전(大會戰), 백병전 어느 것 하나 능치 못한 것이 없었다. 더구나 그들은 400년 전란을 끝내는 결정적 무기인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화승총 100자루만 있으면 약졸(弱卒)도 천하무적의 보병 1만, 공포의 기병 1천은 식은 죽 먹기로 이길 수 있었다. 명나라에는 화포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이미 녹슬었다. 또한 일본도 그보다 작지만 화포가 있었다.

 

 풍신수길의 16만 조선 침략군과 누르하치의 10만 명나라 침략군 중 어느 군대가 강했을까. 더구나 일본에는 주력부대는 출동도 하지 않았다. 명고옥(名古屋 나고야)에 대기한 군대만 10만이 넘었다. 이순신 장군이 바다를 제패하지 못했으면, 당시 일본군은 능히 조선을 한 달 안에 정복했을 것이고 수륙 양면으로 요동과 하북으로 짓쳐 들어가 자금성을 무너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이순신 장군이 바다들 제패하지 못했으면, 명나라는 구원하러 올 시간도 없었다.

 

 명의 만력제는 조선에 최대 6만 명을 파병했지만, 이순신 장군의 해로 장악으로 식량이 떨어진 평양성의 소서행장을 물리친 것 외에는 일본군과 싸워 이긴 전투가 없다. 무엇보다 군인 숫자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명나라 군대의 공을 의도적으로 하늘 높이 치켜세우던 선조 이하 집권층이 직산대첩이라고 우러러 받들던 것은 지난번 글에서 밝혔듯이 누가 이겼는지도 모르는 전초전에 지나지 않았다. 서울의 턱밑까지 다가왔던 10만 왜적이 거짓말같이 물러간 것은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전선으로 열  배의 적선을 깨뜨린 명량대첩 때문이었다. 일단 그들이 남해안에 구축해 둔 난공불락의 왜성(倭城)으로 들어가자, 명나라와 조선의 대포도 화살도 아무 짝에도 쓸모 없었다. 전쟁 아마추어에게는 초전에 조금 유리하게 보였을 따름이다.     
 

 실로 이순신 장군의 압승 또 압승은 일본의 제1차 대동아공영권을 저지한 위업이다. 동양삼국의 300년 평화를 가져온 위업이다. 400년 전 조선이 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을 저지한 위업이다.

 

 해전(海戰)의 중요성이 마음에 잘 와 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둔필(鈍筆)이나마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고대 그리스는 경이의 문화다. 인류 문화의 보고다. 특히 아테네가 그러하다. 아테네는 멸망한 후 2천 년이 흘러서야 부활의 날갯짓을 하여 손바닥 대륙 유럽으로 하여금 세계를 정복하게 했다. 현대의 철학, 과학, 문화, 경제, 정치 등 어느 것이나 그 원류는 그리스에 있고 아테네에 있다.

 

 아테네는 제1차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그리스의 맹주로 부상한다. 그 원동력은 해군이다.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이 승리한 후, 아테네는 횡재한다. 그것은 라우레이온 광산에서 은에 이어 금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시민들은 이를 골고루 10드라크마씩 분배하자고 했다. 이 때 단 한 사람 아테네의 박정희 테미스토클레스가 이에 반대했다. (박정희는 일본으로부터 받은 대일청구자금을 사이좋게 껌 값으로 가르지 않고 포항제철 등 산업화의 종자돈으로 사용했다.) 그 돈으로 함대를 건설하자고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200척을 건조했다. 이것은 살라미스해전에서 그리스 연합함대가 동원한 총 380척의 절반이 넘는다.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는 10년 전 부왕(父王)이 당한 마라톤 전투의 패배를 설욕할 겸 그리스 전체를 정복하기 위해 국가 총동원력을 내린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전투병력만 264만 명이다. 심부름 부대와 구경꾼 부대까지 합하면 528만이었다고 한다. 부풀리는 것도 전략의 하나니까,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100만 명은 되었을 것 같다. 이 중에서 해군은 대소 군선 3천 척이었다. 그 중에 살라미스해전에는 전쟁사가들에 따르면 600척에서 1,200척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살육과 문명>> 핸슨-- 그리스 연합함대의 2배 내지 3배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신탁을 멋지게 해석하여 안전한 나무 성채란 나무로 만든 배이라고 주장하여 아테네 시민들을 몽땅 배에 싣고 살라미스섬에 피신시킨다. 육전으로는 도저히 상대가 안 됨을 알았던 것이다. 아테네는 이내 폐허가 되었다.

 

 살라미스해전에서 페르시아군 가운데 약 4만 명이 헤엄을 못 쳐 죽었다고 한다. 실지 전투에서는 몇 천 명 죽었을 것이다. 맞은 편의 산 중턱에 설치한 거대하고 화려한 단상에서 크세르크세스는 왕비와 함께 목젖을 오르내리며 구경하다가 페르시아군이 패전하자, 바로 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수십 만의 육군을 뒤에 남겼지만, 그들은 그리스 연합군에게 패배한다. 이로써 아테네의 황금시대가 도래한다.

 

 에누리해서 100만 대군이라고 하더라도 그 중에서 고작 4만이 죽었는데, 크세르크세스는 왜 부리나케 도망갔을까. 그것은 직접 보고 해군의 위력을 제대로 알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오늘날의 보스포러스 해협을 막아 버리면, 100만 페르시아 대군은 독 안의 든 쥐가 된다. 무엇보다 식량을 구할 수 없다. 한 번 지나갈 때마다 각 도시와 촌락의 나무뿌리까지 다 캐 먹는 밤하늘의 별보다 많은 대군은 막상 해군이 없으면, 본국에서 식량을 가져오지 못하면 척박한 그리스 반도에서는 가만 두어도 굶어 죽는다. 

 

 1853년 일본 덕천 막부의 수도 앞에 검은 배 4척이 나타났다. 그 중에 둘은 당시 일본인의 상상 세계를 넘어섰다. 페리 제독이 몰고 온 증기선이었다. 이전 같으면 작은 배로 에워싸고 불화살을 쏘고 구식 총으로 쏘면 불태울 수 있겠는데, 이 두 척은 어림도 없었다. 만약 이 두 척의 배(미시시피호와 서스키해너호)가  강호(江戶 에도)만을 가로막으면 100만 인구가 그들의 사정거리에 들어가고 전국에서 바다로 공급되는 식량이 끊긴다. 덕천막부는 어쩔 수 없었다. 한 가닥 자존심을 살려 다음 해에 대답을 주기로 한다. 1854년 이번에는 페리가 8척을 끌고 온다. 그 중에 세 척이 증기선이었다. 그것은 미국의 전 함대 중 4분의 1이었다.--<<동양문화사>>라이샤워--
떠오르는 제국 미국의 해군이 보유한 전 함대가 32척밖에 안 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개항하기로 한다. 자기들도 그런 배를 만들기로 한다.

 

 1894년 육군도 없고 해군은 더더욱 없는 조선에 비해 조선의 종주국 청은 총 65척의 근대 함선을 보유한다. 일본은 총 32척을 보유한다. 이들이 서로 조선을 삼키기 위해 압록강 하구에서 결전을 벌인다. 이 때 동원된 함선은 양국이 똑같은 12척! 이 해전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청일전쟁은 일본 쪽으로 결정적으로 기운다. 이 전쟁으로 일본은 실질적으로 조선의 종주국이 되었고 청으로부터 전쟁 배상금 2억 냥을 받는다. 청의 1년 재정수입이 8천만 냥일 때의 일이다. 일본이 조선을 삼키기 위해선 러시아도 물리쳐야 한다. 1904년 이들은 대한해협에서 맞붙는다. 이 때 일본의 주력 함선은 35척이고 러시아의 그것은 36척이었다. 비슷한 전력이었지만, 이순신 장군의 '일시 집중타'를 그대로 본받아 동향(東鄕 도고)은 압승한다. 

 

 놀라운 것은 일본 함선의 발전이다. 10년 사이에 주력함선이 4,270톤에서 15,200톤으로 늘어난 것이다. 중량은 3배 이상 늘었음에도 속도가 도리어 시속 17노트에서 19노트로 늘었다. 대포는 12.5인치 1문, 4.7인치 11문에서 12인치 4문, 6인치 14문으로 늘었다. 청일전쟁 시 중국은 일본보다 낡긴 했지만, 주력함 두 척은 모두 7,430톤에 12인치 포 4문, 6인치 2문이었다. 단, 속도가 13노트로 일본보다 훨씬 느렸다. -->> -- Ballard     

 

 선조와 같은 시기에 영국은 엘리자베드 여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1588년 그녀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영국의 바다로 유인하여 대포와 폭풍우로 무찌른다. 이 때 영국은 197척, 스페인은 130척이었다. 영국은 왕과 귀족과 국민만이 아니라 해적도 마음을 모으고 힘을 모으고 깡을 모아 130척 아르마다 함대를 상대로 싸워 11척을 격침시킨다. 셰익스피어와 베토벤의 폭풍우(Tempest)가 53척을 깨뜨려서 겨우 66척이 돌아간다. 스페인 해군은 약 2만6천 명이 죽는다. --<<서구 해전사>> 김주식--

 

세계 최강국에게 64척의 전함과 2만6천 명의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다. 아니다! 그걸로 끝이었다. 스페인은 영국에도 뒤지고 프랑스에도 뒤지고 네덜란드에도 뒤진다.  

 

 영국의 아성에 도전한 것은 프랑스다. 나폴레옹이다. 현대전은 바로 나폴레옹에서 시작된다. 그의 한 발 두 발 세 발 앞선 전략에 유럽은 유사이래 처음으로 통일 직전에 이른다. 작은 섬나라 영국이 이를 가로막았다. 넬슨이 그 주인공이다.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으로 영국을 고립시키고 유럽을 한 손안에 쥐려고 했지만, 영국의 해군은 이를 씩 비웃으며 식량과 옷과 사치품을 요리조리 사고 팔았다. 마침내 1805년 나폴레옹은 영국을 침공하기로 만반의 작전계획을 세운다. 넬슨이 가만두지 않았다. 1798년 이집트 해안에서 나폴레옹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안긴 바로 그 원수였다. 

 

 영국은 27척, 프랑스는 18척, 프랑스의 연합군 스페인은 15척--영국 27척 대 프랑스 연합함대 33척으로 대등했다. 트라팔가에서 넬슨은 프랑스 연합함대 5척을 격침하고 17척을 나포한다. 그로써 프랑스의 영광은 서산으로 급격히 기운다. 넬슨은 비록 이 전투에서 전사했지만, 영국의 영광은 100년 더 지속된다.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로 진격한 것도 영국과 러시아가 바다를 통해 서로 사랑을 나눴기 때문에 질투에 불타서 동장군(冬將軍)의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덤벼들었던 전쟁이다. 

 

 세계의 운명이 이처럼 해전으로 결정된 예가 많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이순신 장군처럼 고립무원이었던 적은 없었다. 왕도 안 도와 주고! 사대부도 안 도와 주고! 양반도 안 도와 주고! 왜적보다 더 흉악한 내부의 적은 왕과 사대부와 손잡고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그런 경우는 어디에도 없다. 13척(나중에 1척 더 구함)으로 무려 10배나 되는 133척을 물리친 경우는 더더욱 없다. 거의 대등하거나 많아야 2배 내지 3배 많은 경우일 뿐이다. 

 

 이순신 장군의 위업은 지금껏 최고의 찬사를 늘어놓은 사람도 최상급의 찬사는 바치지 못했다. 제1차 대동아공영권을 저지한 위업 하나만으로도, 그는 한국의 바다와 세계의 바다 위에서 찬연히 빛난다. 인품은 더 아름다웠으니!      (2009. 3. 15.)

   
                                                                                                                                   

[ 2009-03-15, 19:4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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