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굴밤나무는 天壽(천수)를 누리고, 노래 못하는 거위는 죽고-
살기 힘든 인간 세상

張良守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세상을 탓하면 못난 사람의 변명밖에 안 될 것이고, 내 不德(부덕)의 소치라 해야겠지만 나는 1980년 갓 마흔 나이에 천직으로 알고 있던 회사에서 강제 해직이 되어 일조에 거리에 나앉게 되었었다. 나도 凡人(범인)이라, 내 잘못은 모르겠고 남한테 못할 짓 안 하고, 별나게 모난 짓 안 하고, 나름으로 사람답게 산다고 살았는데—. 그렇게 살아도 이런 일을 당한다면 내 같은 사람은 이 땅에서 살 수 없다는 것 아니냐 하는 생각에 절망감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나날이, 매일이 한가한 날이 되어 버린 나는 인생살이에 어떤 單答式(단답식)의 정답은 없다 하더라도 이 세상을 좀 더 지혜롭게 사는 방법은 없을까를 생각했다. 그러다 읽기로 한 것이 《老子(노자)》와 《莊子(장자)》였다. 원전을 그대로 읽기에는 내 한문 실력이라는 것이 그 문턱에도 못 미치고, 그래서 몇 권의 번역서와 해설서를 곁에 두고 읽었다.
  
  그런 마음에서 읽다 보니 제일 먼저 눈을 끈 것이 《莊子》 「人間世(인간세)」에 나오는 한 구절이었다. 莊子는 거기서 어떤 곳에 자라고 있는 가래나무(楸·추)와 잣나무(栢·백)와 뽕나무(桑·상) 이야기를 했다. 그는, 그 나무들은 자라는 대로, 어느만큼 크면 말뚝을 만들려고, 좀 더 크면 들보를 만들려고 베고, 아주 成木(성목)이 되면 棺(관) 짤 판자로 쓰려고 베어, 모두 天壽(천수)를 누리지 못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有用(유용)한 것은 이 세상에서 명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莊子는 또, 같은 「人間世(인간세)」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하고 있었다. 曲轅(곡원)이라는 곳에 둘레가 백 아름이나 되고 높이가 산을 내려다 볼 만큼 큰 굴밤나무가(櫟· 역)가 있어 사람들이 모두 대단하다고 감탄을 했다. 그런데 石(석)이라는, 이름난 목수는 그 나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래, 그의 제자가 그 이유를 물으니 그는 “그것으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을 것이고, 棺을 만들면 빨리 썩을 것이다. 또 그것으로 그릇을 만들면 쉽게 부서질 것이고, 문을 짜면 나무진이 베어 나올 것이며 기둥을 세우면 좀이 먹을 것이다. 그 나무는 아무 쓸모가 없어 그렇게 오래 산 것이다”고 했다 한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는 無用(무용)한 것이 제 명을 다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구절들은 내게 특별한 호소력을 갖지 못했다. 확실히 사람이, 능력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조심을 해도 시기와 모략을 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사람이 무능하면 이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가 어렵다. 우선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는 것도 참기 힘든 일이고, 그 이전에 그런 사람은 결국 낙오가 되는 것이 필연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도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다.
  
  그러면 알면서도 모른 척, 능력이 있어도 없는 것처럼 살아야 하나?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고, 해야 할 일은 하고 안 할 일은 안 하는 것이 인생살이이지, 슬슬 눈치나 보고 坐板(좌판)의 어묵처럼 납작 엎드려서 伏地不動(복지부동)으로 살아야 하나? 한 번 태어나서 한 번 사는 세상인데, 그렇게 산다는 것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지, 어디 사람의 삶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하는 懷疑感(회의감)만 커져 갔다.
  
  그런데 더욱 황당한 것이, 바로 그 莊子가 같은 책 《莊子》 「山木(산목)」에서는 또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莊子가 친구 집을 방문했는데, 주인은 귀한 손님이 왔다고 거위를 잡으라고 했다. 그 집 아이가, 거위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잘 울고 한 마리는 울지 않는데 어느 것을 잡을까를 묻자, 주인은 울지 않는 것을 잡으라고 했다 한다. 그러니까 그 거위는 ‘無用’이 탈이 되어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莊子의 제자가 산속의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天命(천명)을 다 할 수 있었는데 지금 이 집의 거위는 쓸모가 없어서 죽게 되었으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에 대해 莊子는 쓸모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중간을 택해, 얽매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쓸모 있음과 없음의 중간이란 비슷하면서도 비슷하지 않아 인간은 얽매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했다. 이어서 저 자연의 道(도)에 의거하여 속세를 떠나 떠돌아다니는 자는 그렇지가 않아, 영예도 없고 비방도 없고, 혹은 용이 되고 혹은 뱀이 되어 때에 따라 변화하면서 한곳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했다. 한 마디로 道에 따라 살면 이 세상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편안한 생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야기는, 그럼 道란 무엇인가에 되돌아가게 된 셈이다. 그래서 《老子》에서 道에 대한 구절을 찾아보니, 그 제일장 첫머리에서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라고 하고 있었다. 곧 道를 말로 하면 이미 道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道는 너희가 스스로 깨달아 터득하는 것이지 설명해서 알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그, 老莊思想(노장사상)에서 ‘현명하게 사는 방법’ 찾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道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내 같은 사람은 더욱 그, ‘때에 따라 변화하면서 사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거기에도 세상살이에 대한 정답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사람답게, 최선을 다해서 살되 무엇이든지 내 앞에 닥치는 것은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이자’ 하고 이날까지 살아왔다.
[ 2014-02-28, 10:4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리버티헤럴드  |  뉴스파인더  |  이승만TV  |  장군의 소리  |  천영우TV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