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넘어가는 실미도 반란군의 최후 증언을 내가 들었다!-16
前 CIA 요원 마이클 리의 現代史 秘話-16/영화‘실미도’에서는 대원들이 버스 안에서‘붉은 깃발’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제작진의 실수다.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영화에서는 저들이 출동한 군경과 대치하여 총격전을 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전혀 사실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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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 1971년 8월23일 발생한 실미도 사건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해 Yahoo와 Google의 검색 창에 들어가 보았다. 정확한 기사가 하나도 없고 모두 이야기의 앞뒤가 맞지 않으며, 차이가 나서 어디에 기준을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특히 1999년도에 발표한 소설가 백동호의 작품을 근거로 제작하고 2003년 12월 개봉한 영화 ‘실미도’의 내용도 사실과 전혀 다르다. 그러나 누군가는 역사의 진실을 바르게 기록해야 한다는 욕심이 생겨, 내가 직접 보고 들은 일들을 정리해 보겠다.
  
  그날 오후 1시경 라디오 긴급방송이 전국에 충격적인 뉴스를 전했다. 북한의 124군부대의 1개 특공대가 백주에 인천 부근 해안에 상륙하여 지금 서울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 뉴스를 들은 대방동 공군본부를 비롯해 대방동 경찰파출소 바로 뒤에 내가 근무하고 있던 美 502군사정보단 수용소에서는 비상경계 태세를 취하고 군인들이 기관총을 내걸고 철모를 쓰고 작전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 오후 2시경 대방동 로터리에서 총격전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몇 분 후 상도동 입구 유한양행 부근에서 폭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戰時(전시)와 같은 그런 분위기였다. 그때 나는 황급히 그쪽을 향하여 달려갔다. 그리고 유한양행 건물 바로 앞에서 가로수를 들이받고 서 있는 시외버스 한 대를 보았다. 그 안에서 對전차 수류탄으로 자폭한 20여 명의 시체가 진동하는 피비린내를 풍기면서 누워 있었다. 피가 차 밖으로 흘러내리고 시체들은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창자가 배 밖으로 흘러내려 참으로 처참했다. 주변에는 주민과 행인들이 모여와서 이 비참한 광경을 먼발치에서 보고 있었다. 육군 소령 한 사람이 무전기로 어디에다 상황을 보고하고 있다가, 차 안에서 아직 숨이 붙어 있어 신음하고 있는 한 사람을 권총으로 사살하였다. 그리고 차 안에는 생존자가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 육군소령의 소속과 신분을 알 수가 없었다.
  
  다. 그때 내 바로 옆에 있던 초등학생 한 아이가 “아저씨, 한 사람은 살았어요. 아까 누가 그 사람을 데리고 영등포 병원으로 갔어요”라고 했다. 이 말을 듣자마자 나는 지체 없이 지나가는 오토바이에 동승해 영등포로 달려갔다. 그 당시에는 대방동과 신길동을 지나자마자 영등포 구청이 있었고 구청 바로 옆에 적십자병원이 있었다. 적십자병원 앞 광장에는 모든 교통이 차단되었고 6관구 사령부 헌병들이 설치고 다니며 사람들이 병원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단속하고 있었다. 민간인인 내가 들어서자 그들이 나를 저지했으나 나는 신분증을 제시하고 병원 응급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참으로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소속을 알 수 없는 육군 중령 한 사람이 권총을 빼어 들고 침대에 누워 다 죽어가는 청년 한 사람에게 강압심문을 하고 있었다.
  
  “너의 소속이 어디야? 124군부대 틀림없지? 공작임무가 뭐야? 빨리 말해 이 새끼야!”
  
  그러나 수류탄 파편으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고 출혈이 심해 언제 숨을 거둘지 모르고 깔딱거리는 그 청년은 “무엇을 망설이나, 빨리 쏴라!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없으니 그렇게 애쓰지 말고 빨리 죽여라!”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그 육군 중령에게 “당신은 어디서 나온 사람이요?” 하고 묻자 그는 나에게 “당신은 또 뭐요? 신분이 뭐요?” 하면서 째려보았다.
  
  나는 그때 마침 도착한 보안사령부 사복차림의 우리 부대 파견관에게 그 육군 중령의 소속과 관등성명을 파악하라고 지시하고 “당신은 권총을 내리고 이쪽으로 비켜서시오”하면서 그 죽어가는 청년의 심문을 시작했다.
  
  라. 그는 나에게도 마찬가지로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손을 움켜쥐고 호소했다.
  
  “당신이 이대로 떠나가면 절대로 안 된다. 사람에게는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있다. 그것은 진실이다. 그 진실을 말하지 않고 가버리면 그것은 참으로 비겁한 일이다. 당신은 그 소중한 목숨을 그렇게 헐값으로 끝내지 마라.”
  
  그는 조금 전 내가 육군 중령에게 호통친 것이 맘에 들었는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내 맘에 듭니다. 당신 같으면 내가 모든 진실을 말하겠소. 다른 사람들은 다 나가주시오.”
  
  그때 나는 언제 숨을 거둘지 모르는 그 청년을 눈물 젖은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정신을 차리고 대화를 했다. 그의 첫마디가 자기들은 북에서 내려온 124군부대의 특공대가 아니고 대한민국 공군의 특공대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약 10분간 대화를 했다. 그리고는 그 사람의 혀가 움직이지 않아 더 이상의 대화가 불가능했다. 간호사들이 와서 그를 급히 다른 장소로 데리고 갔다.
  
  마. 그때 죽어가는 청년으로부터 들은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반란군이 타고 간 버스를 운전한 김종철(당시 29세)이었다. 내가 생존자와 대화를 나눈 유일한 조사관이었는데 이 사실은 어디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다. 아래는 대화 내용이다.
  
  “우리는 北에서 내려온 특공대가 아니다. 우리는 인천 실미도에서 특수훈련을 받은 대한민국 공군 특공대원들이다. 우리는 북한에 침투해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김신조 특공대처럼 31인조로 구성되었고 인간이 상상할 수없는 지옥훈련을 3년 4개월 동안 받았다. 우리들은 전국 각지에 있는 교도소에서 뽑혀온 사형수·무기수들인데 어차피 세상에 다시 나가지 못하고 죽을 목숨이다. 한번 기회를 주어 나라를 위한 귀한 임무를 맡고 성공하면 모든 과거의 허물을 씻고 고향에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평생 편히 살 수 있도록 연금을 준다고 정부가 약속했다.
  
  우리는 그 제안을 수용하고 충성맹세를 한 다음 목숨을 걸고 훈련을 받아왔다. 그런데 언제 우리가 그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지 전혀 소식이 감감하고,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확인된 바는 아니지만 그 임무가 취소되었다. 국가기밀 누설을 염려해 우리들을 귀신도 모르게 처단해버릴 것이란 말이 돌았다. 기간요원들에게 물어보아도 확고하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하기는커녕 묵묵부답이었기 때문에 우리들의 의혹은 점점 굳어져갔다. 훈련 초기에는 우리들을 아주 잘 먹이고 부식도 풍족하였는데, 요즘 와서는 기간요원들이 부식비를 다 떼어먹고 소같이 먹는 우리는 배가 고파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 기간요원들의 잔학행위는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어차피 더러운 운명을 타고나왔고 곧 죽어야 할 사형수들인데 무엇을 두려워하랴, 서울로 가서 대통령을 만나고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따져보자, 그리고 죽자. 그래서 우리들은 오늘 새벽에 기간요원 12명을 사살하고 송도 해안에 상륙해 인천으로 나와 시외버스를 납치하고 서울로 진입하는데 대방동에 올 때까지 저항이 몇 번 있었지만 우리는 계속 달렸다. 대방동 파출소 앞을 지날 때 잠복한 경찰들의 사격으로 우리가 탄 버스의 우측 앞 타이어에 펑크가 나서 더 이상 전진이 불가능하게 됐다. 이후 유한양행 건물 앞에서 가로수를 들이받고 버스가 멈췄다. 그때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소지하고 있던 대전차 수류탄으로 자폭을 했다.”
  
  바. 내가 급히 귀대하려고 할 때 정래혁 국방장관이 도착했다. 아무도 그에게 보고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나는 생존자와 대화를 나눈 유일한 사람으로서 자청해 유일한 생존자가 진술한 내용을 보고했다. 그분은 따라온 수행원들에게 "아무도 접근시키지 말라"고 지시하고 나를 빈 방으로 데리고 가서 문을 잠근 뒤 나의 브리핑을 들었다.
  
  “소속이 어디시오?”
  
  나는 502군사정보단 소속이라고 신분을 밝혔다. 그리고 정래혁 국방장관은 안색이 갑자기 검게 변하면서 아주 괴로워하는 표정으로 나에게 신신당부하기를 한국 정부가 정식으로 발표할 때까지 내가 오늘 알아낸 내용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문을 열고 나오니 문밖에 보안사령부 보안처장 김교련 대령이 와 있었다. 정래혁 장관이 그에게 무어라고 귓속말을 한 후 김 대령은 내가 만났던 그 부상환자를 싣고 병원을 떠났다.
  
  후에 듣기는 그가 병원을 떠난 약 30분 후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날 오후 6시30분경, 정래혁 국방장관은 뉴스를 통해 그날 서울에 진입한 특공대는 北에서 내려온 공비가 아니고 한국 군대 내의 특수범죄자들로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그는 그날 오후 7시에 국방장관직을 사임했다. 따라서 공군참모총장 김두만 대장도 사임했다. 또한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한 후 공군 내에서는 책임자 몇 사람이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 국방장관 후임에는 1971년 8월24일에 유재흥 씨가 임명됐고, 공군참모총장 후임에는 1971년 8월25일에 옥만호 대장이 임명됐다.
  
  사. 실미도 사건은 민감한 국가기밀의 하나로 역사 속에 묻혀 있었는데 2003년 12월에 개봉된 영화 ‘실미도’로 인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영화는 사상 최초로 1000만 명 이상의 관객들이 보았다고 한다. 나도 이 영화를 보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예술작품의 하나로 창작의 자유를 인정한다고 하지만 그 내용이 사실과 다른 점이 많아 국민들에게 잘못된 인식과 혼란을 던져준 과오는 피할 수 없다. 당시 좌경정부 밑에서 여러 조직과 시민단체들이 과거 정부의 어두운 면을 파헤쳐 흠집을 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 영화도 반란군들을 사실과 다르게 미화했다고 하는 비판도 있었다. 세상에 알려진 잘못된 이야기와 공개된 자료들을 비교하면서 실미도 사건의 진실을 재정리하면 이렇다.
  
  아. 1968년 1월21일, 북한 124군부대의 제6기지 소속 31인조 특공대가, 즉 김신조 특공대가 청와대 기습작전에 실패한 후, 중앙정보부 김형욱 부장이 육해공군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을 긴급 소집했다. 우리도 그와 유사한 특수부대의 창설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여 모두 동의하고 1968년 4월4일부로 실미도 부대가 창설됐다.
  
  실미도는 인천광역시 중구 무의동에 속한 무인도이다. 이 부대는 서울 구로구 오류동에 있는 공군 2325부대의 209파견대 교육대라는 공식 단대호를 갖고 있었으며, 자체 내에서는 창설 일자를 따서 684부대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이 부대의 운영과 재정, 훈련과 임무, 보안관리 등은 전적으로 중앙정보부의 지시에 따랐다. 31명의 대원들은 전국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신체 강인한 사형수와 무기수 중에서 선발했다.
  
  특수임무를 성공하면 모든 과거의 범죄기록을 말소하고 고향에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평생 편히 살 수 있게 정부가 보장한다는 약속을 받고 충성맹세를 했다. 어느 조직에서는 그 31명이 모두 사형수·무기수가 아니라 깡패, 소매치기, 시정잡배, 서커스 단원 출신이라고 하고 영화 ‘실미도’가 저들을 사형수·무기수로 표현한 것은 명예훼손이라며 유가족들을 충동해 법원에 고소했으나, 그 문제가 대법원까지 올라가 대법원은 영화제작사의 勝訴(승소)로 종결을 지었다. 저들이 사형수·무기수였다는 사실은 위에서 언급한 생존자의 진술과 후일에 발표한 前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증언과 그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의 증언이 일치한다.
  
  자. 3년 4개월 동안 혹독한 훈련을 받으면서 31명 중 7명이 사망했는데, 그 사망원인을 분석하면 1명은 훈련 중 익사, 2명은 탈영으로 즉결처분, 1명은 하극상으로 처형, 그리고 3명은 무의도 강간사건으로 처형된 것으로 되어있다. 훈련 중에는 전시상황으로 인식하고 교육대장에게 생사여탈권을 부여했다고 한다. 나머지 24명은 기간요원 24명과 함께 지옥생활을 계속하는데 날이 갈수록 훈련은 고되고, 급식의 질은 떨어지고, 임무수행을 위한 공작명령은 언제 떨어질지 감감하고, 그 부대를 용도폐기한다는 말이 돌고 있을 때 저들은 극도로 초조하고 불안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의 이후락 부장은 평양을 드나들며 통일을 지향하는 남북화해 무드를 조성하고 있었으며, 드디어 1972년 7월4일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
  
  그래서 정부 측에서도 실미도 부대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지, 그 부대를 폐쇄하면 대원들을 어떤 식으로 해산해야 하는지 확실한 대안이 없이 고민하고 있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영화 ‘실미도’에서는 정부가 그 부대를 폐쇄하고 대원들을 극비리에 처결할 계획이었다고 암시했는데, 그것은 전혀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 정부의 실책도 부인할 수 없다. 아무리 남북화해 무드 조성을 위해 그랬다 할지라도, 목숨을 걸고 나라의 부름에 응하고 충성하여 더러운 과거를 씻고 새로운 인생을 찾기 위해 지옥훈련을 감수한 저들에게 너무나 무책임했다. 실미도 부대를 용도변경이나 목적변경으로 계속 유지를 했거나, 더 이상 필요가 없다고 했다면 그것은 정부의 시행착오이지 저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런 비참한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에 저들에게 신심이 가는 희망적 대안을 제시하고 국가를 위해 계속 충성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어야 했다는 생각하게 된다.
  
  차. 그때의 극한상황을 이제 와서 쉽게 판단하거나 평가하기 어렵다. 그러나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24명의 훈련대원들이 반란을 결심하고, 1971년 8월23일 새벽6시 기간요원 12명을 사살한 후 실미도를 이탈했다. 교전 중 기간요원 6명은 도피하다가 바다에서 익사했고 나머지 6명은 죽음을 면했다. 그때 사망한 기간요원들은 전사자로 취급해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유족들에게는 적정한 보상금이 지급됐다. 실미도 내에서 교전 중에 대원 2명도 사살되었고, 잔여 22명은 그날 12시20분경 송도 해안 독배부리에 상륙했다. 이들은 33사단 102연대 6중대 관할지역을 통과한 후 시내버스 한 대를 납치해 이동하다 버스 뒷바퀴에 펑크가 나서 오후 1시경 태화운수소속 시외버스 5-1681호를 납치하여 갈아타고 서울을 향해 돌진했다. 어떤 기록에는 상륙 직후 출동한 육군병력과 교전하여 대원 4명이 또 사살되었다고 하는데 다른 기록에서는 그런 사실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반란군 버스가 이동하는 과정에서 저항이 있었고 민간인 13명, 경찰 2명, 군인 2명의 부상자와, 민간인 6명과 경찰관 1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카. 그들이 대방동 유한양행 건물 앞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15분경이었다. 일부 보도에 의하면 3~4명의 생존자가 있었고 재판을 거쳐 1972년 3월10일 처형되었다고 하나, 내가 유한양행 건물 앞에서 자폭한 현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거니와 그때 생존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생존한 기간요원 6명은 전역할 때 철저한 보안교육을 받고 향후 30년간 실미도 사건에 대해 함구할 것을 지시받았다고 한다.
  
  영화 ‘실미도’에서는 대원들이 버스 안에서 ‘붉은 깃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제작진의 실수다.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영화에서는 저들이 출동한 군경과 대치하여 총격전을 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전혀 사실과 다르다. 그때 저들이 버스 안에서 자폭했을 때 주변에는 교통정리와 주민들과 행인들의 접근을 단속하는 경찰관 몇 명과 우연히 그곳에 나타난 소속불명의 육군 소령 한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경찰이나 군인들이 출동하여 저들을 저지한 사실이 없다. 군인들이 출동한 것은 저들이 자폭한 후 한참 후의 일이다. 아! 이 사건 역시 민족분단으로 몸부림친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계속>
  
[ 2014-10-08, 11:1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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