幼年(유년)의 나를 울린 슬픈 軍歌(군가)
江 이쪽에서 한, 對岸(대안)의 6·25 체험

張良守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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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慶尙南道(경상남도) 昌原市(창원시) 北面(북면), 우리 집 앞으로는 面을 남북으로 縱斷(종단)하는 도로가 나 있다. 6·25사변 당시 우리 쪽이 한창 밀리고 있던 8월, 당국은 그 도로의 서북쪽은 接敵地域(접적지역)이라 하여 피난을 가게 하고 우리 집이 있는 동남쪽은 그대로 있게 했다. 휴전이 될 때까지 아군은 거기서 더 이상 밀리지 않았으니까 전쟁은 바로 우리 집 마당 앞에까지 왔다가 간 셈이다.

전투는 우리 집에서 20킬로미터 쯤 떨어진 곳에서 벌어져 낮에는 대포 소리, 콩 볶듯 한 기관총 소리가 들리고 밤이면 昌寧(창녕)·靈山(영산) 어디에서 격렬한 포격전이 벌어진 듯, 계속해서 폭발음이 들리면서 그 쪽 하늘이 온통 벌겋게 변했다. 그러나 우리 집은 어느 정도 그곳과 떨어져 있어 나는 전투를 하는 것은 물론, 그 싸움으로 죽거나 다친 사람을 본 적도 없다. 그러나, 戰場(전장)에서 상당히 먼 후방의 열 살, 철없는 소년도 이제 와 생각하니 아련한 그리움이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그 전쟁으로 인한 쓰리고 아픈 경험을 했다.

銃砲(총포)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리고부터 세상은 며칠 사이에 완전히 달라졌다. 洛東江邊(낙동강변), 10여 호의 寒村(한촌)이던 우리 마을은 갑자기 밀어닥친 피난민들이 산에서 나무를 베어오고 들에서 억새를 베어와 急造(급조)한 움막으로 하루 사이에 왁자한 難民村(난민촌)이 되어 버렸다. 매일이 노는 날인데, 마침 피난 온 애들이 거의 모두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이라 그 애들과 어울려 노는 것 하나는 신났다. 장난감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으니 우리들의 놀이는 주로 彈皮(탄피) 치기였다. 엠원·칼빈·포티 파이브 권총, 때로는 북한군의 九九式(구구식) 소총 ․ 따발총 彈皮로 ‘구슬치기 식’의 ‘따 먹기’를 했다. 나는, 친구들을 이겨 아무짝에도 쓸 데 없는 그, 총알 껍데기를 딴 날 밤에는 내가 부자가 된 꿈을 꾸기도 했다.

당시에는 하늘도 가끔 우리를 긴장하게 했다. 우리 마을 위 하늘로는 수시로 비행기가 오갔다. 마을 앞으로 흘러가고 있는 洛東江은 조종사들에게는 戰場을 찾는 좋은 指標(지표)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우리 마을 앞, 강에서 오른 쪽으로 몇 분만 가면 昌寧·靈山 戰線(전선)이고 왼쪽으로 몇 분만 가면 宜寧(의령)·咸安(함안) 戰線이었기 때문이었다. 형들은 전투기의 기본 編隊(편대)는 4대씩인데 만약 돌아오는 전투기의 編隊가 4대, 8대, 12대 식으로 4 대씩의 짝이 안 맞으면 그 4대에서 부족한 숫자의 전투기는 십중팔구 격추 당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날개 양 끝이 볼링 공 같이 생긴 세이브 제트기나, 엄청나게 시끄러운 소리를 내던 무스탕 프로펠러기 編隊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그 숫자부터 세었다. 그리고 그 編隊가 4대씩이 맞으면 눈물이 핑 돌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친구가 “우리 삼촌이 그러는데, 북한은 비행기도 없고, 있어도 유엔군 비행기한테는 상대가 안 돼 뜨지도 못 한다면서,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하더라.”고 해 그 뒤로는 그, 전투기가 짝 안 맞을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어느 날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 유엔군이 仁川(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진격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유엔군 사령부는 金日成(김일성)에게 더 이상 버텨도 소용없다면서, 항복을 촉구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難民村 쪽이 떠들썩하더니 얼마 후에는 앙상한 움막들만 남겨 놓고 그 많던 피난민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신나는 일은 계속되었다. 하루는 場(장)에 갔다 온 어른들이 우리에게 ‘니그들, 아무 날부터 학교 오라 카더라’고 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다시 학교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에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다 운 좋게도, 그 전에 가설극장에서 본 서커스가 문제가 아닌 신나는 구경을 했다. 우리 집에서 2킬로미터 쯤 떨어진 곳에 馬金山溫泉(마금산온천)이 있었다. 우리는 거기서 한 무리의 美軍(미군)들을 보았다. 그들은 목욕을 하고 나온 듯, 캔에 든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 네댓 명 중 한 사람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자기들을 보고 있는 우리, 조무래기들을 손짓으로 한쪽으로 물러서라고 했다. 그러더니 그 중 한 명이 방금 자신이 마신, 빈 콜라 캔을 공중 높이 던져 올렸다. 그러자 곁에 서 있던 다른 한 명이 눈 깜짝할 사이에 허리에서 권총을 뽑더니 ‘탕!’ 하고 공중에 떠 있는 그 캔을 쏘아 맞혔다. 총알을 맞은 캔은 거기서 1 미터 정도 하늘로 튀어 올랐다. 그러면 또 쏘고 또 쏘고 하는데 ‘깡, 깡, 깡, 깡 …’ 하고 그 깡통은 네 번을 튀어 오르고는 구멍이 숭숭 뚫려 땅에 떨어졌다. 권총은 보통 6연발이니까 그는 그 여섯 발 중 네 발을 맞춘 것이다. 그 뒤에 나는 서부활극 영화 <셴> 같은 데서 알란 라드 같은 명사수의 총 솜씨를 보았는데 그것이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보았다.

당시 우리는 곧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한겨울이 되어도 전쟁은 계속되더니 中共軍(중공군)이 참전했다느니 다시 서울을 빼앗겼다느니 하는 불안하고 우울한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른들이 골목에서 만나는 사람들 마다 서로 붙들고 ‘길수가 죽었대요.’, ‘허, 거, 길수가 죽었단다.’ 하고는 호르르 한숨들을 내쉬었다. 내 보다 열 살 쯤이 많은 몇 집 건너 이웃 형이 戰死(전사)했다는 것이다. 언제나 말이 없고, 수줍음이 많아 씨익 소리 없이 웃곤 하던 그 형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문득,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 아- 이슬 같이 죽겠노라/

하던 軍歌(군가)가 떠오르면서 왈칵 눈물이 났다. 전쟁은 그러고도 근 3년이나 더 끌면서 수없이 많은 ‘길수 형’들이 죽고 나서야 겨우 멎었다.

[ 2014-05-15, 16:2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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