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카의 亂中日記 - 6.25와 李承晩 [발췌]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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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카의 亂中日記 - 6.25李承晩 [발췌]

 

 

최근의 세월호 사건의 와중(渦中)SNS를 통하여, 그리고 심지어 일부 몰지각한 야당 정치인의 입을 통하여 필자로서는 도저히 듣고 넘길 수 없는 망령된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1950년 북한군이 전면 기습 남침으로 6.25 전쟁을 도발했을 때 이승만(李承晩) 대통령(당시)이 서울시민들을 팽개치고 자신만 먼저 살 길을 찾아서 피난길에 나섰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이 주장하는 이 같은 이 대통령의 행동을 이번에 승객들을 버려두고 침몰하는 세월호를 제일 먼저 탈출한 선장(이준석)의 무책임한 행동에 비견(比肩)하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역사 왜곡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몰지각하고 무책임한 언동(言動)에 접하면서 필자의 뇌리(腦裏)에는 문득 얼마 전 신재성 예비역 소장(육군)이 보내 준 한 권의 책 -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6.25와 이승만>(서울 도서출판 기파랑, 2011) - 을 탐독(耽讀)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승만 대통령의 오스트리아 출신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현대판 사관(史官) 역할을 자임(自任)하여, 19506256.25 전쟁이 발발한 날부터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대통령의 일동일정(一動一靜)과 대통령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사 및 전쟁의 진행 상황을 날마다 꼼꼼하게 기록해 놓았다. ‘도서출판 기파랑은 이 같은 프란체스카 여사의 난중일기가운데서 전쟁 발발로부터 약 1년간의 부분을 정리하고 편집하여 이를 한 권의 책으로 출판했다. 그 책이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6.25와 이승만>이다.

 

다른 분들의 경우는 모르겠지만 필자의 경우는 결코 편안한 마음으로 이 책을 읽기 어려웠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눈을 통하여 조명(照明)6.25 전쟁은 시대를 달리 하기는 했지만 갈 데 없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재판(再版)이었다. 1950년의 대한민국이 당한 6.25 전쟁은 1592년의 조선(朝鮮) 왕조가 당한 임진왜란과 똑 같이 아무런 대비도 없이 당한 무비유환(無備有患)’의 전형(典型)이었다. 그러나,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는 임진왜란을 당한 당시의 조선왕조와 6.25 전쟁 발발 당시의 대한민국 사이에는 실로 엄청난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것은 임진왜란 때의 조선왕조가 혼군(昏君)’의 극치(極致)였던 임금 선조(宣祖)의 치세(治世)였던 반면 6.25 전쟁 기간 중의 대한민국은 이승만이라는 위대한 민족적 지도자가 이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임진왜란에서 조선왕조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성웅(聖雄) 이순신(李舜臣)이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6.25 전쟁에서 대한민국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승만이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가 웅변(雄辯)해 주고 있다. 프란체스카는 이 책에서 이승만이 6.25 개전(開戰) 초기 서울을 떠나는 과정도 감동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필자는 대한민국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든 분들, 그리고 특히 청소년들이 반드시 이 책을 읽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필자는 시중 서점에서 이 책은 이미 매진(賣盡)(?)되어 절품(切品)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고민 끝에 필자는 이 책 가운데서 필자의 생각으로 뜻 있는 분들이 꼭 읽어 보았으면 좋겠다는 부분을 발췌하여 <조갑제 닷컴>에 수록(收錄)하려 한다. 우선 여기에 1회분을 싣는다. 아무래도 몇 회에 걸쳐 나누어서 수록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읽는 분들의 편달이 있기를 소망(所望)한다. 마침 우리는 이제 10여일 후에 6.25 전쟁 발발 64주년을 맞이한다. 특히 이 1회분을 읽음으로써 6.25 개전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을 떠나는 과정에 관한 사문난적(斯文亂賊)들의 역사왜곡에 현혹(眩惑)된 부분이 있었다면 이를 시정(是正)해 주는 기회로 삼기를 간절히 바란다. 2014.6.12. 李東馥 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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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25>

 

북한 공산군이 새벽 5시에 쳐들어 왔다. 나는 이날 오전 9시 어금니 치료를 받으러 치과로 갔고 대통령은 아침식사를 끝내자 930분쯤 경회루(慶會樓)로 낚시하러 갔다. 10시쯤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국무총리서리 겸임)이 허겁지겁 경무대로 들어와서 각하께 보고드릴 긴급 상황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두 분이 집무실에서 마주 앉은 것이 1030, 이 자리에서 신 장관은 개성이 오전 9, 그러니까 내가 치과로 떠나던 그 시간에 이미 함락되었고 탱크를 앞세운 공산군은 춘천 근교에 도착했다고 보고했다.

 

대통령은 탱크를 막을 길이 없을 터인데....”라며 입속말을 했고 그 순간 얼굴에는 어떤 위험을 느끼는 듯 불안의 빛이 스치고 있었다. 시내에는 우리 아이들” - 대통령과 나는 늘 군인들을 우리 아이들(Our Boys)”라고 불렀다 을 태운 트럭이 북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고 시민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이제 38선이 깨진 모양이니 이북 땅을 되찾겠지....” 하면서 이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치고 있었다.

 

경무대(景武臺) 안의 분위기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자식들 장난치다 그만 두겠지...” 라는 식으로들 생각하고 있었다. 신 국방까지도 대통령에게 크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라는 말을 되풀이 했다. 그러나, 경찰 정보는 상황이 심각하고 위급하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고재봉 비서관을 불러서 정보 보고를 확인했다. 고 비서관의 보고 역시 적군의 힘이 예상 밖으로 강력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잠을 잊은 채 자정을 넘겼다. 침통한 그 모습에 나는 그때까지도 한 마디도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626일 새벽 3>

 

대통령이 도쿄(東京)의 맥아더 사령부에 전화를 걸었다. 전속부관이 전화를 받았다. 그는 장군을 깨울 수 없으니 나중에 걸겠다고 대답했다. 대통령은 벌컥 화를 내며 한국에 있는 미국 시민이 한 사람씩 죽어 갈 터이니 장군을 잘 재우시오라고 고함쳤다. 나는 너무 놀라서 수화기를 가로 막았다.

 

대통령은 마미, 우리 국민이 맨손으로 죽어 가는데 사령관을 안 깨우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요!”라며 몸을 떨었다. 상대편도 미국 국민이 한 사람씩 죽을 것이라는 말에 정신이 들었는지 각하,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하더니 맥아더 사령관을 깨우겠다고 했다.

 

맥아더 사령관이 전화를 바꾸자 대통령은 오늘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은 누구의 책임이요? 당신네 나라에서 좀 더 관심과 성의를 가졌었다면 이런 사태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오. 우리가 여러 차례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어서 한국을 구하시오라며 무섭게 항의했다.

 

사령관은 바로 도쿄 극동사령부의 무기 담당 히키(Doyle Hicky) 장군에게 명해 무스탕 전투기 10, 105mm 곡사포 36, 166mm 곡사포 36, 그리고 바주카포를 긴급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대통령은 조종사 10명을 보내 단기 훈련을 받고 나서 무스탕을 몰고 오게 하겠다면 전화를 끊었다. 맥아더 사령관과의 통화가 끝나자 워싱턴의 장면(張勉) 대사를 불렀다.

 

장 대사, 트루먼 대통령을 즉시 만나서 이렇게 전하시오. 적은 우리 문전에 와 있다고, 미 의회가 승인하고 트루먼 대통령이 결재한 1천만 달러 무기 지원은 어떻게 된 것이오?” 대통령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계속 떨고 있었다.

 

군부 지도자들은 2, 3일 안에 원조가 오면 서울을 지킬 수 있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젠장, 비행기가 없으니 탱크를 막을 수가 있나!” 대통령은 안절부절 못히거 뒷짐을 진 채 방안을 맴돌았다. 오후가 되자 대통령은 직접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로 나갔다. 의정부에서 2개 방면으로 방어선을 전개했으나 탱크를 저지하지 못해 계속 뚫리고 있다는 보고였다. 내가 알기로는 그때까지 미국은 한국과 같은 지형에서는 탱크를 쓸 수 없다고 판단, 탱크는 물론 대전차무기조차 공급하지 않았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대통령이 전황보고를 받고 경무대로 돌아 올 때 서울 상공에는 적의 야크기가 맴돌고 있었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적기였다. 적기가 뜰 때마다 대통령이나 나나 방공호로 들어가야 했고 서울 시민의 얼굴엔 공포의 그림자가 뒤덮이기 시작했다.

 

숨 막힐 듯한 긴장과 긴박감 속에 하루가 지났다. 대통령이나 나나 자정을 넘겨서 막 잠자리에서 눈을 붙였을 때 비서의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 왔다. 머리 맡의 시계는 27일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신성모(申星模) 국방장관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뇌를 스쳤다. 이어서 서울시장 이기붕(李起鵬) 씨와 조병옥(趙炳玉) 씨가 들어 왔다.

 

각하, 서울을 떠나셔야 하겠습니다.” 신 장관이 간곡하게 남하(南下)를 건의했다. “안 돼! 서울을 사수(死守)해야 해! 나는 떠날 수 없어!” 대통령은 그 이상 아무 말도 없이 문을 쾅 닫으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신 장관은 침통한 표정으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대통령을 뒤따라 들어가서 침착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지금 같은 형편에는 국가원수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더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염려들 합니다.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의 존속이 어렵게 된답니다. 일단 수원까지 내려갔다가 곧 올라오는 게 좋겠습니다.”

 

내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대통령은 뭐야! 누가 마미한테 그런 소릴 하던가? 캡틴 신이야, 아니면 치프 조야? 아니면 장인가 또는 만송(晩松이기붕의 호)인가? 나는 안 떠나!”하고 고함을 질렀다. 대통령은 나에게는 신 장관을 캡틴 신(그는 한 때 선장을 했다), 조병옥 박사나 장택상(張擇相) 씨는 경찰국장을 지냈다고 해서 치프(chief) 조 또는 장이라고 불렀었다. 나는 다시 모두가 같은 의견입니다. 저는 대통령의 뜻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했다.

 

이때 경찰간부(이름은 기억이 없다) 한 사람이 들어 와서 적의 탱크가 청량리가지 들이닥쳤다는 메모를 전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당시 적의 탱크는 그보다 훨씬 먼 곳에 있었고 그 메모는 대통령의 남하를 독촉하려는 꾀였었다. 나는 수원을 서울에서 별로 멀지 않아요라고 넌지시 거들었다. 신 장관이 때를 놓지지 않고 각하가 수원까지만 내려가 주시면 작전하기가 훨씬 쉽겠습니다라면서 머리를 숙였다.

 

 

<627일 새벽 330>

 

남행 열차를 타기로 결정되었다. 비서관이 간단히 짐을 챙겼다. 금고를 탈탈 털어도 5만원 밖에 없었다. 이 돈을 황규면 비서관에게 맡기고 경호관 김장흥 총경과 경찰관 4명이 우리 일행이 되었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탔다. 차창이 깨지고 좌석의 스프링이 튀어나온 3등 객차였다. 대구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40분이었다. 기차가 머물자 대통령은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대구라는 대답에 대통령의 모습은 너무도 침통했다. 대통령은 나를 찬찬히 쳐다보면서 내 평생에 처음으로 판단을 잘못했다. 여기까지 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나는 바로 곁에서 20년 가까이 남편을 모셨지만 이때처럼 회오와 감상에 젖은 음성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대통령은 이내 비서들에게 서울로 올라갈 것을 명했다. 나는 너무나 큰 죄를 진 기분이었다. 앞을 예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국가원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결국 우리나라가 불행해 진다는 생각에서 남하를 은근히 권했던 것이지 목숨이 아까워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후회하는 표정을 짓거나 나를 원망하는 듯한 말씀을 할 때는 너무나도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서 아내로서의 외로움과 설움이 왈칵 몰려 왔다.

 

대구에 머무른지 1시간도 안 된 1230분 기관차의 머리를 서울로 되돌렸다. 간밥을 뜬 눈으로 새운데다가 식사조차 제대로들 못한 형편이었다. 나는 보리차를 대통령에게 권했으나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입을 꽉 다물고 차창 밖만 응시하고 있었다.

 

수원까지만 가면 서울에는 자동차로 갈 수 있겠지....” 대통령의 머릿속에는 서울 생각뿐인 것 같았다. 나는 한층 무안해 질 수밖에 없었다. 철로변에는 모가 파랗게 심어져 있었고 밀짚 모자를 쓴 농부들이 열심히 논을 다듬고 있었다. 그 순간은 전쟁의 공포를 느낄 수 없었다. 기차가 대정에 도착했다. 플랫폼에는 윤치영(尹致映) 씨와 허정(許政) 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각하, 여기서 내리십시오. 서울은 이미 빨갱이들 수중에 드러갔습니다라며 더 이상의 북상(北上)을 만류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계속 서울행을 고집했다. 옆에 있던 이영진 충남지사가 대통령을 부추기는 말을 했다. “한 발짝이라도 서울 가까이 계셔야만 민심 동요가 적어집니다. 제가 모시고 올라가겠습니다라는 것이었다.

 

대통령도 따라서 자네 말이 옳아. 나는 서울로 가겠네라면 응수했다. 나는 기차에서 내리려 했다. 대통령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영어로 말했다. “목숨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거야! (Life is dear to them too!)” 대통령은 열차에서 내려서 잠깐의 휴식을 위하여 대전철도국 2층 역장실로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황 비서를 불러서 기관사에게 수고비를 주라고 했다. 황 비서는 나에게 2만원을 기관사에게 떼어 주었다고 보고했다.

 

잠시 뒤 미국 대사관의 드럼라이트 참사관이 달려와서 유엔이 대북(對北) 군사제재를 결의했고 트루먼 대통령이 해공군 출동 및 대한(對韓) 긴급 무기원조 명령을 내렸다고 전했다. 암담하던 분위기는 이 소식으로 활기를 되찾았고 임시정부를 대전으로 옮기기로 했다. 대통령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 충남 지사 관저를 숙고로 정했다.

 

<628일 아침>

 

임시 각료회의가 도지사실에서 열렸다. 그때 각료들과 국회의원들은 대전 근교 유성온천에 머물고 있었다. 이날 회의에서 전규홍(全奎弘) 총무처장이 국방장관을 경질하고 후임에 이범석(李範奭) 장군을 임명하자고 제의했다.

 

<329일 오전 830>

 

무쵸 대사가 도착했다. 그는 맥아더 사령관이 한강 방어선 시찰을 위하여 도쿄에서 날아온다는 메시지로 가지고 왔다. 대통령은 한 시간 뒤에 비행장으로 나가겠다고 했다. 오랜만에 대통령의 얼굴에서 웃음을 볼 수 있었다.

한국군과 미군 임시 사령부가 위치한 수원농대에서 대통령은 감격적으로 장군을 얼싸 안았다. 그런 다음 대통령 대뜸 장군, 장군의 구두가 지금 한참 자라고 있는 모를 밟고 있소라고 나무랐다. 맥아더 장군은 각하,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깎듯이 사과를 했다고 한다. 뒤에 대통령은 나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수원으로 비행하던 중 대통령이 탄 비행기는 야크기 2대의 추적을 받았다. 조종사는 거의 땅 바닥에 닿을 듯 저공비행을 하고 계곡을 타면서 적기의 공격을 회피했다고 했다. 나는 대통령이 돌아 올 때까지 7시간을 비행장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830분 대통령이 무쵸 대사와 함께 도착했을 때 나는 반가워서 왈칵 눈물이 솟았다.

 

대통령의 도착 연락을 받고 장택상, 신익희(申翼熙) 씨가 밤 9시쯤 찾아왔다. 두 사람은 현상 타개를 위해서는 국방장관을 바꿔야 한다면서 역시 이범석 장군을 후임으로 추천했다. 대통령께서도 철기(鐵驥이범석의 호)는 게릴라전의 명수니까 전황타개에 묘책일 수 있겠다면서 국방장관 경질의 뜻을 비쳤다. 무쵸 대사가 끼어들었다. 그는 지금은 각료를 바꿀 때가 아니며 특히 국방장관을 바꾸면 큰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면서 극구 반대했다. 내가 알기로는 무쵸 대사는 이범석 장군을 무척 싫어했다. 그의 생각은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고집이 세고 특히 미국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무쵸 대사는 그런 쪽 사람들보다는 일제하에서 적당히 지냈던 사람들을 더 가까이 하는 편이었다.

 

개인적으로도 무쵸 대사와 이 장군은 무척 나쁜 관계였다. 다른 사람을 통해 들은 바에 의하면, 한 번은 무쵸 대사가 토론 도중 독립운동 경력이 있는 정치인들에 대해 편견을 드러냈다가 이 장군에게 매를 맞은 일도 있었다고 했다. 그날 밤 대통령은 나에게 들으라는 듯 우리는 지금 철기 같은 파이터가 필요한데 무쵸 펠로우(Muccio Fellow)’가 밤낮 저 모양이라고 못마땅해 했다. 대통령은 사석에서는 무쵸를 대사라고 호칭하지 않고 영어로 ‘Fellow“(녀석)’라고 불렀다.

 

<630>

 

대통령은 신 국방장관이 겸임하고 있는 국무총리 자리를 놓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마미, 고당(古堂) 같은 사람이 있으면 이 난국 해결에 도움이 큰 도움이 될 터인데...” 대통령은 항상 조만식(曺晩植) 씨를 생각하고 있었다. 전에도 여러 차례 사람을 평양에 보내서 조만식 씨에게 서울로 와서 함께 일할 것을 제의했었다. 그때마다 조만식 씨는 압제 아래서 고통 받는 북한동포들을 두고 갈 수 없다면서 사양했고 대통령은 그때마다 안타까워했었다.

 

대전으로 남하한 뒤 대통령은 침실 머리맡에 모젤 권총 한 자루를 놓고 자는 습관이 생겼다. 나는 차디찬, 그리고 싸늘한 총구가 기분 나빴다. 나의 이런 표정을 읽은 대통령은 최후의 순간 공산당 서너 놈을 쏜 뒤에 우리 둘을 하나님 곁으로 데려다 줄 티켓이라면서 내 손을 꼭 잡곤 했다. 그 뒤부터 나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우리 두 사람 티켓을 잘 간수하셨어요?” 하면 대통령은 잘 있지라면서 크게 웃곤 했다.

 

<71일 오전 3>

 

아직 어둠은 걷히지 않았다. 황규면 비서가 대통령을 깨웠다. 공산군 탱크가 이미 수원을 지나서 빠른 속도로 남진하고 있다는 보고였다. 보고를 받고 난지 20분쯤 뒤, 미 대사관 1등서기관 헤럴드 노블이 관저로 달려 와서 대전 이남으로 옮겨야 한다고 대통령을 설득했다. 신 국방장관과 정일권(丁一權) 장군도 이내 도착했다. 하나 같이 침통한 표정이었다.

 

대통령은 차라리 대전에서 죽는 게 낫지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가 경멸을 당하지 않겠다면서 대전 사수를 고집했다. 침실로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근 대통령은 책상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기도하는 자세였다. 그의 얼굴은 불행한 국민들에 대한 연민(憐憫)의 정과 잇단 패전에 대한 분노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당장 상황을 뒤바꿀 어떠한 대책이 있을 수도 없었다.

 

대통령은 노트를 꺼내서 내게 건네주면서 메모를 부탁했다. 나는 조용히 그가 부르는 대로 받아 적었다. “죽음이 결코 두려운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다. 나는 자유와 민주 제단에 생명을 바치려니와 나의 존경하는 민주 국민들은 끝까지 싸워서 남북통일을 이룩해야 할 것이다. 다만 후사(後嗣) 없이 죽게 되어 불효자(不孝子)일 뿐이다.” 나는 이 글이 최후에 대비한 유서(遺書)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후사 없는 불효자라는 대목은 곧바로 비수(匕首)가 되어서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었다.

 

밖에서는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대통령을 다시 만난 노블이 정부의 계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전 사수보다 남쪽으로 옮겨서 앞으로의 대책을 세우는 것이 시급하다고 애원에 가까운 설득을 했다. 신 장관도 거의 울음 섞인 목소리로 남하를 건의했다. 빗줄기는 어느 틈에 장마 비로 바뀌어서 억수처럼 내리붓고 있었다. 우리는 이 빗속을 뚫고 또다시 목포를 향하여 떠났다. 대통령과 나, 김장흥 총경이 한 차에 탔고 황 비서, 이철원 공보처장, 김옥자(나의 개인비서) 씨가 다른 지프에, 그리고 경호경찰 4명이 맨 뒤에 따랐다.

 

길이 워낙 험해서 차도 사람도 몸살을 앓을 지경이었다. 우리는 8시에 이리(裡里)에 도착하고서야 우리를 뒤따르던 경호관들의 지프가 고장 나서 1시간쯤 쳐진 것을 알았다. 자동차로 목포까지 가는 것은 무리인 것 같았다. 이리 역장에게 기차 편을 요구했다. 역장은 모든 기관차와 객차는 징발(徵發)되었고 교통장관의 명령이 없이는 어느 누구에게도 기차를 내놓을 수 없다고 뻣뻣하게 대답했다. 황 비서가 철도전화로 대전을 불렀다. 잠시 후 김석관 교통장관이 나와서 곧 열차를 준비하겠다고 했다. 기차가 준비되는 동안 우리 일행은 역 구내에서 요기(療飢)를 했다. 황 비서가 주변 매점을 찾아다니면서 건빵을 한 아름 사 왔다. 나는 한 개도 먹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입에 당기지 않는 듯 억지로 한두 개를 우물우물 씹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 거 참, 별미(別味), 맛이 있는데하며 한 봉지를 눈 깜작할 사이에 비웠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마미, 당신도 먹어봐요. 아주 맛이 있거든....”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오수 140분 목포역 구내로 접어들었다. 김장흥 총경은 기차를 역구내에서 500m쯤 떨어진 곳에 세우게 한 뒤 혼자서 목포경비사령부를 찾아갔다. 대통령의 바바리코트는 때에 절었고 파나마모자 테도 새까맣게 더럽혀져 있었다. 모든 이들의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누가 보아도 대통령 일행으로 알아 볼 사람은 없었다. 김 총경이 혼자서 경비사령부로 간 것은 이런 행색으로 사령부에 나타났다가 경비군인들로부터 대통령이 봉변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김 총경이 대통령을 비밀리 부산으로 모실 테니 배를 내달라고 하자 역시 사령관 정경모 대령은 의심하는 눈치였다. 사전에 아무런 연락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직접 대통령을 만나 뵈어야 하겠다고 버텼다. 김 총경은 전 사령관과 지프를 타고 대통령이 있는 곳으로 달려 왔다. 정 사령관은 모자를 깊숙하게 눌러쓰고 색안경을 쓴 대통령을 알아보자 그 앞에서 부동자세로 신고를 했다. 그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듯 했다. 대통령이 정 사령관을 가까이 불러 내가 부산으로 조용히 가고 싶네. 자네가 좀 수고를 해 주어야 하겠어라고 하자 정 사령관은 점심은 드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판에 점심은 무슨 점심인가하는 대통령의 대답에 그가 차를 몰고 나가서 역전 다방에서 홍차와 토마토 등 간단한 먹을거리를 사들고 왔다. 우리는 4시에 부산을 향해 목포를 출발했다. 뱃길은 풍랑이 심했다. 나는 토마토 몇 쪽 먹은 것까지 모두 토했고 다른 사람들호 뱃멀미로 여기저기 쓰러졌다. 오직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꿋꿋이 버티는 건 대통령뿐 한 분뿐이었다. 나는 70 노인이 저럴 수 있나 하고 놀랐다.

 

아랫배에 힘을 주고 어머니의 인자한 모습을 그려 보게나. 울렁거리는 속이 가라앉을 걸세.” 대통령은 눈 한 번 붙이지 않고 오히려 수행원들을 격려했다. 함정에서는 군인 식사와 똑 같이 했다. 꽁보리밥에 짠지, 된장덩이가 전부였다. 모두가 음식 냄새조차 맡기 싫어했다. 대통령은 밥알 하나 남기지 않고 한 그릇을 맛있게 비웠다.

 

<72일 오전 1130>

 

배가 부산부두에 닻을 내렸다. 1주일을 머무는 동안 전선은 자꾸만 뒤로 밀린다는 암담한 전황만 들어오고 있었다. 미군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신뢰도 점점 떨어져 갔다. 미군은 적의 탱크를 맞아 무슨 폭탄을 써야 하는지도 몰랐다. 공산군의 탱크는 미군의 공격을 받고도 끄떡 않고 밀려오는 것이었다. 때문에 미군들의 공산군 탱크에 대한 공포심만 자꾸 눈처럼 불어났다. “정신 상태야, 정신 상태! 멍청한 것들! 우리 아이나 경찰에게 그들이 가진 무기와 장비를 주어 봐, 이처럼 후퇴하기에 바쁘진 않을 거야.” 대통령은 멍청한 양코장이들이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뇌며 책상을 주먹으로 쳤다.

 

대통령이 부산에 머문 지 닷새째인 77, 유엔안보이사회는 미국 통솔 아래 유엔군총사령부를 설치하기로 결의하고 초대 유엔군총사령관에 맥아더 장군을 임명했다. 이보다 앞서 74일 부산과 대구-대전을 연결하는 통신망이 되살아나고 도쿄의 미 극동군사령부와 직통전화가 연결되었다. 대통령은 경무대 직원들에게 24시간 전화기 앞에서의 근무를 명했다.

 

<74일 아침 8>

 

아침 식사를 하려고 식당에 내려갔을 때 미국 대사관 1등서기관 닥터 노블이 와 있었다. 그가 미군들은 준비가 되면 3-4일 뒤에 공격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지난 밤 평양을 폭격했다는 소식도 전해 주었다. 그러나, 이날 오후 4시에는 채병덕(蔡秉德) 장군이 오스트레일리아 비행기들이 금강을 한강으로 오인, 수원과 평택을 폭격하는 바람에 우리 국군과 미군들이 다수 살상되었다는 어처구니없는 보고를 해 왔다. ‘우리 아이들’ 2백명과 미군 한 명이 죽었다는 것이다.

 

 

<76>

 

763명의 은행가(프란체스카 여사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Banker’라고만 기록해 놓았다)가 찾아 왔다. 그들은 대통령에게 통화개혁을 건의했다. 그들은 공산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우리 화폐를 몽땅 꺼내 쓰기 때문에 인플레를 빚고 위조지폐까지 나도니 신권 발행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대통령은 이런 사실을 주무장관이나 정보기관을 통해서가 아니라 은행가들로부터 듣게 된 것이 몹시 언짢은 듯 했다. 나는 사람을 시켜서 시내 쌀값을 알아보도록 했다. 소두(小斗) 한 말에 2,400원이었다. 서울을 떠날 때 1,500원 하던 것이 열흘 사이에 60%나 뛰어 오른 셈이다.

 

대통령은 아무래도 부산이 임시수도 대전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귀가 어둡다고 말했다. “황 비서, 나 대구로 가겠네. 기차를 준비하게. 그리고 조재천(曺在千) 지사에겐 방을 하나 빌리라고 전하게.”

 

<79>

 

부산 체류 7일만에 우리 일행은 대구를 향해 떠났다. 대통령을 태운 열차는 방근 전선에서 돌아온 듯 차창에는 총알구멍이 뚫려 있었고 차체는 파편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조재천 지사 관저에 자리 잡자 무쵸 대사가 찾아 와서 딘(William F. Dean) 장군으로부터의 연락이라며 미군이 대전까지 후퇴했다고 전했다.

 

대통령은 무쵸 대사를 향하여 세계 각국이 한국인은 싸움도 않고 후퇴하는 국민인 줄 알겠소. 미군들은 어째 후퇴만 하는 거요? 차라리 우리들에게 무기를 주시오라면서 버럭 화를 냈다. 그리고는 미군들이 철도국에 사전통고도 없이 자기들 철수만 끝나면 철도를 폭파, 숱한 철도원과 그 가족들의 발을 묶었다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무쵸 대사는 작전상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어깨를 들썩이면서 설명을 했다. “그놈의 작전상, 작전상, 당신들은 그것 밖에 할 말이 없소?” 대통령은 미군들이 게릴라전을 몰라서 겁을 내고 있다면서 이를 간파한 적군이 낮엔 숨어서 잠을 자고 밤이면 습격을 한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의 말 속에는 어서 빨리 우리 아이들에게 무기를 달라는 뜻이 들어 있었다.

 

<711>

 

711일 자유중국의 소육린 대사가 2-25천명의 자국군을 파견할 용의가 있다고 참전 의사를 밝혔으나 대통령은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내가 한 사람의 장병이 아쉬운 판국인데 반공국가인 자유중국의 참전 제의를 어째서 거절했느냐고 물었다. 대통령은 퉁명스럽게 중공군을 내 손으로 불러들일 수는 없잖아하고 한 마디 던지더니 이내 입을 다물었다.

 

<714>

 

유석(維石) 조병옥 발사가 내무장관에 임명되었다. 내무장관 경질은 13일 무쵸 대사가 백성욱(白性郁) 장관을 바꿔 달라고 제의하여 이루어졌다. 미국측은 백 장관이 독일에서 교육을 받아서 영어를 잘 모르고 해서 협력하기가 힘들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대통령은 미국이 남의 나라 장관을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멋대로 바꾸라고 한다면서 불쾌해 했다. 그렇다고 대통령이 조 박사를 싫어 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간섭이 싫었던 것이다.

 

대통령과 나 사이에는 사람을 보는 방법도, 호감도, 그 사람에 대한 인상을 보는 느낌에도 차이가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제네랄 처치(처치 준장)의 경우였다. 나는 처치 장군이 예의 바르고 친절하며 우리 한국민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가 지독한 인종주의자로, 겉으로는 우호적인 체 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황색 인종을 경멸하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개인적으로는 우월감에 차 있는 미국의 고급 장성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공식 석상이나 여러 사람들이 있는 장소에서는 제네랄 처치라고 불렀지만, 우리 둘이 있을 때는 언제나 처치 보이로 통했다.

 

14일에는 현 전선 고수라든가 아군 선전(善戰)’ 등의 판에 박은 듯한 전황보고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미 대사관에서는 어서 빨리 부산으로 내려가는 것이 좋겠다는 연락만 왔다. 그때마다 대통령은 내가 이 이상 더 내려가지 않아야 국민의 동요가 적다면서 대구에 머물 것을 고집했다. 미국 대사관에 대한 공식 답변은 그러 했지만 실제로는 미군의 전의(戰意)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었다. “마미, 내가 부산으로 가지 않는 것은 뒤로 물러서기만 하는 미군들을 믿을 수가 없어서 그래. 지금 내가 여기 이렇게 버티고 있으니까 그나마 싸우지 부산으로 갔다 하면 언제 대구를 내놓을지 모를 사람들이거든.”

 

대통령은 낙동강이 우리 최후의 방어선이자 생명선이라고 했다. 대통령은 지사 관저 식당에 앉아 모기에 시달리며 이날 밤을 꼬박 새웠다. 다음날 새벽 동이 트자마자 대통령이 대전으로 올라가 전황을 봐야 하겠다고 했다. 우리 모두가 깜짝 놀랐다. 워커 장군과 무쵸 대사도 극구 만류했다. 워커 장군은 앞으로 10일 이내에 전황이 달라질 터이니 그때까지만 참으시라면서 제발 대전으로 오시지 말아 달라고 했다. 장군의 제발이라는 단어에서 나는 대전을 포기할 시간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716일 아침>

 

국방장관은 동해안에 적군 300명이 상륙했다고 보고했다. 연합군 해군은 해안선을 철통 같이 지키고 있다고 했었는데 이 또한 허풍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서해안을 지키던 우리 군은 소형 보트로 상륙하는 적군을 격퇴시켰다. 포항 비행장은 미군들이 사용하기 위하여 수리 중이다. 국방장관이 미군은 금강을 사이에 두고 적과 격전 중이나 자꾸 후퇴할 기미이고 한국군사령부는 현 전선에서 더 이상 물러나지 않도록 싸우겠노라면서 버티는 중이라고 말했다.

 

딘 소장은 대전을 방어하라는 맥아더 장군의 명령을 받고 휘하 장병들에게 후퇴하는 자는 즉결처분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동이 트자 금강 전선의 미군 병력 가운데 3백여명이 뺑소니 친 것을 알게 되었다. 열흘 동안에 전황을 바꾸어놓겠다고 큰 소리 치던 워커 장군의 얼굴이 떠올랐다.

 

경무대를 지키다가 78일 간신히 서울을 탈출한 경찰관이 서울의 비참한 소식을 알려 왔다. 쌀값은 10배로 폭등했고 그나마 구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화교들은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사진을 떼어버리고 공산군들을 맞이했다고 한다. 공산군은 온갖 약탈을 자행, 쌀이며 손목시계, 만년필 등 닥치는 대로 빼앗아 북쪽으로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감옥에 갇혔던 빨갱이들이 서울시의 책임자가 되고 거리의 공산군은 10대가 대부분이며 13살짜리도 끼어있다고 했다. 모두가 처절하고 끔찍한 소식뿐이었다.

 

<717>

 

장마철인데도 날씨는 계속 쾌청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돕고 계신다. 탱크를 막아낼 무기가 없는 우리 군을 불쌍히 여겨서 미군기들이 출격하여 탱크를 부술 수 있도록 맑은 날씨를 주시는 것이다. 대통령은 경북 지사실에서 제헌절 기념행사를 가졌다. 오후 2시에는 각도 지사와 경찰간부 회의가 대통령 주재로 열렸으나 서울에서 피납된 구자옥(具滋玉) 경기도 지사 자리만이 비어서 눈길을 끌었다.

 

내 일기는 720일로 사흘을 뛰어 넘는다. 이 사흘 동안 나는 거의 혼수상태에 빠져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설사가 너무 심해서 손 끝 하나 까딱 할 수 없었고 40도 가까운 고열에 헛소리를 할 지경이었다. 더위를 먹은 데다가 물갈이가 설사의 원인이었다. 물은 언제나 나를 괴롭혔다. 전에 대통령을 따라 지방 시찰을 갔을 때도 물이 맞지 않아 배탈이 나곤 했다.

 

대구의 더위는 지독했다. 대통령은 지사 관저 뒷마당의 펌프를 틀어 몇 바가지 쏟아버리고는 새 물을 받아서 시원스럽게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지하수는 이가 시리도록 찼지만 나는 배탈 걱정에 항상 끓인 뒤 식혀서 마셨다. 그런데도 탈이 난 것이다. 신경성 위염까지 도졌다. 솔직히 말해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아무리 어려운 때라도 나는 옆에서 신경을 써 주는 사람이 있고, 세끼 밥은 거르지 않는다. 집과 가족을 잃고 먹을 것이 없어서 길거리에 나앉은 국민들은 얼마나 고생을 할까? 그 생각을 하면 나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다.

 

전투는 계속되어도 어두운 소식뿐인 것 같다. 고열에 들떠서 멍멍한 속에서도 대통령의 기도는 매일 밤 내 귓전에 울렸다. “오 하나님, 우리 아이들을 적의 무자비한 포탄 속에서 보호해 주시고 죽음의 고통을 덜어 주시옵소서. 총도 없는 아이들이 오직 나라를 지키겠다는 신념만으로 싸우고 있나이다. 당신의 아들들은 장하지만 희생이 너무 크옵니다. 하나님, 나는 지금 당신의 기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기도는 절규(絶叫)였다.

 

조재천 지사 부인이 콩나물에다 파를 넣고 끓여서 소금으로 간을 맞춘 맑은 국물을 가져 왔다. 몇 모금 마시니 속이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다. 나는 이 국물을 아꼈다가 대통령에게 권했다. 대통령은 마미, 당신이나 두고 마실 일이지...” 하더니 단 숨에 한 대접을 몽땅 비우는 것이었다.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꾹 참았다.

 

임병직(林炳稷) 외무장관이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해서 들어 왔다. 미군 GI가 장관 지프를 훔쳐서 달아났다는 것이었다. 임 장관이 미군 사령부에 이 사실을 항의했더니 그쪽에서는 우리가 당신네 나라에 수많은 지프를 주었는데 그까짓 한 대쯤 없어진 것이 뭐 그리 대단해서 항의하느냐고 대답하더라면서 흥분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무쵸 대사를 불러서 이렇게 나무랐다. “당신네 나라는 그런 일을 용납하는지 몰라도 한국정부에서는 안 됩니다. 미군 병사들이 한국을 도우러 왔다고 해서 도둑질을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돼요. 우리 땅에서는 한국인이건 미군이건 도둑질 하면 처벌 받아야 합니다.” 무쵸 대사는 금시초문(今時初聞)이라면서 당장 그 병사를 색출하여 처벌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아무리 모든 것이 참담하고 또 헐벗고 굶주려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도둑질 한다는 사건보고는 한 건도 없었다.

 

우리는 최근 서울에서 탈출해 온 사람으로부터 또 소식을 들었다. 그는 중앙청에서 소련 장교 3명이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서울 쌀값은 소두 한 말에 27천원이라고 한다. 대구보다 120배가 비싸다. 대통령은 적이 포진하고 있는 지역에 동족의 가슴에 총을 겨누지 말고 국군에 투항하라는 내용의 전단을 비행기로 적 지역에 살포할 것을 명령했다. 우리측의 심리전에 당황한 적군은 어린아이들이 전단을 줍는 것까지도 총으로 쏘아서 어느 누구도 선뜻 전단을 주우려 들지 않는다고 한다.

 

<718>

 

대통령과 무쵸 대사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언쟁을 벌였다. 대통령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 내용 가운데 우리 한국 국민은 공산군을 우리의 본래의 국경선인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으로 몰아낼 때까지 싸울 것을 다짐하고 있다고 되어 있는 대목을 무쵸 대사가 빼자고 하여 두 사람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이다.

 

긴장과 초조가 고무줄처럼 팽팽한 하루하루 가운데 대통령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은 꼬마 친구들과 만나는 때였다. 대통령의 꼬마 친구는 조 지사의 두 아들로 7살과 5살 정도였다. 두 녀석은 대통령 임시 집무실과 지사 관저 사이의 담장에 얼굴을 빠끔히 내놓았다고 대통령에게 들켰다. 대통령은 이 녀석들, 엄마 아빠에게 들켜서 혼나기 전에 냉큼 나한테 건너 오너라하고는 집무실에 숨겨주고 함께 노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또 지난 신문과 달력으로 딱지를 접어서 함께 딱지치기를 하고 종이배를 만들어서 배를 띄우며 놀았다. 대통령은 딱지며 종이배 접는 솜씨를 14살 때 미국에서 디프테리아로 죽은 친아들 태산이한테 배운 것이라고 말했다.

 

조 지사 부인이 담장 넘어로 이 같은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대통령은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 하며 아이들을 놀라게 하지 말라는 시늉을 했다. 이후부터 두 녀석은 대통령만 보면 쏜살같이 달려 와서 품에 안기곤 했다. 대통령은 다섯 살짜리를 더 귀여워했다. 하루는 이 녀석이 내 종아리에 간지럼을 태우자 대통령은 라이벌이 생겼다면서 농담을 했고, 이 녀석이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마미, 당신의 보이프렌드가 왔어하며 환하게 웃었다. 대통령은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했다. 이곳저곳 지사 관저로 옮겨 다닐 때마다 예닐곱 씩이나 되는 그 댁 아이들을 일일이 껴안고 귀여워했다. 그러면서, “지사는 복이 많은 사람이야!”를 연발했다. 그때마다 나는 죄스러운 느낌을 가졌다. 대통령은 이내 내 안색을 살피고는 대한민국의 청년들이 모두 우리 아들이야. 마미는 수없이 많은 아들들을 두었으니 할 일이 많아라면서 위로해 주었다.

 

<720>

 

배탈은 나을 기미가 없었다. 밤이면 더욱 심해져서 화장실을 들락거리다가 날을 밝힌다. 대통령까지 설사병에 걸려서 밤새도록 두 사람이 번갈아 화장실 출임을 했다.

 

<721일 아침>

 

오후 4, 미군이 대전에서 철수한다는 정식 통보를 받았다. 중부전선에서는 적군이 청주에서 정읍까지 내려왔고 동부전선에서도 협공으로 안동을 향해 빠른 속도로 쳐들어오고 있었다. 대통령은 정일권 장군을 통해 이 정부를 확인했다. 정 장군은 금강에서 미군들이 민간인으로 위장한 북괴군 게릴라들로부터 배후 기습을 받아서 수백명이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는 것도 함께 보고했다. 미군들이 버리고 간 그 무기들을 우리 아이들이 주웠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문득 들었다.

 

워커 장군은 민간인복을 입으면 누가 누구인지를 구별할 길이 없다고 실토하면서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총질을 할 수도 없어서 난처하기 짝이 없다고 말했다. 워커 장군은 처음으로 대통령에게 자기네 병사들이 게릴라전에는 미숙하다고 자백했다. 대전에 침공한 공산군은 차량이 지나갈 만한 곳에는 모두 돌을 쌓아 벽을 쳐서 미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대전을 사수하려던 딘 소장이 실종된 데다가 피난민을 가장한 북괴군의 교란작전으로 미군은 사면초가(四面楚歌)였다. 보고를 다 받고난 대통령은 치솟는 분노를 참으려는 듯 빠른 걸음으로 방안을 왔다갔다 하다가 갑자기 차고로 뛰어나갔다. 나는 아픈 배를 움켜쥐고 급히 뒤따라 나가 겨우 차에 올랐다.

 

대통령은 직접 차를 몰아 무쵸 대사 숙소로 달렸다. 평소에도 대통령의 운전 솜씨는 거칠었다. 나는 겁이 나서 스피드를 좀 줄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워낙 화난 얼굴이어서 오직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손잡이만 잔뜩 움켜쥐고 있어야 했다. 옛날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대통령은 워싱턴의 프레스클럽에서 연설할 기회가 있었다. 뉴욕에서 워싱턴까지 가려면 기간이 급했다. 대통령은 헤드라이트를 켠 채 신호를 무시하고 논스톱으로 곡예운전을 했다. 2대의 기동순찰 오토바이가 추격했지만 대통령의 스피드를 따라잡지 못했다. 그때는 어찌나 혼이 났는지 이 양반하고는 당장 결별해야 하겠다는 마음까지 먹었었다. 프레스클럽에는 정시에 도착했다. 대통령은 연설을 시작했고 입구에는 2명의 기동순찰대원이 연설이 끝날 때까지 지켜서 있었다.

 

연설은 감동적이었다. 수십번의 박수가 터졌다. 감시 경찰관이 대통령의 연설에 감동하여 따라서 박수를 치는 것을 나는 보았다. 연설이 끝나고 대통령이 참석자들과 악수를 나누는 사이에 경찰관이 나에게 닥아와서 속삭였다. “기동경찰 20년에 내가 따라잡지 못한 단 한 명의 교통위반자는 당신 남편뿐이오. 일찍 천당에 가지 않으시려면 부인이 조심을 시키시오.” 그들은 씩 웃고는 V자를 그려 보이며 되돌아 갔다. 나는 대통령에게 운전을 배웠다. 그러나, 내 운전은 아주 고왔다. 그래서 대통령은 비단처럼 부드럽게 운전한다고 해서 나를 실키 드라이버(Silky Driver)’라고 불렀다.

 

경호원도 없이 손수 운전을 하고 나타난 대통령을 보고 무쵸 대사는 무척 당황해 했다. 대통령은 미군들이 한국의 지형을 모르는 것이 큰 약점이라고 지적하고 우리 군경을 북괴군과 구별조차 못하는 형편이니 미군 부대에 한국군을 배속시켜 함께 싸우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면서, “아니면, 차라리 당신들의 무기와 장비의 일부만이라도 넘겨 달라고 요구했다. 무쵸 대사는 무기가 넉넉하지 못해서 우선적으로 미군에 공급되고 있다면서 미군 혼성 편제 문제는 검토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721>

 

이날처럼 불행이 겹친 날이 없다. 오후 4, 미군이 대전을 포기하고 철수하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들어 왔다. 설상가상으로 미 24사단장 딘 소장의 실종이라는 충격적인 보고가 잇달았다. 대전을 유린한 적군은 물밀 듯 남하하는 피난민 대열 속에 민간인으로 변장하고 섞여서 민심을 교란하고 밤이면 게릴라로 돌변하여 곳곳에서 미군들을 괴롭혔다. 한국전에 처음 투입된 미군 병사들은 풋내기 초년병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에게 빨갱이와 이남 사람들을 구분하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가 적인지 모르고 덤벙덤벙 총질만 하고 있는 꼴이었다. 차라리 우리에게 무기를 넘겨달라고 애원하고 싶은 심정이다.

 

<722>

 

피난 생활도 어느 덧 한 달이 다가온다. 이 곳 대구에서 누구보다 고생하는 사람은 조 지사 부인이다. 대통령 부부를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부인의 신세를 지고 있다. 대통령 임시 관저에는 항상 70여명의 고정된 식구들이 북적거렸다. 이 모두가 조 지사 부인의 일거리다. 우리 부부, 각료, 국회의원 비서관, 경호경찰, 수시로 드나드는 군 장성, 미 대사관 직원들, 그리고 가족들과 헤어져 이곳에 내려 온 정부 관리들도 모두가 조 지사 관저의 식객들이었다. 부인은 가정부 2명을 데리고 임시 경무대의 살림을 꾸려나갔다. 밥 짓는 일에서 빨래까지 그만한 중노동이 없었다.

 

대통령은 양복보다 모시 남방을 좋아 했다. 부끄럽게도 나는 모시옷을 다룰 줄 몰랐다. 다듬이질에서 풀 먹이는 일, 다림질을 조 지사 부인이 매일 같이 해 냈다. 결국 조 지사 부인이 과로에 못 이겨서 유산(流産)까지 하게 되었다. 얼굴이며 팔다리가 퉁퉁 부엇는데도 몸조리조차 못하고 일에 매달려야 했다. 대통령은 나에게 계란을 날로 먹자고 했다. 반숙이나 프라이를 하게 되면 그만큼 조 지사 부인의 일이 많아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대통령이 계란을 날로 먹으면 밑의 사람들도 그렇게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사 부인의 일감이 훨씬 줄어든다는 아이디어였다.

 

대구에는 사과와 토마토가 흔했다. 우리 부부는 아침 식사로 사과와 토마토에 날계란 2개씩을 먹기 시작했다. 모시 옷에도 풀을 먹이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대통령의 생각을 눈치 채지 못한 채 전과 같은 식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신 국방장관은 어김없이 오전 5시반이면 나타나서 꼭 반숙을 요구했다. 지사 부인은 대통령 모시기는 쉬운 데 다른 장관님들이 더 힘든다며 웃을 때도 있었다. 대통령은 매끼의 반찬을 세 가지로 제한했다. 임시 경무대의 살림 형편도 어려웠지만 지사 부인의 일손을 어떻게든지 덜어주겠다는 속셈이 있었다.

 

피난길에는 너나없이 단벌 신사들이었다. 장관이고 국회의원이고 고위관리고 간에, 양복이나 와이셔츠를 아끼려고 지사 관저에 들어오면 팬츠만 입고 웃옷은 옷거리에 모셔 놓았다. 그러다가 회의가 있거나 외국 손님이 올 때면 옷을 챙겨 입고 나타나곤 했다. 당시 지사 관저에는 헬린 김(金活蘭) 박사나  임영신(任永信) 여사 같은 여류 인사들도 무시로 드나들었지만 각료들의 팬츠 차림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간혹 서울에서 비참한 소식이라도 들려 오는 날이면 두고 온 가족 생각에 모두들 팬츠 차림으로 둘러 앉아서 엉엉 우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한 고생 속에서 지사 부인은 단 한 번도 괴로운 표정을 짓는 일이 없었다. 정말 훌륭한 부인이었다. 우리 대통령 부부의 가슴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고마운 분이다. [앞으로 계속]

[ 2014-06-13, 16:1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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