普天堡(보천보) 전투와 가짜 金日成의 實體(下) -38
前 CIA 요원 마이클 리의 現代史 秘話-38/가짜 김일성이 49년간 독재하면서 북한을 생지옥으로 만들었다. 이것도 모자라 권력을 자식에게 물려주어 그 애비보다 몇 배나 더 무서운 독재자로 전 세계에서 가장 지독한 인민탄압을 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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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4년 2월 동만주과 남만주에는 義勇軍(의용군), 救國軍(구국군), 自衛軍(자위군)등의 이름으로 20~30명 또는 100~200명 규모로 100여 개의 항일부대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오의성의 동북의용군은 600명 정도의 대부대였다. 1936년 4월 오의성 부대는 중국공산당의 동북항일연군 第2軍, 第5軍과 합동으로 항일협동전선을 구축했다. 같은 해 8월17일 동북항일연군 第6師, 즉 김일성(북한의 김일성이 아님) 부대는 오의성 부대와 합류해 약 2000여 명의 병력으로 撫松縣城(무송현성)을 포위 습격하는 합동작전을 벌였다.
  
  당시 김성주는 김일성 부대의 대원으로 전속되어 있었다. 1937년 초 안도현 치안대의 韓人 李道善(이도선) 警佐(경좌)가 김일성 부대의 토벌에 나서 그 부대의 소년 대원 한 명을 붙잡았는데, 이름은 金英柱(김영주)고 바로 윗형 金哲柱(김철주)는 1935년에 죽고 “큰형 金聖柱(김성주)는 지금 김일성 부대의 대원”이라고 진술했다. 그때 김성주는 중국인 친구 張亞靑(장아청)과 함께 第6師 대원이었다. 김성주는 1937년 6월 초에 있었던 보천보 전투에도 第6師長 김일성이 아니라 그 부대의 일개 대원으로 참가했던 것이 분명하다. 이 때문에 북한에서는 한동안 기를 쓰고 第6師長 김일성이 북한의 김일성과 동일 인물이라고 주장하며, 그 戰績(전적)을 확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나이가 다르고 신원이 다르다.
  
  1937년 7월 中日전쟁이 터졌을 무렵 장아청이 오가자에 있는 친구 李善一(이선일)에게 보낸 편지에는 “나와 김성주는 지금 동북항일연군의 제6사 김일성 부대에서 싸우고 있으니 자네도 동지들을 데리고 와서 가세해 달라”는 권유의 말이 적혀 있었다. 이 편지도 김성주가 김일성부대의 일개 대원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1937년 11월 第6師長 김일성이 죽고 그 후계자, 또다른 김일성이 第2方面軍長이 되었을 때에도 김성주는 계속해서 김일성 부대의 대원으로 남아 있었으나 이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가 없다. 그러나 김성주는 1939년 같은 김일성 부대의 여자 대원이었던 金靜淑(김정숙)과 부부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下卒(하졸)은 결혼할 수 없다는 동북항일연군의 규칙으로 봐서 김성주는 중간 간부 이상의 직위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1940년을 전후해 軍警의 합동작전으로 동북항일연군이 궤멸되고, 1940년 12월 말 第2方面軍長 김일성이 부하 20여명을 데리고 소련의 원동으로 도망갈 때에도 그곳에 김성주가 끼어 있었다. 그의 처 김정숙은 그보다 먼저 오케얀스카야 야영 학교에 도착해 있었고 1941년 2월16일 그곳에서 첫 아들 유라(김정일)를 출산했다.
  
  김성주는 해방 후 평양에 도착할 때까지 이곳에서 특수훈련과 교육을 받았고, 그 사실을 늘 자랑삼아 말했다. 대체로 군사참모학, 정보학, 통신, 낙하산 훈련, 그리고 마르크스 레닌주의 교육을 받았다. 훈련은 소련 연해주지구 경비사령부 소속 교관들에 의해 실시됐다.
  
  역사의 捏造(날조)
  
  북한에서 주장하는 김일성 항일투쟁사의 대부분은 세 가지 특징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는 없었던 일을 날조한 것이다. ▲둘째는 있었던 일을 변조하거나 미화한 것이다. ▲셋째는 다른 사람이 한 일을 자신이 한 것처럼 도용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사건이 바로 보천보 전투인데 2002년 8월 초 한국의 김대중 정권이 고등학교 교과서에 보천보 전투를 비중 있게 소개해 물의를 일으켰다. 또 학계 일부에서는 일제시대의 공산계열 독립운동도 史實(사실)로 인정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어처구니없는 의견도 제기됐다.
  
  대한민국의 북한 연구가들이 저지르고 있는 과오 중 하나가 철저한 연구 분석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북한이 날조·미화한 문헌과 자료를 비판 없이 접수하는 태도다. 이른바 ‘내재적 접근법’으로 잘 알려진 송두율과 그를 추종하는 사이비 학자들은 대한민국의 진실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부정적인 면을 극대화한다. 동시에 북한의 모순과 허위에 대해서는 절대로 비판하지 않는다. 이들은 날조된 역사를 사실(史實)로 인정하고 있다.
  
  북한의 김일성은 죽을 때까지 여러 겹의 탈을 쓰고 살았다. 그가 그토록 무서운 독재자가 된 이유 중 하나는 이 가면을 지키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가 속이지 않은 것도 있다. 그의 생년월일과 부모와 조상들의 이름이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과거 행적의 대부분이 거짓말이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혈통을 강조하기 위해 ‘백두혈통’을 내세운다.
  
  역사를 날조해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가 1866년에 대동강에 들어갔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격퇴하는데 선봉장을 했다는 주장도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와 그의 아들 김보현은 가난하고 평범한 농부였을 뿐이다. 그리고 김성주의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을 공산주의 혁명투사로 추앙하지만, 사실 김형직은 한의사로 만주에서 白山武士團(백산무사단)이란 애국 민족진영의 대원으로 활약하다 공산당원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김성주 자신은 주로 만주 장백현 일대에서 동북항일연군의 비적으로 양민약탈에 잔뼈가 굵었다. 그의 妻(처) 김정숙은 빨치산들의 옷이나 세탁한 하녀에 불과했으며 백두산에서 싸운 일이 전혀 없다. 그들의 아들 김정일은 분명히 소련 극동지역 경비사령부 야영지에서 1941년 2월16일에 태어났다. 그들이 말하는 ‘백두산 밀영’에서 출생하지 않았다.
  
  김정일의 아들 김정은의 생모 고영희는 1952년에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했고, 1962년 아버지 고경택을 따라 北으로 들어간 북송교포다. 고영희는 만수대예술단 무용수였고 김정일의 ‘기쁨조’ 대원이었기 때문에 집안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했다. 김정은의 외조부 고경택은 일제시대에 친일파였고, 이모 고영숙은 1998년에 탈북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결국 김정은은 북한 기준에서 보면 불순분자 집안의 자식이다. 그런데도 북한에서는 아직도 ‘백두혈통’을 부르짖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다. 김정일이 다른 자식들 다 제쳐놓고 김정은에게 권력을 이양한 이유는 그가 祖父(조부)를 제일 많이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진실과 허위를 배합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또다른 어려운 일을 추가적으로 해야 한다. 하나는 역사를 날조하는 작업이요, 다른 하나는 그 허위를 알고 있는 사람과 알 만한 사람을 제거하는 작업이다. 어렸을 때는 깡패요 청년시절에는 동족을 괴롭히던 공산비적으로 살아온 그가 ‘만고의 애국자요, 항일영웅이요, 민족의 태양’ 으로 둔갑해 49년간 독재자로 살아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고, 비참하게 되었는지 역사는 사진과 같이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가짜 김일성이 도용한 진짜 김일성 이야기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진짜 김일성 장군은 누구인가. 본명은 金光瑞(김광서)이고 별호는 金擎天(김경천)이다. 1888년 6월5일 함경남도 북청군 해안 승평에서 출생해 호적상의 본적은 서울 종로구 사직동 166번지이다. 그는 구한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유학해 1911년 기병과 제23기생으로 졸업하고 1915년에 기병 중위가 됐다.
  
  김광서는 1919년 2월20일 병가를 얻어 서울의 사직동 자택에 있는 동안 3·1운동을 맞았다. 이후 그는 일본군을 떠나 해외로 도피해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을 결심하고, 같은 해 6월 일본육사 3년 후배인 池大亨(지대형, 또다른 이름은 池靑天)과 함께 만주로 탈출했다.
  
  이들은 요녕성 孤山子(고산자)에 있는 韓人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李始榮이 설립)를 찾아가 교관이 됐다. 그곳에는 이미 구한말 正尉(정위) 출신의 申八均(신팔균)이 교관으로 있었다. 이 세 사람의 장교출신 교관들이 모두 ‘天’자 돌림의 별호를 갖기로 하고 신팔균은 신동천으로 김광서는 김경천으로 지대형은 지청천(또는 母性을 따라 李靑天)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들을 한국독립투쟁사에서 南滿三天(남만삼천)이라 부른다. 이후 중국본토에서 운남사관학교를 졸업한 李範奭(이범석)도 이들(南滿三天)과 합류했다. 1919년 겨울 金擎天은 무기 구입을 위해 시베리아로 떠났다. 시베리아에도 韓人이 많이 살고 있으면서 간도와 마찬가지로 독립운동의 한 근거지였다. 당시 볼셰비키 혁명의 파급을 막기 위해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 군대의 韓人에 대한 잔학행위가 극심했다. 그래서 김경천은 시베리아에서 항일무력을 조직하고 선두에 나섰다. 당시 김경천이 김일성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그의 활동이 소문으로 국내에 전해져 시베리아 항일투쟁의 영웅적 존재로 흰 말을 타고 날아다니는 일본육사 출신 김일성 장군의 신비로운 얘기가 널리 퍼졌다.
  
  그와의 인터뷰 기사가 金光瑞(김광서)의 이름으로 1923년 7월29일 <동아일보>에 실렸다. 항일투쟁에서 김광서(金擎天=金日成)는 볼셰비키 군대와 동맹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1922년 가을 일본군대가 철수하자 시베리아를 장악한 볼셰비키가 그를 배신하고 韓人독립군 부대들을 볼셰비키 군대에 편입시키거나 무장해제 시켰다.
  
  1925년 6월25일 <동아일보>는 “김광서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대대적인 항일투쟁을 또 준비하고 있다”는 기사를 냈다. 이것이 김광서(金擎天=金日成)에 대한 마지막 소식이었다.
  
  이제는 역사의 진실을 말하자
  
  북한 김일성의 역사날조와 신분위장은 철저한 것 같으면서도 엉성하다. 그가 보천보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김일성이라고 주장하면서도 당시에는 사용하지도 않았던 장군이란 칭호를 사용했다. 또 동남만주 산악지대에서 싸웠다는 그가 흰 말을 타고 유격대를 지휘했다는 주장도 만화책 수준의 거짓말이다.
  
  평양의 조선혁명박물관에는 백마를 탄 항일투사 김일성의 그림이 걸려 있고 김일성 傳記(전기)에는 그 그림이 빠짐없이 들어있다. ‘백마를 탄 김일성 장군’은 아마도 위에서 언급한 김광서의 이미지에서 따온 것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보천보 전투 이야기는 동북항일연군 第6師長 김일성(가짜 김일성)의 얘기를 도용해 미화한 것이다.
  
  이외에도 《영웅 김일성 장군》, 《조선민족 해방투쟁사》, 《김일성장군 약전》, 《조선근대 혁명운동사》, 《역사사전, 조선전사》 등등의 북한 책에는 날조, 변조, 도용 흔적이 너무나 뚜렷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신분의 위장과 도용, 김일성이 조직하고 지휘했다는 전혀 사실무근의 조선인민혁명군 얘기, 그리고 그가 지휘했다는 보천보 전투의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이다. 이 가짜 김일성이 49년간 독재하면서 북한을 생지옥으로 만들었다. 이것도 모자라 권력을 자식에게 물려주어 그 애비보다 몇 배나 더 무서운 독재자로 전 세계에서 가장 지독한 인민탄압을 자행했다. 지금은 3대 세습으로 손자 김정은이 앞서 두 독재자보다 더 지독하고 잔인한 악마로 등장했다.
  
  <계속>
[ 2014-11-07, 18:0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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