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산성 전투의 口傳 설화
[고성혁의 역사추적] 관산성 전투 8회

고성혁(회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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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성 전투를 보다 리얼하게 보여주는 민간의 구전 이야기들

 

관산성 전투에 대한 기록은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너무도 미약하다. 우리의 가장 오래된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엔 그 결과만을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고 그보다 좀더 자세하게 기록한 일본서기에도 관산성 전투의 전개과정을 속속들이 알려주지는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의외로 우리의 향토 민속자료를 찿아보면 관산성 전투의 사실적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 여러곳에 존재한다. 각 지역마다 구전되어 오는 설화가 바로 그것인데 관산성 전투당시의 전개과정을 유추해보는데는 더없이 좋은 참고사항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1.삼년산성

 

삼년산성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는데 발판이 된 그런 산성으로서 축성시기는 신라 자비마립간13년(470년)이다. 삼년산성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된데는 3년만에 축성을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내외벽 모두 돌로만 축성한 완전한 석축의 산성이다.

 

그 후 소지마립간 8년(486년) 실죽이 3천명의 인부를 징발해서 개축하였다고 삼국사기엔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통일전쟁기인 태종무열왕(재위기간654~661년)이 당나라 사신 왕문도를 이곳에서 영접하였다고 전한다. 특기할 만한 것은 고려 태조 왕건도 이 삼년산성을 점령하려다가 크게 패한 그런 산성이다.

 

삼년산성은 신라가 대백제전을 벌이는데 있어서 중심이 된 산성이자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서서 교두보로서 마련한 산성이다. 이 산성은 워낙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이라서 별도로 다루고자 한다. 백제와 고구려에 대한 전쟁에서 삼년산성은 총지휘본부이자 문경의 고모산성과 더불어 보급지기역할을 한 산성으로 보여진다. 또한 관산성전투당시 백제 총사령관이라 할 수 있는 부여 창의 본부인 환산(고리산)의 위치와 전투 격전지의 전개양상을 볼때는 백제의 공격목표는 바로 이 삼년산성이 아니었나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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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년산성 안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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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년산성에 내려다 본 보은읍 전경

 

2. 굴산성.저점산성

 

 

굴산성과 저점산성이 위치한 옥천군 청성면 산계리는 원래 신라 초에는 굴산현이라 부르다가, 경덕왕 16년인 757년에 기산현이라 고치고, 삼년산군(현재의보은군)의 영역으로 속했던 곳이다. 그만큼 보은의 삼년산성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곳이다.

 

삼년산성이 신라의 중부방면군 군단사령부라면 굴산성은 사단사령부쯤 되는 그런 산성이다. 지도에서 보는바와 같이 삼년산성을 기점으로 하여 굴산성- 영동핏골- 영동 양산으로 이어지는 벨트가 신라의 주 진지라고 할 수 있다.

 

굴산성.gif

 ▲ 굴산성 평면도 : 보루형 관측소 성격의 산성은 산정상부의 일자형 모습을 하는데 비하여 주둔형 산성은 계곡을 포함하는 포곡식 산성으로서 식수를 해결할 수 있다.

 

창(伊滄)과 실죽(實竹)장군이 일선(一善 善山) 지방의 장정 3000명을 동원하여 삼년산성을 개축할 때 굴산성을 함께 수리한 것으로 백제를 방비한 사실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되어 있고 현재도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군사문화재이다. 굴산성은 삼국사기에 축성의 기록이 나오는 몇 안 되는 성중의 하나이며 둘레가 1,500M 나 되는 매우 큰 규모의 산성으로서 지역 거점의 토성이었다.

 

전투형 산성의 본보기라 할 수 있는데 발굴기록에 보면 초기엔 토성이었다가 나중에 석축으로 보완된 것으로 나오고 있다. 굴산성은 산계리토성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현재의 행정지역상 산계리(山桂里)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 산계리 토성 배후에 저점산성이 있는데 이 성은 산계리토성을 엄호하는 배후산성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아무튼 굴산성과 저점산성은 삼년산성의 전방지기로서 신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는 필히 이 지역을 통과하게 되는 지점이고 반대로 백제가 신라의 삼년산성을 공격하기 위해서도 이 굴산성을 필히 격파해야 하는 군사적 목지점에 해당하는 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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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굴산성 동쪽 망대지에서 내려다 본 보청천과 들판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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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군 청성면 일대 보청천을 경계로 하여 신라 백제의 격전을 치룬 굴산성과 저점산성위치

 

 

3.산성과 장군묘

 

청성면 산계리(山桂里)의 마을 설화에 따르면 오랜 세월이 흘러서 그 자취가 거의 희미해진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지만 장군묘라고 전해지는 터가 있는데 장군묘는 봉분이 확실하지는 않다고 한다. 특히 관산성 전투당시로 추정하는 시기에 백제군이 금강과 보청천을 사이에 두고 신라와 여러번 대적하였던 곳이기에 전쟁에서 희생된 장병을 한데 모아서 무덤을 만들어 장군묘라 이름하고 매년 이 무덤에 제사를 지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전쟁터에서 산화한 전몰장병을 함께 장사지낸 무덤이라고 하면 맞을 듯하다. 옥천에서 가까운 금산엔 임진왜란때 왜병에 맞써 싸우던 몰살당한 700의총 무덤이 있듯이 바로 그런 성격이라 할 수 있다. 어떻든 옥천군 청성면 산계리일대는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관산성 전투의 또 다른 격전의 현장임 마을주민들의 구전 이야기를 통해서 알수 있다.

 

굳이 관산성전투의 기록과 연결시켜 보자면 삼국사기 진흥왕 15년에 보면 백제가 관산성을 공격하자 군주 각간인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이들과 싸웠으나 불리하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도 이곳 전투에서 전사하지 않았나 추정해 본다. 왜냐하면 각간이라는 관직은 당시 신라 최고등위 관직인데 이 전투 이후 각간 우덕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것을 본다면 전사한 것으로 봄이 군사적 관점에서 합리적 판단일 것 같다.

 

반면에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가 막지 못한 이 관산성 전투를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역전시킨 것이 크게 부각된 것이 이를 반증한다고 볼 수 있겠다. 정사 삼국사기는 백제 성왕이 죽은 관산성을 부각한 반면에 민간에 구전되는 기록은 관산성이 아니라 삼년산성의 전방기지인 굴산성이 있는 청성면에서 신라와 백제의 대규모 전투가 있슴을 전하는 데 이것이 군사측면에선 더 현실성 있다고 보여진다.

 

4. 충북 영동군 핏골 전설

 

충북 영동군은 옥천 못지 않게 산성이 많은 고장이다. 그 이유야 당연히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역이기 때문인데 성터로는 부용성터·주곡리성터·백화산성·노고성(老姑城)·지촌리성터·대왕산성(大王山城)·장군봉성터·황간읍성터 등 많은 유적지가 충북 영동군에 있다.

 

관산성 전투관련인근지역의 격전 설화로서 옥천군 청성면일대 이야기와 더불어서 지금껏 전해지는 곳이 충북 영동군 각계리 직동의 핏골이야기이다. 흔히 핏골이란 이름이 붙여진 곳은 보통은 임진왜란때거나 한국전쟁때 이름붙여진 곳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충북 영동군 각계리만큼은 백제 성왕이야기를 전하고 있기에 관심을 끈다.

 

핏골_전설.jpg

 

그림 : 옥천과 영동일대 주요 산성과 격전지 그리고 구전설화가 전해지는 곳 표시

 

충북 영동에서 북쪽으로 약 7km 떨어진 심천면 각계(覺溪) 2리의 직동이 바로 그곳인데 한자로 고쳐쓰면 혈곡(血谷)이다. 혈곡이나 핏골이나 결국은 같은 말이 되는데 이 곳 지형은 금강 상류인 초강(草江)이 마을 앞을 흐르고 마을은 온통 산으로 에워 싸여 있는 누가 봐도 군사상 요충지라 할 만한 장소이다. 지리적 특징은 옥천군 청성면 산계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곳에서 그 옛날 백제와 신라군이 혈투를 벌여서 계곡이 피로 물들었다하여 핏골이라 불리워 졌다 하는데 이곳 설화는 백제 성왕이 이곳에서 죽은 것으로 전하고 있어서 이채롭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이곳이 옥천에서 영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이기도 하고 백제의 금산에서 삼년산성을 가는데도 길목을 차지하고 있는 천혜의 요세지란 점이다. 그런 이곳에서 관산성 전투당시 백제와 신라의 혈투가 벌어졌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는 것은 충분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할 부분이다. 충북 영동군 심천면 각계리의 핏골 전설은 의외의 단서를 전해주고 있는데 그것은 흔히 말하는 관산성 전투는 관산성에서만의 전투가 아니라 옥천과 영동의 다 방면에 걸친 대규모 전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 백제의 양군 합해서 6만여 대병력이 충돌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에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5. 어서실 전설

 

관산성 전투의 핏골 전설이 내려오는 영동군 심천면 각계리 바로 뒤쪽으로 이어지는 영동읍 부용리의 어서실 전설이다. 이것 또한 신라와 백제간의 전쟁에 얽힌 이야기이다. 그 시기는 정확히 어느왕때인지는 전하지 않고 있다.

 

영동읍의 어서실은 작곡산성(昨谷山城) 부근에 있는 한 골짜기에 불과한데 백제군의 공격으로 신라는 수세에 몰려서 이 곳 작곡산성까지 밀리고 말았다. 그래서 작곡산성(昨谷山城)을 맡고 있는 신라장군은 서울(경주)로 사람을 보내어 왕의 긴급 지원요청을 하였다. 지칠대로 지친 신라병사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것은 신라 경주로부터 지원군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거는 것 밖에는 없었던 형편이었다.

 

전방의 긴급지원 소식을 듣고서 신라왕은 곧 격전지를 향해서 출발하였고 이 소식은 작곡산성 뿐만아니라 인근의 신라진영에 소문이 나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인근 산성의 신라 장군들도 왕에게 청하기를 자신들의 산성에도 들려서 군사들을 위무해 달라고 간청이 쇄도하게 된 것이다. 스케쥴(?)상 입장이 난처해진 신라왕은 작곡산성인근인 현재의 영동읍 부용리에서 잠시 들러서 전황을 살피고 군사를 위무하고 돌아갔다 한데서 왕이 앉았던 자리라 하여 어좌(御座室)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온다 한다. 어좌실 발음이 점차 변하여 어제실 혹은 어서실이라 불리워 진다고 한다.

 

그런데 필자는 이 어서실 이야기의 주인공을 진흥왕 아닌가 추정해 본다. 왜냐하면 신라왕으로써 전투인근지역까지 순행하고 직접 병사들을 격려한 왕은 백제성왕의 라이벌인 진흥왕과 그 다음은 통일전쟁시기의 태종무열왕과 그 아들인 문무대왕이 대표적인데 바로 이 지역에서 신라가 백제에게 밀렸던 시기와 왕의 순행과 겹치는 왕은 진흥왕이기 때문이다.

 

진흥왕 순수비가 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하지 않나 하는 조심스런 판단도 해 본다. 삼국사기 진흥왕조에 보면 관산성 전투 바로 이듬해에 낭성(청주 혹은 충주)을 순행하면서 가야출신의 우륵의 가야금 곡조를 듣는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어찌되었건간에 영동 핏골전설과 더불어서 어서실 전설은 백제와 신라의 격전상황을 전해주는 귀중한 민간구전 이야기임은 분명하다.

 

6.양산가 [陽山歌] 전설

 

양산가는 영동군 양산면에서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충북 영동군 양산면은 원래 삼한시대에 마한에 속했던 곳이고 삼국시대 신라가 팽창하던 시기엔 충남 금산과 충북 양산은 국경지대로서 신라와 백제간의 치열한 전투가 끊이지 않았던 그런 곳이다.

 

산성으로 이야기 한다면 현재의 양산면을 통해 흐르는 금강 상류를 중심으로 한 양산(陽山)이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으로, 대왕산은 신라의 영토였고, 비봉산(飛鳳山)의 조천성(助川城)은 백제의 전초기지였다.

 

신라는 조천성을 공격하기 위해 655년(무열왕 2) 김흠운(金歆運)을 이 곳에 파견했으나, 그의 군대는 밤에 백제군의 기습을 받아 김흠운은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양산가〉를 지어 그를 추모했는데 이것이 ≪삼국사기≫에 전해오는 〈양산가〉의 유래이다.

 

시기가 불분명한 다른 전설에 비하면 이 양산가 전설은 그 시기와 내용이 분명한 이야기이다. 물론 이 양산가는 관산성 전투와는 관계가 없으나 금산에서 영동으로 이어지는 길이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는 중요 루트임을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라는 점이다. 병력의 배치뿐만 아니라 공격의 방향과 방어진지의 구성은 전투 재구성의 3대 포인트라는 점에서 양산가 이야기는 매우 유용한 군사분석의 요소가 된다.

 

충북 영동군이 얼마만큼 신라와 백제의격전장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 하나는 금산에서 양산면을 거쳐서 영동으로 이어지는 길은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는 중요 루트임을 알 수 있다. 현재도 충청도에서 경상도지역으로 가는 길은 대전에서 옥천을 통과하는 방법과 금산에서 영동으로 이르는 길이다.

 

7. 식장산(食臟山) 유래

 

식장산은 해발 580m의 대전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산으로, 충북 옥천군 군서면과 군복면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이다. 백제시대 성을 쌓고 군량을 많이 저장하고 신라침공을 방어하던 요새지였다는 기록에 연유하여 식장산이라 불렀다는 유래와, 먹을 것이 쏟아지는 밥 그릇이 뭍혀 있다 하여 식기산(食器山) 또는 식장산(食欌山)이라 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 산이다.

 

이렇게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식장산은 백제가 신라와 대적할 때 군수기지역할을 하던 곳이다. 또한 식장산 인근의 성티산성은 백제군의 주요 주둔 진지로서 백제산성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산성이 이다. 이 산성은 현재의 대전에서 옥천 군북면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딱 버티고 있는 지리적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8. 백골산(白骨山) 전설

 

백제 성왕의 아들 부여 창이 쌓았다는 환산(고리산)의 뒤쪽에 위치한 산인데 이곳 사람들 전설에 의하면 관산성 전투당시 이곳에서 백제군이 신라군에 포위되어 완전히 궤멸된 그런 곳이라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 신주의 군주 김무력군에 의해서 백제의 2만 9천7백여명이 몰살되었다고 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래서 백골산이라 전해진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치 로제타석의 비밀을 푼 클레오파트라의 코를 찿은듯한 짜릿한 전율감을 맛 보았다. 관산성 전투를 종결한 바로 그 지점이 이곳 백골산이다.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현재 관산성보다는 이 백골산이 더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 주는 곳이다. 왜냐하면 역사기록에 보면 백제군이 신라군에 포위되었다고 하는데 이 백골산의 위치가 바로 백제의 지휘본부라 할 수 있는 백제 부여창이 머물던 환산의 바로 뒷산이기 때문이다.

 

즉 신라의 김무력군은 신주의 군사를 이끌고 도살성을 거쳐서 내려오면서 백제의 배후를 공략한 것임을 증명해 주는 단서이기 때문이다. 지도에서 보는바와 같이 관산성 너머 신라군만 바라보던 백제군에게 뒤에서 습격해오는 신라군에게 퇴로를 차단당했으니 그것이 바로 포위가 아니고 무엇이랴?

[ 2010-04-28, 09:3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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