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高僧(고승) 智曉(지효) 스님 이야기
大義(대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진 사람

張良守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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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가끔 옳은 일을 위해 자기 몸을 희생한 殺身成仁(살신성인)의 인물들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들어 알고 있는 그런 인물들 중 한 사람이 智曉(지효) 스님이다. 내가 그분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1989년 봄쯤이었던 것 같다. 梵魚寺(범어사)에서 佛法(불법)을 강론하고 있는 觀照(관조)라는 스님을 만나 그 절에 머물다 간 新羅(신라)시대의 義湘(의상), 朝鮮(조선)시대의 樂安(낙안), 해방 전후의 東山(동산) 스님같은 高僧(고승)들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그는 지금도 이 절에는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존경할 만한 큰 스님 한 분이 계신다고 했다.
  1909년 平安南道(평안남도) 생인 智曉 스님은 俗姓(속성)이 金(김)씨로, 불교계에서는 신비의 인물처럼 되어 있다. 그는 1943년 비교적 늦은 나이인 34세에 梵魚寺로 찾아와 佛僧(불승)이 되었다. 그는 그 전에 독립운동을 했었다는 말이 있었으나 아무도 그것을 확인할 수 없었다 한다. 어쨌든 그는 남다른 용맹정진으로 修行(수행)을 해 다섯 번이나 梵魚寺의 주지를 지냈다.
  그런데 觀照 스님이 그를 존경할 만한 현대의 高僧이라고 한 이유는, 그런 사실과는 다른 데에 있었다. 觀照 스님은 그 분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한국 불교 曹溪宗(조계종)의 派爭(파쟁)을 종식시키고 불교를 淨化(정화)하는 데 몸을 바친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한국 불교 曹溪宗은 해방이 되고부터, 자기 한 몸으로 佛道(불도)를 닦는 比丘僧(비구승)과 절에서 처자를 데리고 사는 일명 火宅僧(화택승)이라고도 하는 帶妻僧(대처승)이 절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가열한 분쟁을 벌여왔었다. 1953년에는 당시의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이 그 심각성을 알고 직접, 사찰은 比丘僧들에게 맡기고 帶妻僧들은 절에서 떠나라는 담화까지 발표했으나 그런 말에는 아랑곳없이 싸움은 더욱 격렬해져 갔다. 그러다 급기야는 1955년 6월 9일, 帶妻僧들이 폭력배들을 동원해 서울 曹溪寺를 점거하고 기물을 부수고 比丘僧들에게 폭행을 가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그 이튿날도 그 절 법당에서 양측이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맞서 있었다. 그때, 智曉 스님이 그들 앞에 나섰다. 양측은 그 스님이 자기주장을 펴려니 하고 지켜보고 있었다. 智曉 스님은 사람들의 예상대로 왜 比丘僧이 이 나라의 불교를 맡아야 하는가 하는 當爲性(당위성)을 설명했다. 사람들의 의표를 찌른 놀랄 만한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말을 끝낸 智曉 스님은 그 자리에서, 준비해 온 칼로 자신의 배를 갈랐다. 內臟(내장) 臟器(장기)가 쏟아져 나오자 사람들이 방석으로 덮어 누르고 리어카에 태워 인근 병원으로 급히 옮겨 치료를 받게 했는데, 그는 기적처럼 목숨을 건졌다.
  智曉 스님의 그 ‘爲法忘軀(위법망구)’ 곧 佛法을 위해 자신의 몸을 잊는 ‘殺身供養(살신공양)’으로 帶妻僧들은 절에서 떠나고, 장장 10 년 넘게 끌어오던, 한 나라의 대통령이 나서도 그치지 않던 불교계의 분쟁은 일단락이 나,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智曉 스님은 1989년 속세의 나이로 80세에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한 동안 그 분의 행적에 대해 이야기들을 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 분의 茶毘(다비) 때 舍利(사리)가 나올 것인가, 나온다면 어떤 색깔을 한 어떤 것이 얼마나 나올 것인가, 또 혹시 안 나오는 것은 아닌가로 말들이 분분했다.
  나는 舍利 이야기만 나오면 저, 중세 유럽 기독교도들의 미신 생각을 한다. 그 사람들은 聖遺物(성유물)을 가지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리스도가 쓴 가시관, 그 분이 흘린 聖血(성혈), 그 분이 못 박혔던 십자가의 나뭇조각 같은 것을 찾아 혈안이었다 한다. 그뿐 아니라 유명한 승려가 죽으면 그 머리카락, 손톱, 이빨, 손가락, 팔, 발, 머리 등 시신의 잘라낼 수 있는 부분은 모조리 잘라가 이름 있는 승려로 五體(오체)가 온전히 무덤에 묻힐 수 있은 사람은 극히 운이 좋은 경우였다 한다. 나는 佛心(불심)이 없어 그렇겠지만 어떤 모양의 舍利가 얼마 나왔느니 하는 것이나, 중세의 그 서양 사람들의 미신이나 뭐 다를 것이 있겠는가, 하고 있다.
  智曉 스님에게서는 舍利가 나오지 않았다 한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도 덤덤했다. 그 사람의 산 내력이 중요한 것이지 그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 얼마 후 觀照 스님을 만났을 때 그는 다시 한 번 智曉 스님 이야기를 했다. 그는 무소유, 무소유 하지만 그분 같이 무소유의 삶을 살다 간 사람도 드물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 분의 靈軀(영구)를 모셔내고 나니 그분의 僧房(승방)에는 깔고 덮던 요이불과 베던 木枕(목침) 하나만이 남더라.”고 했다.
[ 2014-04-05, 12:0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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