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장군 이사부, 신라군의 기반을 닦다
[고성혁의 역사추적] 관산성 전투 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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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장군  이사부와 거칠부 장군 다시보기 - 그들은 신라 팽창의 앙상블

 

◈ 삼국시대  장군들을  여러분들은 몇 명이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들 대부분이 중국 삼국지에 나오는 장군 이름을 한번 말해 보라고 하면 금방 열명정도는 줄줄 왼다.  이름뿐만 아니라 그 장군들이 어떤 무기로 어떻게 싸워 이겼는지도 줄줄꾀고 있고 더러는 많이 알고 있슴을 자랑까지 하게 된다.  그래서 화제를 바꾸어서 그러면 우리나라 삼국시대 장군이름을 한번 말해 보라고 하면  중국 삼국지에 나오는 장군이름을 줄줄외던 것과는 달리 금방 막혀 버린다.

 

고작 말하는 것은   김유신 계백 을지문덕 연개소문 광개토대왕 화랑관창  이런식으로 답하는 것이 보통인데  광개토대왕이나 화랑관창은 장군이 아니니까 제외하고 나면 보통 5손가락도 못채우고 만다.  자주성을 소리높이 외치는 한국인들이 중국장군은 잘 알고 있으면서 정작 우리의 장군은 5손가락에도 다 못 꼽을 정도이니  이건 잘못되어도 한창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서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우리가 미쳐 알지 못했던 장군들이 무수이 나온다. 그리고 그들의 전투를 군사적 관점에서 곱씹어 보면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그런 차원에서  이번에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좀 더 많이 들추어 내어 우리가 소홀했던 장군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관산성 전투와 연관된 장군들인데 알고보면 신라의 확장이 시체말로  고스톱해서 얻은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 신라의 숨어 있는 명장   이사부 장군 - 신라군의 기반을 닦다

 

관산성전투에 대해서 살펴보다가  새롭게 눈에 들었던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거칠부와 이사부였다. 이사부라고 하면 일반인들도  “어! 어디서 듣던 사람인데?  아 맞다. 신라장군 이사부” 이렇게 반응을 하게 된다.   유행가 가사를 통해서  귀에 익숙하게 된 이사부 장군이 바로 그사람이다.     “지증왕 13년  임자없는 섬이라고 우기면 정말 곤란해.  신라장군 이사부 지하에서 웃는다 독도는 우리땅 우리땅”이라는 노랫말 가사로 통해서 이사부장군은 현재의 우리와 소통하고 있다.

 

또한 거칠부도 마찬가지다.  그냥 거칠부라고 하면 몰라도 “거칠부의 국사” 로 우리머리속에 각인되어 있을 뿐이고   그 이상은 시험에 안나오기 때문에  알지도 그리고 알 필요도 없었던 인물이었다.  그저  신라 진흥왕때  왕명으로  처음으로 그때까지의 신라역사를 기록하는 국사를 편찬하게 되었다정도였다.

 

그러나  이번 관산성 전투에 대한 역사추적을 통해서  이사부와 거칠부가  그렇게 큰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두인물이 도대체 어느정도이길레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가하고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굳이 설명한다면   신라의 삼국통일의 두 주역이  김춘추와 김유신장군이라면   그보다 앞선  신라 진흥왕때   신라전성기를 연 두 주역이 바로 이사부장군과  거칠부 장군이다라고 비유하면 거의 딱 맞을 듯 싶다.  


거칠부의 국사를 편찬이라고 생각해서  거칠부가  조선시대 붓잡고 글만 쓰는 선비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거칠부는  삼국사기에서도  분명하게 김유신 장군 다음으로 그 비중을 높게 다룰만큼  열전편에  거칠부의 면모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특히 군사적 관점에서 볼때는   젊은 화랑 김유신이 닮고자 했던  모델이  거칠부가 아니었겠는가 하고 조심스럽게 상상해 본다. 왜냐하면  김유신장군과 거칠부,이사부의 군사작전 스타일이 빼다 박았다고 해도 될만큼 닮아있기 때문이다.   특히 승리하는 지휘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정보전을 통한 지략으로 승리하는 부분이 너무나도 똑같다.  기만과 우회기동을 통하여 적의 허를 찌르고  순식간에 적이 무너지게 하는  요즘식으로 말하면   투자 대비  효과를 극대화하는 모습은 흡사 삼국지 제갈공명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한다 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관산성전투의 배후 지휘자  이사부장군과 거칠부 장군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알아보도록 하자.

 

 독도는 우리땅의 주역  이사부 장군

 

 q 삼국사기 열전편에 기록된 이사부 장군

 

독도는 우리땅의 주인공 신라 이사부 장군에 대해서 알아보고  필자가 왜 이사부장군을 관산성 전투의 배후 지휘자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지금부터 그 역사과정을 추적해 보자.

삼국사기 권44 열전 4편에 보면 이사부편과 거칠부편이  나란히 기록되어 있다. 이사부장군은 신라 지증왕때부터 진흥왕때까지 활약하였고  진흥왕 15년 백제와 일대 격전을 벌였던 관산성 전투당시엔 신라의 병부령으로서 총 지휘를 하였다.때독도는 우리땅 이사부장군을 살아있는 역사로소 우리 가슴에 품어 보자. 그럴려면 그 열전편에 기록된 아사부장군의 기록을 그대로 적어본다.

 

 <異斯夫 이사부>

 [或云<苔宗>.]姓金氏, <奈勿王>四世孫. <智度路王>時, 爲沿邊官, 襲<居道>權謀, 以馬戱, 誤<加耶[或云<加羅>.]國>取之. 至十三年壬辰, 爲<阿瑟羅州> 軍主, 謀幷<于山國>. 謂其國人愚悍, 難以威降,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子{獅子} , 分載戰舡, 抵其國海岸, 詐告曰: "汝若不服, 則{卽} 放此猛獸, 踏殺之." 其人恐懼則{乃} 降. <眞興王>在位十一年, <太寶>元年, <百濟>拔<高句麗><道薩城>, <高句麗>陷<百濟><金峴城>. 主{王} 乘兩國兵疲, 命<異斯夫>, 出兵擊之, 取二城增築, 留申{甲} 士(+一千) 戍之. 時, <高句麗>遣兵來攻<金峴城>, 不克而還. <異斯夫>追擊之大勝.

 

이사부[혹은 태종이라고도 한다.]의 성은 김씨이요, 나물왕의 4세 손이다. 지도로왕(=>지증왕) 때 변경 관리가 되어 [거도]의 권모를 모방하여 말놀이로써  가야[혹은 가라라고도 한다.]국을 속여서 빼앗았다.

 

지증왕 13년 임진년에 그는 하슬라주(지금의 강릉)의 군주(軍主)가 되어 우산국을 병합하려고 꾀하였다, 그는 그 나라 사람들이 미련하고 사나워서 힘으로 항복받기는 어려우나 속임수로 항복시킬 수는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나무로 사자를 많이 만들어 싸움배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으로 가서 위협하기를 


 "너희들이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들을 풀어 놓아서 밟아 죽이겠다."
우산국 사람들이 두려워 하여 즉시 항복하였다.

 

진흥왕 재위 11년인 태보 원년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고,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두 나라 군사가 피로한 틈을 이용하여 이사부를 시켜서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쳐서 두 개의 성을 빼앗은 다음 성을 증축하고 군사들을 남겨 두어 수비하게 하였다. 이 때 고구려가 군사를 보내 금현성을 치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가자 이사부가 이들을 추격하여 대승하였다.

 

 

이것이 삼국사기 열전편에 기록된 이사부장군에 대한 내용이다.  내용자체는 그리 많지 않으나 군사적으로 볼땐 그 속에 엄청나게 많은 비밀이 숨어 있다.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유행가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이사부하면 울릉도인 우산국 병합이라는 것만을 기억할 텐데 사실은  진흥왕 11년때  고구려와 백제의 도살성과 금현성을 빼앗은 사실이 역사의 대변혁의 전주곡 역할을 하게 된다.  처음 부분에 보면  이사부가 거도의 말놀이를 모방하여 가야를 속여서 빼앗았다고 나오는데 그 거도 이야기를 보충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보충설명 tip  * 거도(居道) 이야기 *
이 이야기는  초기신라때  가야 연맹국을 신라가 공격할 때  기만전술로서 싸워 이긴 거도에 대한 것으로써 삼국사기 열전에 올라와 있다.  삼국사기의 열전 거도편엔 다음과 같이 올라와 있다.

  거도는 탈해이사금때 사람인데 그 성씨는 전해지지 않고 어디 사람인지도 모른다.
탈해 이사금때 벼슬이 간(干)에 이르렀는데  이때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이 신라 국경에 이웃해 끼어 있어서 자못 나라에 걱적꺼리가 되었다. 거도는 변방의 관리가 되어서 몰래 그 나라들을 병탄할 마음을 품었다. 매년 한찰PTlr 장토(張吐)의 들에서 말떼를 모아 군사들로 하여금 말놀이(馬戱)를 즐기게 하니, 당시 사람들이 마숙(馬叔)이라 불렀다. 두 나라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신라가 늘 하는 행사라고 생각하고 의심하지 않았다. 이에 거도가 군사와 마필을 일으켜 불의에 쳐서 두 나라를 멸망시켰다.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중에서 가장 후진적이었고 약했던 신라가  진흥왕때 고구려 백제 두 나라를 상대로 동시에 성을 빼앗는데는 이사부장군의 역할이 절대적이라 할 수 있는데 말놀이를 가장하여 적을 기만한다든가  고구려 백제 양군의 군사가 피로한 틈을 타서 양국의 성을 빼앗는다는 단편적 기록만으로도  이사부의 기회포착능력과  군사작전 능력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할 수 있는 배경엔  정보력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 한데  그 정보부분에서 거칠부가 탁월한 능력을 발휘 했는데  당시 거칠부는 이사부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q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기록된 이사부장군의 모습

 

 w 지증왕6년(505년) 봄 2월, 왕이 직접 국내의 주와 군과 현을 정하였다. 실직주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군주로 임명하였다. 군주라는 칭호는 이에서 시작되었다.

 

===> 삼국사기에서 이사부에 대한 기록이 처음 나오는 부분이다. 실직이라 하면 지금의 삼척지역을 말하는데 당시 신라의 동해안 지역 군사요충지로서 북방 말갈족이 동해안을 타고 신라로 침입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에 대한 방어사령부였다고 보면 틀리지 않다고 할수 있다. 여기서 잠깐 실직주 사건을 알고 갈 필요가 있다.

451년 눌지왕때  하슬라성(지금의 강릉)의 성주인 삼직이  실직주벌판(현재의 삼척)에서 사냥을 즐기던 고구려 장수를 공격해서 죽인 사건인데  이로 말미암아  고구려 장수왕이 대노하였고  신라 눌지왕은  고구려에게 사죄 사절을 파견하면서  수모를 겪었었다.




  사진설명 신라 경주 호우총에서 발굴된  고구려계 청동그릇.(국립중앙박물관 소장) 
 5세기 초반 신라왕가 무덤에서 발굴된 고구려계 유물로서 당시 고구려는 신라에  상당한 정치군사적 압력을 행사하였다.  당시 신라왕자는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었다.


당시 실직주는 고구려의 신라 영토내 주둔지로 추정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광개토대왕시절  신라의 요청으로 고구려가 5만병력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는 왜를 물리치고 금관가야까지 정벌한 후 일부는 그대로 신라영토내에 주둔하면서  신라에 압력을 가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런과정에서  당연히 고구려군은 신라군보다 우위를 점하였을 것이고 광개토대왕의 신라구원전쟁후 50여년이 지난 시점인 눌지왕대에 이르러서는 신라의  집권층내부에서 반고구려 정서가 싹트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 연장선에서  실직주 사건을 이해하면  고구려가 신라를 구원해 준 400년으로부터 50여년이 지난 후 시점에서 고구려와 신라간의 미묘한 감정변화를 엿볼 수 있다.



사진설명 : 광개토호태왕의 명문이 새겨진 청동그릇 밑면 - 5세기 초반 신라를 침략한 왜를 격퇴한 고구려는 신라에 주둔하면서 정치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하였슴을 짐작케 해 주는 유물이다.


어떻든 이사건 때 신라의 눌지왕은 고구려 장수왕에게  손이 발이 될 정도로 빌고 굴욕을 감내했어야 했다.  충주의 중원고구려비에도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상하 관계를 설명하는 기록이 있다. 이 실직주 사건을 계기로 신라는 고구려의 압력에서 벗어나고자 하였고 고구려와는 전통적으로 적대관계였던 백제와는 가까워 지게 되었으니  나제동맹 형성의 단초는 실직주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 후로도  고구려 장수왕은 수차례 실직주를 포함한 신라의 동해안 북쪽 변경을 공격하였지만 지증왕 6년인 서기 505년엔 실직주는 완전한 신라의 영토가 되었는데 그 기록이 실직주에 이사부를 군주로 임명했다는 기록이다.  기록상으로는 임명이지만  이사부가 실직의 고구려군을 패퇴시켰다고 보는 것이  보다 더 실체적 사실에 접근한다 하겠다.

 

이사부를 실직주 군주로 임명했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이사부가 당시 동북아 최강인 고구려와 싸워 이겼슴을 뜻하고 그로 말미암아  이사부는 고구려군 생리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아는 최고 전문가가 되었다고 봐야 한다. 또한 두말 할 필요 없이 신라내에서 이사부의 군사적 지위는 확고해졌다고 볼 수 있다. 

 

 w 지증왕13년(512년) 여름 6월, 우산국이 귀순하여, 매년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인데, 울릉도라고도 한다. 그 섬은 사방 1백 리인데, 그들은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었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었을 때, 우산 사람들이 우둔하고도 사나우므로, 위세로 다루기는 어려우며, 계략으로 항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곧 나무로 허수아비 사자를 만들어 병선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의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는 거짓말로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를 풀어 너희들을 밟아 죽이도록 하겠다"고 말하였다. 우산국의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

 

 

==> 이 기록이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노랫말의 모체이다. 지증왕 13년에 이사부가 울릉도인 우산국을 귀속시켰다는 내용인데 이 기록을 군사적 측면에서 분석한다면  이사부는 지금의 울릉도까지 정벌 할 수 있는 해상력을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또한 그 당시 울릉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내용으로 볼때 이사부는 단순하게 힘으로 적을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적을 기만하는 지략으로 제압하고 있슴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이렇게 이사부가 해상력을 운용할 수 있기에 선박을 이용해서 동해안지역에 대한 군사적 기동이 용이할 수 있었고  이런 능력은 군사작전에서  지상병력과 해상병력을 함께 이용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확대해석까지 가능하게 한다.  그런 능력이 아사부가 실직주 군주로 임명된 바탕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신라 지증왕 다음왕이  법흥왕(法興王)인데 재위기간 26년(514~540)동안 신라본기 법흥왕조엔 이사부에 대한 기록이 없다가 법흥왕 다음 왕인 진흥왕때 신라본기에 이사부 이름이 다시 등장한다.

 

 w 진흥왕 2년(541년) 봄 3월, 눈이 한 자나 쌓였다. 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임명하고, 중앙과 지방의 군대에 관한 업무를 맡게 하였다. 백제가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청하였다.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 여기서 눈여겨 볼 대목이 이사부를 병부령에 임명했다는 부분이다.  병부령은 법흥왕 4년(서기517년)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진흥왕 2년에 이사부는 병부령이 됨으로써 신라군의 총지휘관이 된 것이다. 이사부가 실직의 군주로 임명된 것이 지증왕 6년인 서기 505년인데 병부령으로 임명된 진흥왕 2년은 541년이다. 그렇다면 무려 36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이때 이사부는 국가원로 대접을 받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백제와 신라의 운명을 갈랐던 관산성 전투는 진흥왕 15년인 서기 554년에 있었으니 응당 병부령인 이사부가 총 지휘를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 된다. 

 

 

w 진흥왕 6년(545년) 가을 7월, 이찬 이사부가 왕에게 "나라의 역사라는 것은 임금과 신하들의 선악을 기록하여, 좋고 나쁜 것을 만대 후손들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를 책으로 편찬해놓지 않는다면 후손들이 무엇을 보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왕이 깊이 동감하고 대아찬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선비들을 널리 모아 그들로 하여금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 이 기록이 고교시절 국사시간에  신라의 국사편찬 [거칠부의 국사]로 암기해야 했던  삼국사기의 바로 그 대목이다.  여기서 보듯이  이사부가 건의하고 그 건의를 받아들여서 거칠부가 행하는 것이기에  직위상  거칠부는 이사부 밑에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q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는 결정적 작전을 입안한 이사부 장군

 

w 진흥왕 11년(550년)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점령했다. 왕은 두 나라 군사가 피로한 틈을 이용하여 이찬 이사부로 하여금 그들을 공격하게 하여 두 성을 빼앗아 성을 증축했다. 군사 1천명을 그 곳에 머물게 하여 수비하게 하였다.

 

==> 신라와 백제가 철천지 원수가 되는 단초가 된 기록이다. 금현성과 도살성은 현재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알순 없지만  여러 정황상 보은의 삼년산성-옥천의 관산성-진천-이천-한강의 신주(이성산성,남한산성)으로 이어지는 중간의 어느지역으로 보여진다. 그만큼 금현성과 도살성은 군사적 요충지라는 것인데 이에 대한 작전도  병부령 이사부가 지휘했음을 알 수 있다.

 

진흥왕 14년인 서기 553년엔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어렵게 되찿았던 백제의 고토인 한강하류지역을 신라가 빼앗았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신라는 신주를 설치하고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인 김무력 신주의 군주로 삼았으니 백제는 공격의 방향을 고구려에서 급속하게 신라로 향하게 된다.  백제의 복수전인 관산성 전투가 벌어지게 되는데  그 기록중엔 일본서기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신라는 명왕(明王)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이 일본서기 기록에 나온 내용은 삼국사기에선 신주의 군주 김무력군이 관산성전투에 합류하고 백제군을 물리친 것으로 나온다. 이런 신라군의 일련의 군사작전의 총지휘자는 당연지사 병부령 이사부이다. 따라서 이사부는 휘하에 김무력과 거칠부를 거느리고 관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실질적 주역이었던 것이다.

 

q 화랑을 적극적으로 전투에 활용하기 시작한 이사부

 

w 진흥왕 23년(562년)

가을 7월, 백제가 변경의 주민을 침탈하였다. 왕은 군사를 보내 싸워서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9월, 가야가 모반하였다. 왕은 이사부로 하여금 그들을 토벌케 하고, 사다함으로 하여금 이사부를 돕게하였다. 사다함이 기병 5천을 거느리고 먼저 전단문으로 들어가서 흰 기를 세우자, 성 사람들 전체가 두려워하여 어찌 할 줄을 몰랐다. 이사부가 군사를 인솔하고 그 곳에 도착하니, 그들이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공로를 평가하는데 사다함이 으뜸이었기에 왕이 좋은 밭과 포로 2백 명을 상으로 주었다. 사다함은 세 번이나 사양하였으나 왕이 강력히 권하므로 포로를 받았다. 그러나 사다함은 이들을 풀어주어 양민을 만들고, 밭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백성들이 이를 훌륭하게 여겼다.

 

==> 진흥왕 23년의 기록이 이사부가 나오는 마지막 기록이다. 특히 이 부분은  가야의 완전몰락을 그리고 있다. 가야는 400년 광개토대왕의 남정으로  가야국중엔 최강국인 김해의 금관가야가 몰락했고  그 후 가야의 리더였던 대가야는 관산성 전투당시 백제편에 서서 신라에 맞서다가 패함으로써 치명타를 입게 된다.  그 관산성 전투이후 8년후인 진흥왕 23년엔  이사부가 지휘하는 화랑 사다함의 활약으로 대가야는 완전히 신라에 무릅꿇게 된다.


실직 군주로서 처음 임명받은 지증왕 6년때인  서기 505년부터 지증왕 23년인 562년까지 무려 57년간을 일선에서 활약안 이사부는 신라를 군사적기반을 닦은 장군이었다. 이사부장군이 일선에서 활약하는 기간동안  굵직굵직한 군사적 사항을 요약해 보면

 

 * 강원도 강릉 삼척지방을 확실하게 신라영토로 확보
 * 병부령을 설치하여 군사지휘권의 일원화 확보
 * 한강하류 지역 확보
 * 관산성 전투에서의 신라군 총사령관으로서 신라 승리
 * 가야지역 신라 영토로 확보

다음글 계속

 

고구려의  나제동맹 이간책과   거칠부 장군의 활약

[ 2010-04-21, 11:2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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