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訃告(부고) 받고도 친정 못간 프란체스카
프란체스카의 亂中日記 - 6.25와 李承晩 [발췌] ⑮

李東馥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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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카의 亂中日記 - 6.25李承晩 [발췌]

<195011> 

[프란체스카 여사는 195011월 분 일기 쓴 것을 분실했다면서 이 달 분 일기는 사후에 그 당시 여사가 국외로 보낸 서신 자료를 참고하여 날짜에 관계없이 몇 가지 사실을 적어 놓았다. 여사의 난중일기1126일 분부터 다시금 이어졌다. 다음 내용은 일기가 분실된 기간 중에 있었던 것을 사후에 적은 것 가운데서 추린 것이다]

 

친정어머니가 119일 별세했다는 기별이 왔다. 6.25 전쟁이 난 후 우리 내외와 우리나라를 위해 줄곧 금식기도를 계속하며 밤낮으로 걱정하다 돌아가신 어머니, 막내딸인 나를 먼 나라로 시집보낸 후 그토록 보고 싶어 하셨는데 17년 동안 한 번도 그 딸을 만나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셨다. 전쟁이 끝나는 대로 꼭 찾아가 뵈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이제는 영영 어머니를 뵐 수 없게 되었다. 어머니는 틈만 나면 내 사진을 한없이 들여다보는 것이 일과였다는 말을 들을 때 나는 가슴이 메어질 듯 아팠다
대통령은 어머니 장례식에 다녀오라고 권했지만 내 마음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엇갈렸다. 기분 같아서는 모든 것을 잊고 달려가서 고향의 언니나 친지들과 함께 울기도 하고 회포라도 풀고 싶었다. 그러나, 엄청난 전쟁을 치르며 주야(晝夜)로 쉴 사이 없이 나라 일에 골몰하고 있는 대통령과, 한시라도 그 곁을 떠나서는 안 될 내 처지를 생각하니 여러 날이 걸릴 머나먼 여행길을 훌쩍 떠날 수는 없었다. 결국 떠나기를 포기한 채 바쁜 나날의 일과에 묻혀 슬픈 마음을 달래는 길밖에 없었다.

대통령은 평북 정주(定州)가 고향인 백낙준(白樂濬) 박사를 국무총리에 지명하여 국회에 동의를 요청했으나 부결되었다. 대통령은 당시 조만식(曺晩植)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비보(悲報)를 듣고 백 박사를 국무총리로 지명했는데 국무총리는 이북 사정을 잘 알아야 되고 북한 주민들이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인물이라야 한다는 것이 대통령의 믿음이었다 

미국에서 구축함 2척이 도착하여 부산항에서 명명식이 있었다. 배이름이 압록강호두만강호로 명명되었다. 13일에는 서울평양간의 전화가 6년만에 개통되었다. 곧 서울과 원산, 서울과 함흥간의 전화도 연결된다고 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전쟁고아들을 미군 병사들이 따뜻하게 보호해주고 잘 돌봐 준 사례들이 있어서 참으로 고맙게 생각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처녀들이 얼마나 순결하고 정조관념이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다. 어느 외국 병사가 우리나라 처녀를 반갑다고 껴안았는데 그 처녀는 수치감을 못 이겨서 한강에 스스로 몸을 던져 자살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이 푸에르토리코 반미 단체에 속하는 청년에게 블레어하우스(Blair House) 앞에서 저격당했으나 무사했다. 미국 상원의원 놀랜드(William F. Knowland) 씨가 우리나라의 통일과 부흥 문제를 살피기 위하여 내한(來韓)했다. 놀랜드 의원이 찾아왔던 날 난방시설 불비로 추워서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대통령은 놀랜드 의원에게 유엔이 한국민족을 분단시킨 경계선이었던 38선을 부활시키는 것은 가장 현명치 못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한국군의 38선 돌파가 유엔의 제지로 1주일이나 지연되지 않았었으면 더 빨리 압록강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유엔군과 한국군이 일치해서 북진했더라면 훨씬 희생도 적었고 전과도 컸을 것이다. 1주일 동안 지연된 작전이 상황을 뒤집어놓은 원인이 되었다. 한국군이 미군들과 청천강에서 합류하기 위하여 후진(後進)’할 때 많은 희생이 발생했다. 그러는 동안에 적은 많은 무기와 장비를 새로이 공급받을 수 있었다. 압록강 다리를 폭파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중공군이 손쉽게 한반도로 진입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미국인들은 수많은 중공군이 떼 지어 압록강 다리를 건너서 한반도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결국 압록강 다리를 폭파해야 한다는 결론에 때 늦게 도달했다. 미국의 유화정책가들은 중공군을 제지시킬 제2의 방안은 수풍댐을 할애하여 중국공산당을 만족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은 맥아더 사령부가 수풍댐을 가지고 중국과 흥정을 벌이고 있다는 발표를 듣고 몹시 기분이 상해 있다. 왜냐 하면, 저 비열한 공산집단이 성실한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놀랜드 의원과 함께 동해안을 시찰했을 때 어찌나 혹한(酷寒)이 몰아쳤는지 해안가에도 옅은 얼음이 얼었다고 한다. 하지만 미군들도 제대로 따뜻한 옷을 입지 못하고 있을 정도였다니 우리 한국 군인들의 고생은 이루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 고생과 추위 속에서도 우리 국군과 미군들의 사기는 대단히 높다고 한다. 특히 국군장병들은 기어이 통일의 과업을 완수하겠다는 결의에 차 있다. 그러나, 미국의 유화정책은 우리를 배반하는 것이었다 

유엔은 중공이 만주 지역의 중공업 가동용 전력 공급원인 수풍발전소의 소유를 원하며 바로 그 때문에 한국전에 개입하려 한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통령의 생각은 다르다. 대통령의 생각은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하는 것은 소련의 사주(使嗾)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한반도에 대한 정치적 목적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한반도를 차지하는 나라가 아시아를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공산당들이 한반도를 잃게 되면 중공이나 러시아는 부동항(不凍港)과 광산자원들을 잃게 된다 

실은 미국인들도 북한의 풍부한 광산자원과 공장들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흥남비료공장이나 흥남제련소 및 진남포제련소의 규모와 황금 및 백금 생산량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이 한반도에 완충지대를 설정하거나 전력원(電力源) 소재지를 양보하는 것은 낙타에게 발판을 제공해 줄 것이기는 하지만 공산군측의 군사전략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리라는 것이 대통령의 생각이다.

대통령이 올리버 박사에게 공산당과의 투쟁이라는 제목의 장문의 논설문을 보냈다. 이 글의 내용은 공산당이 세계 각국으로 세력을 확장하게 된 배경과 역사를 설명하고 이와 아울러 어째서 우리가 공산당을 배척하고 이를 상대로 싸워야 하는가에 관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이 어째서 공산당과의 타협을 배격하고 유화정책에 반대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부역자들의 심사와 처리를 맡고 있는 합동수사본부의 김창룡 방첩부대장과 정희택 심사실장 등 여려 인사들이 피의자 조사 과정에서 분실된 줄 알았던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냈다고 보고해 와서 대통령은 무척 다행으로 여기며 기뻐했다. 대통령은 우리 민족이 험난한 앞길을 개척해 나가는 데 있어서 사실을 제대로 기록한 바른 역사야 말로 우리의 길을 밝혀 주는 등불이자 안내자요 이정표(里程標)라고 무척 소중하게 여겼다 

11월 중순 평향행 열차가 개통되어 시운전하는 날 대통령이 기뻐하던 표정이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시간 나는 대로 일선장병을 위문하고 부상병들을 위한해 주며 전재민들 구호 상황을 살피거나 전쟁고아들을 안아주고 어루만져 주던 대통령, 그 바쁜 일정을 도우며 나도 무척 분망한 11월을 보냈다 

1121일자 편지를 보면 대통령의 자주독립노선에 관하여 미국언론이 대통령의 이미지를 손상시키기 위하여 얼마나 움직였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 배후에는 당시 미 국무성 당국의 검은 손이 숨겨져 있는 것은 물론이다. 미국 언론들은 한반도에서 미국이 임의대로 정책을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는 대통령과 그의 자주노선을 비방하고 이를 통하여 대통령의 이미지를 깎아내려 대통령의 입장을 약화시키는 데 골몰하고 있다. 사실은, 대통령이 이 같은 일을 당하는 것이 처음도 아니었다. 미주(美洲)에서의 독립운동 때도 그랬었고, 남한에서의 3년 동안 계속된 美 군정 기간에도 그랬었다. 선의(善意)의 우리 정부를 뒤에서 헐뜯으며 잘못되는 일의 책임을 우리 정부에 전가시키고 한반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힘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한국민들을 인식시키려 광분했던 것이다. 마치 중국 본토에서 자유중국이 당했던 일들이 한반도에서도 그대로 재연(再演)되었었다.

 미국의 국익에 맞게 전쟁을 수행하는 데 무조건 따르게 하는 것이 미국의 목적이라면 대통령은 분명히 그들에게 최대의 방해물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대통령은 미국이 언제나 전쟁에서는 이기면서 평화에는 항상 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반도에서도 미군과 한국군이 이룩해 놓은 전쟁의 성과를 미국이 지켜내지 못하리라는 것이 대통령의 판단이다. 대통령의 판단에 의하면 미 국무성은 급속하게 팽창하는 크렘린 세력에 대항하여 모든 아시아 국가들을 민주국가로 독립시키겠다는 맥아더 장군의 결의가 실현되는 것을 바라지 않고 있다.

 ○ 공군의 박범집 장군이 동해안에 있는 자기 고향 근방 상공에서 전투비행을 지휘하다가 부하 조종사와 함께 전사하여 대통령이 무척이나 애통해 했다. 대통령은 바로 朴 장군이 전사한 지역의 상공을 비행하면서 朴 장군의 넋을 위로했다. 대통령은 이어서 신 국방과 김광섭 비서를 대동하고 함흥시를 시찰하는 길에 그곳 시민들을 위한 연설을 해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당시는 중공군이 한국전에 참가하여 여기저기 나타나고 있고 또 피아의 비행기들 사이에 공중전이 치열해지고 있을 때여서 대통령의 귀경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무척 가슴을 죄었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사흘이 멀다고 전선을 시찰하며 장병들을 격려했다. 평양에서는 학생들이 대통령에게 북한을 대한민국으로 조속히 통일시켜 주고 북한에 우수한 교수와 교과서를 보내달라는 결의문과 진정서를 보내 왔다 

11월 말부터는 특히 일성장병과 병원의 부상자들, 그리고 고아원에 보내 줄 위문품 및 선물 준비 관계로 분망한 나날이었다. 특히 유엔군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 애썼던 기억들이 생생하다. 금녕에 나는 가장 많은 크리스마스 카드를 외국에 보냈다. 그동안 우리에게 구호품을 보내준 친지들에게 가능한대로 성탄절과 새해인사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1126>

 유엔한국위원단이 내한해서 경무대로 대통령을 예방했다. 반도호텔이 미국 대사관으로 사용되고 조선호텔은 영빈관 역할을 하여 외국 귀빈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수복 후 모든 기술을 동원하여 수리했지만 시설이 미비하고 날씨는 추워서 손님들은 물론 호텔 종업원들의 고생이 많았다. 그나마 우리 종업원들의 친절한 영접 태도와 정성이 외국 귀빈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경무대 사정도 손님 접대할 때는 불편이 많았지만 그런대로 성심성의를 다하여 영접했었다. 그러노라니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많이 생겨났는데 특히 양 노인이 미8군에서 보내 온 소금을 설탕 그릇에 담아 놓은 것을 모르고 커피를 대접하면서 이를 내놓아 큰 실수를 했던 일이 있었다.

<1129>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참모총장의 보고를 들은 다음 중공군이 참전한 것은 한국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섭리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끝까지 공산당과 싸울 것이라면서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나라를 구해 주실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1128일 맥아더 장군이 워싱턴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電文을 보냈다. “본 사령부는 능력 범위 안에서 인간적으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지만 지금은 그 통제와 힘이 미치지 못하는 사태에 직면했음.” [앞으로 계속]

[ 2014-08-07, 23:3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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