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뜻에 목숨을 바친 사람들
義俠(의협) 忠臣(충신) 이야기

張良守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아래의 ‘樊於期’ 의 ‘於’는 발음이 ‘어’가 아니고 ‘오’입니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正義(정의)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사람을 ‘義俠(의협)’이라고 하고 王(왕), 곧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치는 사람을 忠臣(충신)이라고 한다. 동서고금 세계사에는 그런 義俠, 忠臣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 오늘은 그 중에서 내가 특히 감동을 느낀 두 세 사람의 行狀(행장)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내가 30대 나이에 읽고 크게 충격을 받은 그런 유의 이야기 중 하나는 司馬遷(사마천)의  《史記》 「列傳(열전)」에 나오는 인물들의 그것이었다. 秦始皇(진시황)이 되기 전의, 秦(진) 나라 왕 政(정)은 사방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원한을 사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燕(연)나라 태자 丹(단)이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자신에게 오랫동안 신세를 지고 있은 荊軻(형가)라는 사람이 있었다. 丹이 그에게 政을 처치하고픈 자신의 한을 말하자 荊軻는 선뜻 자신이 그 일을 맡겠다고 했다. 그러나 政에 대한 경계와 경호가 워낙 삼엄해 그에게 접근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그 나라에는 政에게 원한을 가지고, 그를 해하려다 실패하고 燕나라에 피신해 와 있는 樊於期(번오기)라는 장수가 있었다. 이에 荊軻가 그를 찾아가 ‘그대의 목이 있으면 政의 引見(인견)을 허락받아 그를 처단할 수 있겠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했다. 이에 樊於期는 ‘드디어 나의 원수를 갚을 기회가 왔다’ 하고는 스스로 자기의 목을 찔러 죽어 荊軻가 머리를 가져가게 했다.

그리하여 荊軻는 政을 만났으나, 그는 義氣(의기)만 앞섰을 뿐 刀劍(도검)을 쓰는 데에는 서툴러 政의 암살에 실패해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일의 시말은 그렇게 되었지만 그 이야기를 읽었을 때 나는, 뜻을 세우고 그 뜻에 따라 살고 죽는 인간의 모습에 숙연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역사에도 굳이 安重根(안중근), 尹奉吉(윤봉길) 의사를 들 것도 없이, 수없이 많은 충신열사들 이야기가 있다. 史學(사학) 쪽에는 문외한인 나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다. 그러면서도 이 자리에서 꼭, 그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사람이 한 사람 있다. 高麗(고려)의 개국공신이자 忠義(충의)의 인물 申崇謙(신숭겸 ? ~ 927) 장군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新羅(신라) 왕족 출신으로 泰封國(태봉국)을 세운 弓裔(궁예)가 폭정을 일삼자 주저하는 王建(왕건)에게 적극적으로 권하여 弓裔를 왕좌에서 몰아내고 王建으로 하여금 高麗를 세워 그 왕위에 오르게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나라가 서게 되면 어디서나 있는 이야기이고 ―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의 그의 행적이다.

927년 王建 군은 지금의 大邱(대구) 公山(공산) 아래서 後百濟(후백제)의 甄萱(견훤) 군과 접전을 벌였는데 高麗 군이 완전 포위되어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그때 申崇謙은 자신의 외모가 王建을 닮았다는 데 착안하여 자신이 그의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전군을 이끌고 포위망을 뚫고 도망치려 하는 것처럼 해 적군이 자신을 쫓는 사이에 王建이 死地(사지)를 벗어나게 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申崇謙과 高麗 군은 後百濟 군에게 전멸했지만 그 덕분에 王建은 목숨을 구해, 9년 후 마침내 後三國(후삼국)을 통일해 500년 역사의 高麗를 세웠다.

그런데 나는 그 역사적 사실과 관련이 있는 한 地名(지명)을 들으면서 일종의 배신감, 허망감 같은 것을 느낀 적이 있다. 大邱市(대구시) 東區(동구)에는 安心洞(안심동)이라는 이름의 행정동이 있다. 당시 王建이 간신히 적의 포위망을 벗어나 새벽달빛으로 길을 더듬어 그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안전을 확인하고 ‘마음을 놓은(安心) 곳’이라 하여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이름이 그렇게 전해져 오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거기서 君王(군왕)이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이기적이며 비정한 사람들인가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럴 때, 아무리 왕이라지만 王建이 자기 한 사람을 살리려고 스스로 미끼가 되어 생죽음을 당한 申崇謙 등 장병들을 생각하고 통곡을 해야 옳았던가 ‘이제 살았다’ 하고 ‘안심’을 해야 옳았던가는 한 번 생각해 볼 일이 아닐까 한다.

이제부터는 부질없는 내 생각인데―, 申崇謙이 만약 저승에서 그것을 알았다 해도 아마 그는 웃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자기희생은 단순히 왕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와 같이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던지는 사람에게는 후세의 명성 같은 것도 우스운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전쟁을 치르고 있으면, 뜻 있는 將帥(장수)들은 어떻게 해서든 하루빨리 이 전란을 끝내야 하겠다는 마음에 쫓기게 된다 한다. 그들은, 軍糧(군량)을 내랴, 軍布(군포)를 바치랴 농사짓고 길쌈한 것 다 뺏기고 자식은, 이제 다 키웠다 싶으면 끌려 가 창칼에 찔려 죽고 ―  하는, 백성을 그런 지옥에서 구하고 싶은 열망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그때 王建이 죽었다면 당시의 세력 분포로 보아 40 년 넘게 계속된 後三國의 내전은 다시 혼전으로 접어들어 한반도는 언제까지 전쟁지옥이 될지 모를 일이었고 申崇謙은 그것을 생각해 자신의 몸을 던져 그런 불행을 막으려 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만약 그러한 내 생각이 맞다면 申崇謙같은 이야말로 진정으로 백성을 생각한 참다운 義俠, 참다운 忠義(충의)의 인물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 2014-03-11, 14:5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리버티헤럴드  |  뉴스파인더  |  이승만TV  |  장군의 소리  |  천영우TV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