行雲流水(행운유수) - 거 좋겠다고 집을 나섰다가…
俗世(속세) 인연이 얼마나 질긴가만 확인하고-

張良守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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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릴 적부터 유달리 불교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뭐, 그렇다고 중이 될 생각 같은 것은 없었고 막연히 스님들의 삶에 대한 憧憬(동경)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마음은 자라면서 이런저런 불교 관계 책이랑 高僧(고승)들의 행적에 대한 글들을 읽으면서 더욱 커졌다. 특히 나 같은 凡人(범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큰스님들의 생각, 그 분들의 삶이 나를 더없이 매혹시켰다. 지금도 잊지 않고 있는 몇 가지 그 분들에 얽힌 逸話(일화)를 이야기해 보겠다.

道(도)의 경지에 이른 스님은 자신의 죽음까지 당기고 늦춘다고 한다. 세월이 많이 지난 이야기인데, 梁山(양산) 通度寺(통도사) 서쪽 白蓮庵(백련암)에 性谷(성곡)이라는 스님이 있었다. 어느 해 섣달 그믐날, 그 스님이 上座(상좌)에게 “내가 오늘 涅槃(열반)에 들려 하니 그리 알아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上座는 슬픈 마음에, “하필 오늘 같은 날에 돌아가셔서 설날에 장례를 치르게 하려고 그러십니까?”라고 했단다. 그러자 그 스님, “네 말 들으니 그것도 그렇구나. 그럼 대엿새 뒤로 하도록 하지” 하더니 정월 초이레에 入寂(입적)을 했다 한다.

스님들의 세계에서 또 한 가지 매력적인 것은 그분들의, 무엇에도 얽매임이 없는 삶이었다. 그 분들은 흔히 雲水行脚(운수행각)이라 하여 悟道(오도) 곧 깨달음을 얻기 위해, 妄念(망념)과 迷惑(미혹)에서 벗어나 자신의 佛性(불성)을 찾는 見性(견성)에 이르기 위해 바랑 하나를 지고 발길 닿는 대로 흐르는 구름처럼, 물처럼 이 山河(산하)를 떠돈다고 한다. 개울을 건너고 산을 넘어 가다 배가 고프면 아무한테서나 밥 한 술 얻어먹고, 또 걷는다. 그러다 해가 지면, 가까이에 있는 절이나 암자로 가 거기서 잔다. 이도저도 없으면 자기 한 몸 비집고 들어갈 만한 暗窟(암굴) 같은 곳을 찾아 거기서 하룻밤 눈을 붙인단다. 그렇게 가다가 아프면, 병이 나면 - 그래도 가는 데까지 가 본단다. 그러다, 아주 氣盡(기진)하면, 거기서 미련 없이 대자연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산길에는 간혹 율무가 소복이 자라고 있는 곳이 있다고 한다. 스님들의 念珠(염주)는 주로 율무 열매로 만들기 때문에 그런 곳은 언젠가 어느 스님이 거기서 세상을 떠나 그 분의 念珠가 싹이 나 자란 곳을 뜻한다고 한다. 그래서 스님들은 가다가 그런 곳을 만나면 거기서, 이승에서 자신과 만난 적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그 求道(구도)의 벗, 道伴(도반)의 극락왕생을 위해, 바랑을 벗어 놓고 목탁을 치면서 염불을 하고 간다고 한다.

바쁜 나날을 살다 보니, 어느 듯 나는 그런 스님들의 세계 같은 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다 1980년 세상이 크게 요동칠 때 나는 말만 들어도 섬뜩한 肅淸(숙청)을 당해 一朝(일조)에 失業者(실업자)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解職(해직)된 사람은 취업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더욱 언론사에 있던 사람은 나라 밖으로 나가서도 안 된다고 하니, 나의 절망감은 말할 수 없이 컸다.

그 때 문득 스님들의 그 雲水行이 생각났다. 風餐露宿(풍찬노숙)은 아니더라도 배낭 하나 지고 모든 것 훌훌 털고 어딘가로 지향 없이 떠나 보고 싶었다. 그래서 대강 백두대간을 따라 동해안 쪽으로 내려와 보리라 하고 며칠이 될지, 몇 달이 될지 기약도 하지 않고 집을 나섰다. 그러면, 스님들처럼 무슨 큰 깨달음을 얻지는 못 하더라도 어쩌면 높은 산, 맑은 바람에 내 속에 켜켜이 쌓인 이 세상에 대한 원망, 인간에 대한 미움 같은 것이 날아가 내 영혼이 좀 더 깨끗해질지도 모르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에서였다.

아직도 한 겨울 날씨인 2월 어느 날, 江原道(강원도) 麟蹄(인제)에서, 꽁꽁 언 1,000미터가 넘는 寒溪嶺(한계령)을 넘어 오다가 나는 문득 무언가 내가 크게 잘 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자연 속에서의 ‘絶對自由(절대자유)’의 경험 - 그것은 어림없는 착각이었다. 세상, 인간에 대한 미움, 원한, 앙금은 산을 넘어도, 내를 건너도 조금도 떨어져 나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 내 마음속에 그때까지 나도 몰랐던 미묘한 것이 있었다. 내 하루의 생각은, 처음에는 원한, 증오의 감정에서 시작하는데 그것은 잠시고, 그 다음에 왈칵하고 불시에 밀려오는 것은 언제나 떠나온 세상, 두고 온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갈 바를 모르고 있는 나에게 ‘이래 봐라, 저래 봐라’ 하던 집안 형, ‘조급하면 안 된다. 느긋이 기다려라’고 하던 한 사회 선배,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갈밭의 게처럼 계속 활로를 찾아 움직여야 하다’고 하던 대학동창, ‘소주 먹지 마라. 그러면 폐인 된다’ 그 한 말씀만 하시던 대학 은사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결론은, ‘나라라는 큰 판이 흔들릴 때는 아무 죄 없는 사람도 깨어지고 다치기 마련인데 나는 거기서 조금 상처를 입었을 뿐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 상처는 나아 아물 것이다. 돌아가자. 세속적인 삶이 몸에 배인 내 같은 사람은, 넘어지고 엎어지고 찍고 볶고 하더라도 사람들 속에서 살지 않을 수 없다’ 하는 것이었다.

마음을 그렇게 먹으니 한시가 바쁠 정도로 내가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래서 한 어설프기 짝이 없는 낭만적 求道者(구도자)는 江陵(강릉)에서, 집을 나선지 나흘이 못 되어 가장 빨리 출발하는 차표를 달라고 해서 釜山(부산)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탔다. 行雲流水 - 역시 나 같은 俗人(속인)은 그런 말을 함부로 입에 담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그렇게 나서는 것도 아니었다.

[ 2014-05-02, 16:2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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