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카의 亂中日記 - 6.25와 李承晩 [발췌] ⑤

李東馥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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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카의 亂中日記 - 6.25李承晩 [발췌]

 

<1950817>

 

대통령은 오전 11시 비행기 편으로 부산으로 갔다가 오후 5시쯤 대구로 돌아왔다. 대통령이 공항으로부터 지사 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대부분의 각료들이 모여 있었다. 거기에 조병옥 내무장관과 김활란 씨도 있었다. 이들은 대통령에게 정부를 부산으로 옮겨야 한다고 건의하면서 이 내용을 곧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그들에게 오늘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대통령은 다시 오늘 중에 진해(鎭海)로 갔다가 내일 아침 대구로 돌아온 뒤 이 문제에 대한 결정을 내릴 계획이었다. 대통령은 국민들이 혼란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관저로 돌아오니 이번엔 이철원 공보처장이 손에 사표를 든 채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통령은 그의 사표를 수리하고 후임에 김활란 씨를 임명했다.

 

지사 관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대통령은 진해로 떠나기 위해 공항으로 나갔다. 노블 참사관이 우리를 공항까지 안내했다. 공항에 C-47기 한 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황 비서관, 5명의 경찰관, 요리사 양학준 씨 등을 대동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그런데, 비행기의 조종사는 진해 쪽으로는 한 번도 비행한 적이 없었다. 그는 낙동강을 따라서 계속 내려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승객들이 오히려 진해 쪽으로 가는 산골짜기를 조종사에게 가르쳐 주어가면서 비행을 계속해야만 했다.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해서 내렸더니 한미 양국기를 받쳐 든 의장대가 우리를 마지했다. 그곳엔 미 공군의 헤스 소령(영화 전송가(戰頌歌)’의 주인공)과 한국 조종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던 3명의 미군 교관도 와 있었다. 종군기자로 활약 중이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전 영국 수상의 아들 랜돌프 처칠(Randolph Churchill)의 모습도 보였다. 대통령은 이들 모두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숙소로 향했다. 대구의 먼지와 폭염(暴炎)에 시달리다가 이곳에서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니 몸이 둥둥 날 것만 같았다. 밤에는 마산(馬山) 근처에서 총격전 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하루 종일 강행군을 하느라 몸이 녹초가 되어 오랜만에 단잠을 잘 수 있었다.

 

<818>

 

대통령은 공군의 김정열(金貞烈) 장군을 불러 대구로 떠날 비행기를 대기시키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은 오전 1045분 진해를 출발, 전투기 2대의 호위를 받으며 30분 후 대구에 도착했다. 대구에 도착하니 큰 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정부를 옮긴다는 결정은 대통령이 대구로 돌아올 때까지 보류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대통령이 진해로 내려간 사이에 조 내무가 이를 발표해 버린 것이다.

 

이 발표가 나가자 시민들은 온통 아우성을 쳤다. 서로 앞을 다투어 대구를 빠져나가려고 야단이었다. 대구역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큰 길은 완전히 사람들로 뒤덮여 있었다. 대통령은 잠시나마 대구를 떠났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오후 2시 무쵸 대사와 함께 진해로 떠났다.

 

이날 저녁 진해 해군통제부의 김 대령이 우리 해군이 통영(統營)에 상륙한 뒤 고속초계정을 동원하여 반대편에 있는 작은 섬을 공격했다고 보고했다. 헤스 소령이 와서 미군은 당분간 더 이상 진격을 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미군은 크리스마스 때나 되어야 서울을 탈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대통령이 크게 화를 냈다. 대통령은 수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닥아올 겨울철에 어떻게 들판에서 노숙(露宿)을 할 것이며 식량 사정은 어찌 될 것인지를 몹시 걱정했다. 서울 시민은 물론이고 전국 방방곡곡의 국민들이 그들의 모든 재물과 식량을 공산군에게 강탈당하고 있지 않은가.

 

이날 밤 대통령은 중대한 결심을 했다. 대통령은 도쿄에 있는 맥아더 사령관을 찾아가서 직접 모종의 담판을 하려고 결심한 것이다. 결심을 굳힌 대통령은 내일 이른 아침 부산으로 이동하여 무쵸 대사에게 도쿄행 항공편을 주선하도록 요청하여 오전 중에 도쿄로 가서 맥아더와 회담한 후 아무도 모르게 돌아올 계획이었다.

 

<819>

 

대통령이 비행기로 진해에서 부산으로 이동하려 했던 계획은 비행기가 준비되지 않아 차질을 빚었다. 그래서 우리는 계획을 바꾸어 아침 9시경 조그만 배를 타고 진해를 떠나야 하게 되었다. 다행히 날씨가 아주 청명해서 선박 여행은 그런대로 견딜만 했다. 결국 당초 계획보다는 좀 늦게 정오경에야 부산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통령을 찾아온 무쵸 대사는 전반적으로 상황이 많이 개선되었다고 전제하면서 자신이 대통령의 요청 내용을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끈질기게 맥아더 사령관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세 가지였다. 모든 한국군에게 즉시 무기를 공급할 것, 가능한 최단시일 안에 북진(北進)을 개시할 것,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대구를 사수(死守)할 것 등이었다. 대통령은 무엇보다도 대구를 포기하면 국민들의 사기가 현저히 떨어져서 부산도 지키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점을 걱정하고 있다.

 

배에서 내려 부산으로 갔던 대통령이 오후 230분쯤 배로 돌아와서 우리는 뱃머리를 돌려서 3시간 후 진해로 돌아왔다. 대통령은 일요일인 820일 비행기편으로 대구로 돌아가겠다고 미군측에 통고했다.

 

<820>

 

아침에 김 장군과 김 대령이 와서 오늘은 대구 지역 날씨 때문에 비행이 불가능하다고 보고했다. 대통령은 해군병원을 방문하여 통영 전투에서 부상하여 치료 중인 부상자들을 위문했다. 대통령은 적군으로부터 노획한 무기들을 돌아보았는데 이때 우리 군에 생포(生捕)된 북괴군 장교 한 명이 끌려 왔다. 이 자는 전투를 기피한 부하들 3명을 즉결 처분했다가 다른 북괴군에게 실컷 두들겨 맞은 모양이었다. 이 자는 북괴군이 탄약이 동이 났기 때문에 투항(投降)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노블 참사관에게 무쵸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월요일(821) 오전 중에 비행기편으로 대구로 가겠다는 뜻을 전하라고 일렀다.

 

오후 7시 우리는 헤스 소령, 노블 참사관, 김 대령 등과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나는 6월말 경무대를 떠난 뒤 오늘 처음으로 우리 집 부엌 같은 기분이 드는 진해 별장 부엌에서 저녁 식사를 마련했다. 전처럼 양념이 고루 갖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양파, 풋고추, 감자를 듬뿍 넣고 그럴 듯하게 닭찜을 흉내 내고 상치로 겉절이를 해서 식탁을 차렸다.

 

오랜만에 요리를 만들 기회를 마지한 양 노인도 신이 났다. 대통령이 양 노인을 데리고 다니는 데는 꼭 요리를 만드는 일을 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두 노인네 사에 사연(事緣)이 있어서였다. 나이는 대통령보다 몇 살 아래였다. 일찍이 자식 하나를 두고 상처(喪妻)한 뒤 자식마저 살림을 차리자 사고무친(四顧無親)이 되고 말았다. 대통령은 늘 이 외로운 양 씨를 감싸 돌았고 서울서 피난 올 때도 가정부 대신 양 노인을 데리고 왔다. 그는 얼굴 생김새자 풍채, 희끗희끗한 헤어 스타일이 너무도 대통령을 닮았다.

 

이런 해프닝이 있었다. 대구 임시 관저에 있을 때 두어 번 미8군에서 냉동 고기류와 빵을 보내 온 일이 있었다. 또 시민들 가운데는 대통령께서 드시라고 감자, 옥수수, 계란, 닭 등을 지게에 지고 와서 두가 가는 이들도 있었다. 대통령은 이런 음식 재료가 생기면 몽땅 전방이나 후방 훈련소의 우리 아이들에게 갖다 주도록 했다. 날씨가 무더워서 고기나 빵 같은 것은 하루만 지나면 상하는 시절이었다. 대통령이 양 씨를 불렀다. “자네, 나하고 같이 부산훈련소에 다녀오세. 저 음식 재료들을 가지고 가서 자네 솜씨로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서 우리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세. 음식 재료가 상하지 않게 우리 비행기로 가세.”

 

부산 신병훈련소에서는 대통령이 직접 와서 특식을 제공한다는 연락을 받고 군악대까지 대기시켰다. 비행기 문이 열리고 양 씨가 음식을 먼저 챙기기 위하여 트랩을 내려서는 순간 군악대가 대통령 환영 연주를 시작했다. 얼핏 보면 양 씨는 틀림없는 대통령이었기 때문이었다. 당황한 것은 양 씨였다. 그는 나는 대통령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리려고 두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군악대는 대통령이 환영에 답하는 것으로 오인(誤認)하여 더욱 신이 나서 나팔 소리를 높였다. 이 해프닝 후 대통령은 양 씨에게 자네는 음식 대통령을 하게. 앞으로 내가 부대 시찰을 다닐 때는 자네는 반드시 나를 수행해서 장병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게라면서 반드시 데리고 다녔다.

 

대통령은 이렇게 양 씨를 가까이 끼고 돌았지마는 나는 그가 탐탁치 않았다. 왜냐 하면, 그가 나를 깍쟁이 사모님이라고 호칭했기 때문이다. , 담배 일체 없이 모든 면에서 검약하고 절제하는 경무대에서 양 노인이 가끔 저녁 일을 마치고 술을 마시는 경우가 있었다. 평소엔 얌전했지만, 그는 술만 마시면 주사(酒邪)가 있었다. 밤늦게 직원들을 주방(廚房)에 불러 들이고 있는 재료를 모두 꺼내서 음식을 만들어 자기 마음대로 회식(會食) 판을 벌리는 것이었다.

 

나는 무척 신경이 쓰였다. 어느 집 여자치고 이러한 기분은 나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느 날 밤 11시가 다 되어서 주방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나서 가만히 다가가 보니 양 씨가 술에 취해서 예의 자선 파티를 열고 있었다. “소금 조끔,” “간장 조끔운운 하면서 웃고 떠들고 있었다. 가정부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대통령 사모님께 들키시면 어쩌시려고 이러십니까?” 그러자, 양 씨가 큰 소리를 쳤다. “내 빽이 대통령인데 깍쟁이 사모님이 어떻게 하겠어!” 나는 깍쟁이라는 한국 말을 몇 차례 들은 일은 있었지만 이 말이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나는 대통령에게 양 씨가 나더러 깍쟁이 사모님이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하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대통령은 알뜰하게 살림을 잘 하는 부인네를 칭찬하는 말이지라고 눙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뒤 나는 그 말이 반드시 좋은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통령과 나는 식사 전에는 꼭 기도를 올렸고 성경책은 식탁 옆 찬정 서랍에 넣어두곤 했다. 한 번은 양 씨가 술에 취해서 그 성경책을 베개 삼아 베고 코를 골다가 나에게 들켰다. 나는 화가 나서 대통령에게 달려가서 함께 현장을 가보자고 했다. 대통령은 이 현장을 보고 상보를 접어서 베개를 만들더니 양 씨의 머리를 가만히 들어서 성경책을 빼내고 대신 접은 베개를 받혀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참 좋은 사람이야. 술을 마시고도 성경책을 열심히 읽고 있으니 말이야... 안 그렇소, 마미?” 하며 빙긋이 웃고 있었다. 대통령과 요리사가 아닌 한 노인 사이의 따스한 우정을 그 순간 느끼지 아니 할 수 없었다. [앞으로 계속]

[ 2014-06-29, 21:0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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