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賢姬 이야기(中)-美 정부, 독자수사로 테러리스트 확인-24
前 CIA 요원 마이클 리의 現代史 秘話-24/김현희는 “했습니다” 또는 “아닙니다” 할 때 말끝을 빨리 끝내는 북한 억양을 시종일관 사용했다. 남한사람들이 흉내낼 수 없는 북한 특유의 사투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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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방증자료의 대조와 분석
  
  안기부 조사가 끝나고 이 사건의 내용이 보도됐을 때에도 북한은 악랄하게 남한의 조작이라고 우겨댔다. 국내 친북세력이 이에 동조했고 심지어 일본의 <교도통신>을 포함한 해외 언론에서도 이 엄청난 사건의 진실성 여부를 놓고 약간의 의문을 제기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때 국제테러에 대해 가장 많은 관심을 갖고 또 방대한 자료와 수사능력을 갖추고 있는 미국정부가 개입했다. 한국정부의 승인과 협조를 받고 미국은 이 사건의 독자적인 수사를 진행했다.
  
  수사내용은 한국정부가 발표한 내용이 100%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했을 뿐 아니라 추가적으로 확고부동한 단서와 근거를 제시했다.
  
  첫째, 김현희가 안기부 조사관들에게 진술한 그 방대한 분량의 진술 내용과 미국 측에 진술한 내용에서 추호도 차이점이 발견되지 않았다. 만약 김현희가 북한 공작원이 아니고 남한에서 조작한 인물이며 남한정부가 훈련을 시켜 본인이 북한공작원인 것처럼 행동을 했다고 가정하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김현희는 지능지수가 높고 대단한 기억력을 갖고 있었지만 세상에 뛰어난 천재라 할지라도 진실이 아니면 허위는 반드시 드러나게 마련이다.
  
  심리학적으로 피의자는 수사관 앞에서 거짓말은 세 번 이상 사용할 수 없으며 3일 이상을 지탱하지 못한다. 그의 출생, 학교생활, 가족관계, 공작원 포섭과정, 공작교육을 받은 초대소 위치와 환경, 복잡하고 어려운 공작교육내용, 심지어 매일매일 일과 스케줄까지, 접촉한 인물들, 외국어학습, 공작실무교육과 유럽 주요도시와 마카오까지 여행하면서 실시한 해외실습, 중국실습, 마카오실습, 중국 광주 2차 파견 및 암호문 해독 등 전문지식과 실제경험이 없이는 그가 다 기억할 수가 없다.
  
  1988년 2월4일, 미국 국무성은 하원 외무위원회 아시아-태평양 소위원회(위원장 스티브 솔라즈)가 주재한 KAL-858기 폭파사건에 관한 청문회에서 미국정부의 독자적인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그 내용이 1988년 2월5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포함한 국내 일간신문에 보도되었다. 그때의 보도내용을 간추려 반복하면 다음과 같다.
  
  클레이턴 맥나마웨이 국무성 테러담당 대사가 김현희 자백의 진실성을 뒷받침하는 미국의 독자적인 보강증거를 제시했는데 그 독자적인 보강증거의 내용은 이렇다.
  
  “고도로 훈련되고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미국정부의 관리가 김현희를 직접 만나 조사를 했고, KAL-858기 폭파는 북한 최고지도자의 계획과 지령에 의한 범행이며 김현희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 임무를 수행한 북한 테러리스트인 것을 확인하였다. 김승일과 김현희가 사용한 자살용 독약은 청산염으로 과거에도 북한 공작원들이 사용했다. 그들이 소지한 위조여권은 일본정부가 북한 간첩으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의 협조로 일본의 실재인물들의 인적사항을 도용한 것이다.”
  
  미국의 조사관이 많은 북한인물 사진을 제시하고 아는 사람을 지적하라고 했을 때 김현희는 그 많은 사진 중에서 두 사람을 골라내어, 한 사람은 김승일과 김현희가 공작임무를 받고 평양을 떠날 때 김정일의 특별지령문을 읽어주고, 김정일 초상화 앞에서 충성 맹세 의식을 집행한 간부이며, 또 하나는 그가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 체류했을 때 그를 관리했던 북한 공작원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이 사진의 얼굴들은 한국정부도 미국의 조사관도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이며 워싱턴에서는 정확한 정보라고 판정했다. 당시 한국은 공산주의 국가인 헝가리와 국교가 없었기 때문에 현지공관도 없었고 그와 같은 자료는 사용할 수가 없었다.
  
  김현희는 조사를 받을 때 북한 특유의 용어를 사용했고 “했습니다” 또는 “아닙니다” 할 때 말끝을 빨리 끝내는 북한 억양을 시종일관 사용했다. 그가 사용한 용어들은 남한사람들이 흉내낼 수 없는 북한 특유의 사투리였다. 그래도 김현희를 한국 안기부가 조작하고 훈련한 인물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라. 무엇이 진실인가
  
  김현희는 당시 26세로 발랄하고 무성한 청춘의 좋은 시절을 보내야 할 나이에 국제 테러리스트라니! 그의 범죄를 따지기 전에는 일단 그도 우리의 귀여운 딸이다. 누가 그를 저렇게 비참하게 만들었나. 북한은 여러 면에서 국가라기보다 오히려 광신도 집단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절대독재자(교주)가 명령을 하면 신도들은 앞뒤를 따지지 않고 신명을 다 바쳐 따라야 한다. 과거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컬트(cult) 집단이 그러했다. 그들은 절대로 설득이나 타협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며 결국에는 파멸로 끝나는 사람들이었다. 북한의 김정일 독재집단이 바로 그런 집단이며 생명을 걸고 그를 추종하는 인민이 약 300만 정도 된다. 나머지는 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노예 노동자들이다. 남한에도 김정일 독재집단을 동조하는 얼빠진 인간들이 약 500만 정도라고 하니 참으로 통곡할 일이다. 북한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위한 동상이나 조형물이 약 3만5000개나 된다고 한다. 유네스코 보고에 의하면 남북한이 통일이 되어도 이 더러운 조형물을 제거하는데 약 10~15년이 걸린다고 한다.
  
  김현희도 태어나서부터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란 희생물이다. 그가 깨닫고 뉘우치기 전까지는 수많은 동족의 생명보다 김정일의 악독한 계략을 절대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이다. 그런 체제 밑에서 아리따운 처녀 김현희가 무시무시한 국제 테러리스트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다시 한 번 짚어보겠다.
  
  김현희는 1962년 1월27일 평양시 동대원구역 동신동에서 아버지 김원석, 어머니 임명식의 2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1963~1967년에는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 3등서기관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아바나에서 살았고, 1968년 9월에는 평양시 서성구역 하신동 하신인민학교에 입학, 재학 중 영화에 兒役(아역)으로 출연했다. 1972~1977년 평양 중신중학교에 재학, 중1때 또 아역으로 영화에 출연했다. 1977년 8월 김일성 종합대학에 입학해 예과 1년을 마치고, 1978년 9월 평양외국어대학 일본어과에 입학했다. 1980년 3월 외국어대학 2학년 때 3차 면접시험을 거쳐 당에 소환되어 중앙당 대외정보조사부 공작원으로 그의 비운이 시작됐다.
  
  이후 여러 비밀 초대소에서 밀봉교육을 받았다. 1980년 4월~1981년 4월에는 금성정치군사대학(공작원양성소)에서 체계적 대남공작 기초교육을 받았다. 1981년 4월~7월에는 남한실정 교육을 받았으며, 1981년 7월~1983년 3월에는 일본어와 일본인화 교육을 받았으며, 1982년 4월13일 노동당에 입당했다. 1983년 3월~1984년 7월에는 본격적인 공작원 실무교육을 받았다. 1984년 8월~10월에는 당시 70세 가량의 노인 김승일과 배합, 김승일은 하치야 신이치로 김현희는 하치야 마유미로 일본인 父女(부녀) 위장을 한 뒤, 임무수행 훈련을 시작했다.
  
  1984년 8월15일 두 사람은 담당지도원 1명과 함께 평양을 떠나 모스크바, 부다페스트, 비엔나, 코펜하겐, 프랑크푸르트까지 여행했다. 담당지도원은 마카오로 가고 김승일, 김현희 조는 취리히, 제네바, 파리로 갔다. 9월20일 파리에서 김승일은 서울로 가고 김현희는 방콕, 홍콩을 거쳐 마카오로 갔다. 9월26일 담당지도원과 김승일과 김현희가 마카오에서 다시 합류했다. 그리고 김승일, 김현희 조는 중국 광주와 북경을 거쳐 평양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이번 해외여행에서 3만3000달러를 사용했다.
  
  1985년 1월~6월에는 평양 용성 5호 초대소에서 중국어 교육을 받았다. 1985년 7월~1986년 8월 김현희는 김숙희와 한 조가 되어 중국 광주에서 현지실습과 북경어와 광동어 실습을 했다. 두 사람은 <평양중앙방송>에서 발신되는 암호통신을 수신·해독하는 실습도 했다.
  
  1986년 8월~1987년 1월 두 사람은 마카오로 옮겨 명주대 아파트 1동 3층 A호실에 살면서 하치야 마유미와 다가하시 게이코로 된 위조 일본 여권을 사용했다. 여기서도 그들은 평양에서 발신되는 암호통신을 해독하는 실습을 계속했고 미용실, 은행, 영화관, 환전소, 택시 등 자유세계에서의 편의시설 이용법을 익혔다.
  
  1987년 2월~9월 평양에 돌아가 용성 43호 초대소에서 사상 재무장 교육을 받았다. 같은 해 4월15일에는 김현희가 가족을 만나러 휴가를 갔다. 이것이 김현희가 부모를 만나는 마지막일 줄 누가 예측했겠는가.
  
  1987년 9월~10월 마카오 이민국에서 대륙으로부터 밀입국한 난민들에게 영주권을 준다는 뉴스를 접하고 김현희와 김숙희가 다시 마카오 인접도시 광주로 파송됐다. 김현희는 마카오에 잠입하여 우잉(吳英)이란 흑룡강성의 실존인물 이름을 도용하고 출생과 가족관계 등 구체적 내용을 사전에 암기하고 있다가 마카오 영주 신분증을 쟁취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1987년 10월4일 김현희는 단독으로 귀국하라는 급한 지시를 받고 10월7일 평양에 도착했다. 중요한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
[ 2014-10-20, 03:3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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