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舜臣은 사회통합의 상징
각 계층의 존경과 사랑을 받은, 서울, 충청, 전라, 경상도와 善緣(선연)을 가진 인물

趙南俊 전 월간조선 이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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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명량’ 관객 수가 8월29일 현재 1666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李舜臣(이순신) 장군은 이러한 숫자가 의미하듯, 오늘날뿐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여 국민 각 계층으로부터 존경과 사랑받았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사회통합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다.
   충무공은 서울에서 태어나 충청도에서 성장했고 경상도 사람의 천거로 전라좌수사에 부임, 임진왜란의 영웅이 되었다. 경상도 사람의 덕으로 다시 살아났으며 서울 사람의 건의로 복직했다. 戰時(전시)에는 많은 백성들이 그의 주둔지를 따라다녔고, 戰死(전사) 후에는 임금을 비롯한 모든 계층의 인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선조, 인조, 숙종, 정조 임금을 비롯하여 역대 많은 文臣(문신)들이 그의 공훈을 기리는 글을 쓰고 책을 저술했다. 武官(무관)을 천시하던 조선조시대에 이례적인 일이었다.
   우리 사회는 壓縮(압축) 성장에 따른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를 거치면서, 그 과정에서 派生(파생)한 地域間(지역간), 階層間(계층간) 違和感(위화감)으로 큰 葛藤(갈등)을 겪어왔다. 특히 지역갈등은 역대 정부를 거치면서 치유되기는커녕 점차 심화되어온 감이 없지 않다.
   수십 년 累積(누적)된 갈등이 행정기구 하나 만든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정부가 직접 主導(주도)하여 나섰다가는 오히려 엇나갈 수도 있다. 따라서 여러 지역 및 계층 사람들의 感情(감정)의 表皮(표피)를 건드리지 않는 간접적 해결 방안이 있다면 上策(상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권장할 만한 道具(도구)가 歷史(역사)와 藝術(예술)이다. 歷史란 이미 評價(평가)가 끝난 객관적 사실이므로 누구도 異議(이의)를 제기하기 힘들고, 藝術은 인간의 보편적 情緖(정서)에 호소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는 영화 ‘명량’처럼 역사적 인물 李舜臣 장군을 주제로 한 예술 표현방식이 잘 먹혀들고 있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왜 李舜臣인가를 설명하기 전에 그의 연대기를 略述(약술)해본다. 李舜臣은 1545년(인종 원년) 음력 3월8일(양력 4월28일) 德水(덕수) 李씨 貞(정)공과 草溪(초계) 卞씨 사이의 3남으로 서울 乾川(건천)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지금 백병원이 있는 마른내길이 바로 거기다. 德水는 지금 경기도 개풍군에 속하며, 덕수 李씨는 文廟(문묘)에 配享(배향)된 栗谷(율곡) 李珥(이이)를 비롯, 대제학 5명, 정승 7명을 배출한 조선의 명문가로 꼽힌다.
   할아버지 李百祿(이백록)은 1522년 생원시에서 2등으로 入格(입격)했으나, 靜庵(정암) 趙光祖(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고 죽고 그 주위 인물들도 참형을 받자, 趙光祖의 묘소에서 멀지 않은 경기도 용인군 고기리에 은거하다 죽었다. 이 때문에 부친 李貞은 벼슬을 단념하고 43세 때 외가이자 처가 근처인 충남 아산 음봉으로 이사했다. 충무공은 아산에서 尙州(상주) 方씨와 혼인, 3남2녀를 낳고 과거에도 급제했으며 벼슬자리도 얻게 되었다. 더욱이 殉國(순국) 후, 이곳에 충무공의 묘소가 만들어짐으로써 충남 아산은 충무공의 고향으로 자리잡게 된다.
   1576년(선조 9년) 式年(3년마다 치르는 정식 과거) 무과에 급제한 충무공은 北邊(북변)을 지키는 종9품의 초급 장교로 부임한 후, 14년 동안 변변한 벼슬자리를 갖지 못하고 변방으로만 떠돌았다.
   충무공은 세 살 위의 동무로서 경상도 안동 출신인 좌의정 西涯(서애) 柳成龍(1542~1607)의 知人知鑑(지인지감)에 힘입어 출세 길에 나서기 시작했다. 1589년 12월 出六(출륙=고을의 원님으로 나갈 수 있는 종6품이나 정6품이 되는 것을 말함)하여 전라도 정읍현감(종6품)이 되고, 진도군수(부임하지 않음), 가리포 첨사(부임하지 않음)를 거쳐, 임진왜란 勃發(발발 · 1592년 4월13일), 1년 2개월 전인 1591년 2월13일 정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 전라좌수사로 발탁되어 부임하기까지 모두 서애의 천거에 따른 것이었다. 2년 만에 품계가 7계단이나 오른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충무공은 부임하자마자, 전쟁에 대비하여 휘하 각 부대를 점검, 실태를 파악하고 군비를 확충했다. 이러한 노력 덕에 충무공은 왜란 전까지 40여 척의 戰船(전선)을 확보할 수 있었고 1598년 순국한 노량해전까지 만 6년 간 23전23승이라는 세계 戰史上(전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전승을 거둔다.
   1593년 8월 三道水軍統制使(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한 충무공은 1597년 2월, 왜장 加藤淸正(가등청정)을 공격하여 체포하라는 조정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통제사 직에서 해임되고 서울로 압송돼왔다. 여러 차례 刑訊(형신)으로 杖殺(장살)당하기 직전, 경상도 예천 출신인 판중추부사 前 우의정 鄭琢(정탁 · 1526~1605)이 선조에게 충무공을 변호하면서 목숨을 살려달라는 1298字의 伸救箚(신구차 · 구명탄원서) 상소문을 올림으로써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도원수 權慄(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던 충무공은 새로 통제사가 된 元均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후 전사하자, 이조판서 白沙(백사) 李恒福(이항복)의 건의에 따라 1597년 8월3일에 통제사로 복직했다. 복직 한 달 후인 1597년 9월16일, 고작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는 명량대첩을 이끌어냈고, 1598년 11월19일(양력 12월16일) 豊臣秀吉(풍신수길)의 죽음으로 철수하는 왜군들과 노량에서 싸우다 순국했다.
   육군 장교로 무관생활을 시작한 충무공이 1년간의 해군 경험밖에 없었는데도 海戰(해전)에서 연전연승한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수많은 陣法(진법) 훈련, 海路(해로)와 潮水(조수)에 대한 정통한 지식, 火砲(화포)와 우수한 戰船(전선)의 활용, 쉼 없는 敵情(적정) 탐망활동 등을 통해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함으로써 이길 싸움만 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이는 사후의 추상적 분석이고, 구체적인 이유는 사람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戰線(전선)을 따라다니며 기꺼이 屯田(둔전)에 응해 군량미를 생산하고 魚鹽(어염)을 만들어 낸 백성들은 충무공의 중요한 자산이었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대부분 전라도 출신인 무명 해군병사들의 獻身(헌신)이었다. 백제, 후백제를 포함하여 역사적으로 이 지역은 바다에 강한 전통을 이어오고 있었다. 놀이터가 바다인 이 지역 젊은이들에게 바다는 육지보다 친근하고 물길, 潮水(조수)의 특징에 정통했을 터이니 당연한 이치다.
   특히 몇몇 武將(무장)은 충무공에게 큰 힘이 되었다. 羅大用(나대용 · 1556~1612)은 전남 나주 출생으로, 문장이 뛰어났으나 나라의 장래를 근심하여 무예수업에 전념하여 28세 때 훈련원 別試(별시)에 병과로 합격하였다. 왜란 1년 전인 1591년 전라좌수영으로 충무공을 찾아와 자신이 연구한 거북선의 설계도를 보이며 水戰(수전)에 대한 계책을 아뢰었다. 충무공은 크게 기뻐하여 그를 막하에 두고, 거북선 건조를 위시한 모든 戰具(전구)의 준비 계획과 추진에 참여시켰다. 그는 병선 건조에 정력을 쏟는 한편, 충무공과 함께 옥포, 당포, 사천 등 15여 회의 해전에서 왜적과 왜선을 쳐부수는 공을 세웠다.
   鄭運(정운 · 1543~1592)의 시호는 忠壯公(충장공). 전남 영암 출생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웅천현감을 지냈다. 제주 判官(판관) 때 牧使와의 불화로 파직되었다가 1591년 고흥 鹿島(녹도) 만호가 되고, 왜란이 일어나자, 선봉장이 되어 옥포, 당포, 한산도대첩 등의 여러 해전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그는 왜란 초기, 경상우수사 元均의 지원요구에 적극 응해야 한다고 주장, 전라도 수군의 경상도 해역 참전에 큰 역할을 했다. 임진년 9월1일 일어난 부산포 해전에서 왜선을 추격하는 도중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병조참판 추증. 전남 영암의 忠節祠(충절사)에 배향되었다.
   魚泳潭(어영담 · 1532~1594)은 왜란 전, 경상도 함안에 거주했다. 무예에 능하고 담력과 지략이 뛰어나 일찍이 呂島(여도) 萬戶에 특채되고, 1564년 식년무과에서 병과 제3인(전체 제11인)으로 합격했다. 진해 등 여러 鎭管(진관)의 막료로 있으면서 海路(해로)를 익혔다. 왜란이 일어나자, 전남 광양현감으로서 충무공 휘하에서 수로 嚮導(향도 · 인도자)로 활약, 옥포싸움에서 우리 수군이 첫 승리를 거두는데 공을 세우고, 합포, 당항포, 율포 해전 등에서도 공적을 세웠다. 이듬해 충무공에 의하여 助防將(조방장)에 임명되었다. 1594년 전염병에 걸려 한산 통제영에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경남 함안에 있다.
   이런 막료, 용감한 군사, 지역주민의 도움을 두루 받았기 때문이었을까. 충무공은 사헌부 持平(지평) 玄德升(현덕승 · 1564~1627)에게 보낸 1593년 7월16일자 편지에 이렇게 썼다. 『호남은 국가의 보루이며 방벽이니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가 없었을 것입니다(湖南國家之堡障 若無湖南 無是國家).』
   경기도를 본관으로 하고 서울에서 태어난 충무공은 충청도 아산에서 성장하고 혼인하고 자녀들을 낳았으며 묻혔다. 경상도 안동 사람 柳成龍의 知遇(지우)를 입어 전라좌수사가 되었으며, 전라도 출신 병사들의 헌신과 전라도 출신 羅大用, 鄭運 등의 보좌를 받았으며 물길에 밝은 경상도 함안 사람 魚泳潭의 도움으로 해전에서 연전연승했다. 또 경상도 예천 사람 鄭琢의 救命(구명)상소로 목숨을 건졌으며 서울사람 李恒福의 천거로 다시 수군통제사가 되어 명량, 노량대첩 등을 이끌어냈다.
   순국한 직후 우의정이 증직되었고, 1604년(선조 37년) 조정의 논의를 거쳐 宣武(선무) 1등 공신에 책록됐으며, 풍덕부원군,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643년(인조 21년) 忠武(충무)의 諡號(시호)가 내려졌으며, 1704년(숙종 30년)에 전국 儒生(유생)들의 상소로, 아산에 현충사가 세워졌다. 死後 200년이 지난 1793년(정조 17년) 영의정에 추증되는 한편, 정조의 명에 따라 그를 기리는 《李忠武公全書(이충무공전서》가 편찬, 간행되었다. 日帝시대인 1932년 6월에는 온 겨레가 성금을 거둬 현충사를 重建(중건)하고 靑田(청전) 李象範(이상범)화백이 그린 影幀(영정)을 봉안했다. 그가 시대를 초월하여 각 계층으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는 증거다. 이보다 더 지역 간, 계층 간의 간극과 갈등을 허물 만한 인물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 2014-08-30, 16:4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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