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나의 친구 이정엽-13
前 CIA 요원 마이클 리의 現代史 秘話-13/병원에 도착하니 군의관 한사람이 우리를 데리고 영안실(Mortuary)로 가서 냉동서랍을 열고 거기에 누워있는 내 친구의 시체를 보여주었다. 그 순간 이정엽의 부인은 “여보, 당신이 왜 거기에 누워있어요?”하며 오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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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을 쏘고 대포를 쏘는 전쟁은 끝나고 휴전상태에 들어갔지만 북한은 끊임없이 전투태세를 유지하며 간첩을 남파했다. 북한은 남한사회에 친북지하조직을 구축하고 대한민국을 전복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다 하였으며 지긋지긋하도록 남한을 괴롭혀왔다. 전방에서는 북한의 인민군과 민간인들이 北에서 살기가 너무 힘들어 남한으로 귀순하고, 후방에서는 침투한 간첩들이 자수하거나 체포되어 대방동 수용소에 몰려왔다.
  
  일반 국민들은 평온하게 생업에 열중하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을 때, 韓美 양국 정보기관은 보이지 않는‘숨은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美 502군사정보단의 활동이 가장 치열하였고 대한민국의 안녕을 지키기 위해 위대한 역할을 했다. 심문관들이 어떤 때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야근을 하는 경우가 허다했으며 전국을 누비며 지방출장 근무도 했다. 韓美 양국 심문관들은 모두 애국심 투철하고 노련한 심문관들이었지만 특별히 양국정부가 인정하는 유능한 심문관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치안국(경찰청) 소속 대공심문관 김오대 씨와 김주홍 씨가 있었고, 국군에서는 한철흠(전 안기부 대공수사단장) 씨가 있었고, 보안사에서는 한문석 씨가 있었다. 그리고 미군 측에서는 나와 이정엽이 거론됐다.
  
  이정엽은 전북 전주출생이고 나는 충남 부여출생으로 능력이나 인간적 기질이 비슷하여 서로 믿고 의지하며 아주 친하게 지냈다. 우리는 서로를 존경했고 한쪽이 잘되어도 절대로 시기 질투하는 일이 없었다. 가족도 둘 다 2남 1녀를 두고 가족끼리도 친하게 지냈다. 평생을 살면서 마음과 뜻이 통하는 친구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고들 하는데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을까.
  
  이정엽의 영내 가명은 쥰(June)이었고 나의 가명은 마이클(Michael)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미군 측 10여 명의 심문관 중에서 늘 업무분담량이 가장 많았으며 중요한 대상이나 특별한 대상의 심문을 거의 전담했다. 1969년 3월 말 중부전선에서 인민군 장교 한 사람이 귀순했는데, 이때 역시 이정엽과 내가 교대로 집중심문을 했다. 이틀간 밤 12시까지 강행군을 하고 중요한 요점심문이 끝나는 3월30일 새벽 1시에 퇴근했다. 기진맥진한 나는 집에 가서 깊은 잠을 잤고, 아침에 기상할 시간도 아닌 꼭두새벽에 부대에서 급히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분명히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부대에 도착하니 부대장과 장교들이 모여 있었다. 침통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빨리 이정엽의 부인을 모셔오라는 것이었다. 이정엽이 어젯밤 귀가하는 길에 운전병이 과속으로 몰고 가던 차가 전복해 아스팔트 길바닥에 머리를 부딪치고 뇌진탕으로 사망했다는 이야기였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내 눈앞에 세상 만물이 새까맣게 보였다. 양쪽 귀가 울기 시작하더니 나는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정신을 가다듬고 이정엽의 집에 가서 부인을 데리고 용산에 있는 美 8군 병원에 갔다. 초조한 부인이 “우리 집 그이가 교통사고라도 나서 많이 다치셨나요?”하고 물을 때, 나는 북받치는 눈물을 참고 “모르겠어요, 가봐야 알겠네요” 라고만 대답했다.
  
  병원에 도착하니 군의관 한 사람이 우리를 데리고 영안실(Mortuary)로 가서 냉동서랍을 열고 거기에 누워있는 내 친구의 시체를 보여주었다. 그 순간 이정엽의 부인은 “여보, 당신이 왜 거기에 누워있어요?” 하며 오열했다. 어젯밤까지도 같이 일하던 친구가 불과 몇 시간 후에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너무나 허무하고 허망했다.
  
  502군사정보단은 이 친구의 사망을 모두 슬퍼하였고 부대장(部隊葬)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나는 평생에 이 친구의 장례식 때처럼 슬피 울어본 일이 없었다. 아까운 37세의 젊은 나이에, 그리고 유능한 인재로 아직도 할 일이 많았는데, 그가 떠난 것은 우리 부대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커다란 손실이었다. 나는 이 친구를 보내고 오랜 세월 동안 허탈감 속에서 살았다. 꿈 속에서 살아있는 모습으로 그를 만나기도 했다. 꿈에서 깨어나면 온몸이 저리고 아팠다. 이 친구는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지금 안양에서 조금 떨어진 청계산 천주교 묘지에 누워있지만 내 가슴 속에는 죽을 때까지 그가 살아서 숨쉬고 있다.
  
  <계속>
[ 2014-10-06, 13:3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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