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 金正日의 生涯(생애) 해부(上)
前 CIA 요원 마이클 리의 現代史 秘話-39/그는 독재자의 아들로 태어나 안하무인으로 성장했고 異端(이단)의 교주가 누리던 일인숭배의 榮華(영화)가 몸에 젖어 그 탈을 벗지 못했다. .

李明山(마이클 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주] 아래 글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김정일 시대는 그의 사망으로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후계자 김정은이 그의 유훈정치를 지속하고 있다. 학계와 언론계 일부에서는 북한이 핵실험 이후에는 더 이상 사용할 수 있는 비장의 카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북한은 당당히 핵보유국의 행세를 하려고 오만해졌고 UN, 미국, 한국을 포함한 서방세계의 압력에 螳螂拒轍(당랑거철)의 자세를 취해왔다.
  
  만약 북한의 핵보유가 기정사실로 인정되면 북한은 세계에서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에 이어 아홉 번째 핵보유국이 되는 것이다. 참으로 다루기 힘든 괴물(Monster)이 되어버릴 것이다. 북한을 제어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이 있는 미국이 ‘핵 없는 세상’을 주장하면서 계속적으로 우유부단한 對北정책을 고집한다면 미국에 대해 동맹국들은 물론 자유세계의 신뢰가 무너지게 될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핵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말 한 마디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그만큼 자유세계에 빚을 지고 있다. 그동안 對北 금융압박 등 매우 긍정적 조치를 취해, 지금까지와는 달리 새롭고 결정적인 북한 문제 해결로 연결되기를 기대했다. 우리가 반복해서 주장하지만 북한의 모든 문제는 김정일을 폐기하지 않고서는 해결할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정일이 떠난 이후에도 북한은 더 악랄하게 변해가고 있다. 필자는 김정일이 어떤 인간인지를 더 구체적으로 알리기 위해 그가 살아 있을 때 아래와 같은 글을 썼다.
  
  光明星(광명성)의 뜻
  
  하나님이 창조한 천사들 중 품계가 가장 높은 그룹(Cherub), 즉 대천사 가운데 하나인 루시퍼(Lucifer)의 별명이 啓明星(계명성)이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을 배신하고 사탄이 되어 이 세상을 죄악으로 괴롭히고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우연인지 모르나 김일성이 아들 김정일의 생일에 그를 찬양하기위해 시를 쓰고 그를 ‘새벽의 아들 光明星(광명성)’이라고 불렀다.
  
  계명성이나 광명성은 같은 말인데, 김정일은 생전에 온 세상을 괴롭히는 사탄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절대 타협이 불가능한 극단주의자로 날이 가면 갈수록 그 증세가 악화되어 불치병의 말기 환자와 유사했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이단(cult) 교주처럼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김정일은 북한주민과 인류를 괴롭혔다.
  
  그는 언제나 벼랑 끝에 서 있었다. 북한이 대외협상에서 ‘벼랑 끝 전술’을 사용한 것은 과거의 모든 이단 집단이 그랬던 것처럼 체질상 생존과 파멸의 기로에서 다른 대안이나 퇴로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파멸로 끝날 바에는 무슨 짓인들 못 할까. 그런 북한을 상대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6자회담을 추진해왔다.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6자회담의 성공을 바라는 사람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김정일의 인간 분석을 처음부터 다시 했어야 했다.
  
  북한은 필연적으로 파멸할 것이며 인류평화를 위해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南美 가이아나의 인민사원 교주 짐 존스가 그랬고, 텍사스 웨이코의 데이비드 코레시가 그랬고, 일본의 아사하라가 그랬다. 북한을 외교적 설득 및 경제지원 등으로 그들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고 타협해서 순화하겠다는 정치인들이나 지식인들을 볼 때 김정일에 대한 혐오감과 비슷한 혐오감을 가지게 된다. 북한은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구제불능의 체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북한이 파멸될 때 주변국의 피해를 극소화하는 문제, 파멸 이후의 북한을 재건하는 방안에 대해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구상을 시작해야 할 때다. 그리고 우리의 북한 동포들을 하루속히 생지옥과 같은 독재에서 해방시키고 한반도와 동북아의 항구적 평화를 구축해야 한다.
  
  수도원에서 10년을 먹여 살려도 늑대는 산으로 돌아간다. 북한을 설득해서 남북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이론은 마치 늑대에게 주기도문을 외우라는 것과 같다. 美 국무부의 前 북한 인권특사 레프코비츠는 “북한정권을 화나게 하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북한의 인권문제를 포기할 수 없으며, 북한국민의 고통에 대해 영원히 눈을 감을 수 없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과 국제사회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청년 다윗은 돌팔매로 골리앗을 쓰러뜨렸고 레이건 대통령은 총 한 발 쏘지 않고 SDI로 소련을 쓰러뜨렸다. 이제 국제사회가 ‘민주주의 확산’과 ‘인권전략’으로 북한을 지워버릴 날이 올 것이다. 과거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의 對北정책은 본질과 핵심을 이탈했으며 북한과 김정일에 대해 철저하게 무지했기 때문에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돌았을 뿐이다.
  
  김정일의 출생과 성장
  
  김정일의 출생과 성장 과정, 성격과 기질, 지도자로서의 스타일, 갈등, 권력투쟁, 건강, 잔인성, 가족관계, 방탕한 사생활 등등 그의 인간성을 분석하기 위한 숨은 얘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김정일은 과연 어떠한 인간이었는가. 아버지 김일성과 어머니 김정숙은 만주에서 활동하던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항일연군이 軍警 합동작전으로 괴멸될 때 패잔병으로 1940년 12월 소련 원동으로 탈출했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근처 소련 연해주 극동지구 경비사령부 소속 오케얀스카야 야영지에 수용되어 있을 때 그들의 첫 아들 유라(김정일)를 출산했다.
  
  김정일의 정확한 생년월일은 1941년 2월16일이다. 소련식 이름은 유라고 조선 이름은 金正一 이었는데 후에 金正日로 바꾸었다. 북한은 김일성의 항일투쟁사를 조작하는 과정에서 김정일의 생년월일을 1942년 2월16일로 바꾸었다. 또 김정일의 출생지도 백두산 밀영이라며 ‘백두혈통’을 날조했으나 그의 출생지는 엄연히 소련 땅이다. 어머니 김정숙은 1917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고 1949년 9월 평양에서 김정일이 여덟 살 때 삼남매(유라, 수라, 경희)를 남겨두고 32세에 죽었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아들 김정일을 김일성이 총애했으나, 계모 김성애와 이복형제(평일, 영일, 경진)들과의 갈등은 심각했다. 동생 수라는 어려서 수영하다가 익사했고, 여동생 김경희에 대한 그의 혈육의 정은 대단했다. 생모 김정숙의 볼품없고 왜소한 외모를 닮은 김정일 남매는 母系優性(모계우성)으로 자신들의 못생긴 외모 때문에 열등감에 시달리며 성장했다. 김정일은 자신의 작은 키를 의식해 스스로를 ‘똥자루’라고 부르기도 했다. 작은 키를 늘리기 위해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머리도 길게 올리는 두발을 했다.
  
  형제 간의 갈등
  
  김정일의 이복형제들은 父系優性(부계우성)으로 인품이나 외모가 아버지 김일성 쪽을 닮아 준수했다. 그래서 삼촌 김영주를 위시해 친척이나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더 받았다. 이 때문에 김정일은 늘 경계심을 높이고 살았으며 방어심이 강했다. 김일성의 관심을 더 끌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했으며 충성을 다 했다. 아버지의 총애와 관심을 받기 위한 최고의 무기는 김일성의 필생의 꿈인 한반도 적화통일과 사회주의 혁명완수를 계승하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그는 중국의 홍위병과 유사한 ‘사회주의 혁명소조’를 조직해 전국을 설치고 다녔다. 또 對南공작을 강화해 남한을 파괴하고 방해하기 위한 끔찍한 일들을 저질렀다. 아웅산 테러와 KAL-858기 폭파사건이 다 그런 것들이었다. 1970년대 노동당이 공식적으로 그를 김일성의 후계자로 책봉한 이후에도 그는 불안했다. 계모 김성애와 이복동생들을 고립시키는 데 철저했다. ‘곁가지’라고 해서 그들을 중앙 요직에 배치하지 않고 항상 한직으로 내몰았다. 심지어 외국에 보내 국내에서의 권력구축 기회를 차단했다. 김성애 소생인 평일은 현재 폴란드 대사로 나가 있고, 영일은 독일주재 대표부의 과학참사로 있다가 1999년에 당뇨병으로 죽었다. 딸 경진은 오스트리아 대사 김광섭의 아내로 비엔나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늘 감시를 받고 있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 당시 노동당 정치국 일부에서는 성격이 표독하고 오만불손한 김정일보다는 외모도 준수하고 성격이 원만한 김평일을 후계자로 옹립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희망을 차단한 사람이 2003년 10월26일 사망한 對南사업담당 당비서 김용순이었다.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과 김용순이 밀착되어 있었던 이유도 모두 이런 데 있었다는 생각이 된다. 당시 김성애와 그 소생들은 숨을 죽이고 살았는데 김성애의 경우 생활비도 대주지 않아 한동안 고생을 했다. 김평일은 사람이 원만하고 미남으로 누가 봐도 호감이 가는 인물이지만 비운의 일생을 살고 있다. 숙부 김영주의 보호막이 없었더라면 김성애와 그의 소생들은 참으로 어떤 비참한 일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김정일의 위기극복
  
  김정일은 ‘대를 이어 혁명을 완수하자’는 아버지의 뜻과 당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권력 후계자란 의미와 어느 정도 검증된 리더십 외에 아버지 김일성과 같은 카리스마는 없었다. 그래서 권력세습을 반대한 원로들이 숙청되고 소위 혁명 1세대 늙은이들이 죽거나 정치범 수용소에 간 후에 당과 군부 요직에 장성택, 연형묵, 조명록 등 자신의 추종세력을 포진시켰다.
  
  그러나 김일성이 사망했을 당시의 黨 일부에서 김평일 옹립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특히 중앙당에서 김정일 거부 분위기가 싹트기 시작하자 김정일은 당황해 재빨리 군부와 손을 잡고 당을 견제했다. 김일성 사망 직후 김정일은 당을 경원했으며 최고 정책기구인 정치국까지 무시하고 軍 중심으로 국가운영의 방향을 돌렸다.
  
  그때 김정일은 자신을 배신한 중앙당도 믿지 못했고 청진의 6군단 반란 사건에 가담한 국가안전보위부도 믿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선군정치를 보강하기 위해 인민군 총정치국 내에 일개 局(국)이었던 보위국을 보위사령부로 승격 재편하고 보위사령부에 군부와 민간인을 모두 수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 중앙당과 국가안전보위부 내부의 소위 불순분자, 즉 反김정일 세력을 색출해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보위사령부는 김정일을 위기에서 구출했다. 이후 헌법이 개정되고 국가 최고 정책기구로 국방위원회가 설치되었다. 당의 정치국은 아무 실권이 없었다. 김일성 사망 전 약 20년간 김정일은 당중앙이란 호칭 아래 당을 완전히 장악했다. 김정일은 권력의 튼튼한 기반으로 당을 삼고 있었으나 김일성 사망 후 그 기반에 금이 가기 시작하자 군부로 몸을 옮겨 군국주의 통치의 새로운 지휘봉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후 북한에서는 당중앙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위대한 장군님’, ‘국방위원장’이란 호칭만 사용했다. 당은 군부의 시녀에 불과했다.
  
  김정일의 집무 스타일
  
  김정일은 한때 장성택과 함께 술을 많이 마셨고 기쁨조 파티 같은 데서 폭음을 하여 건강이 좋지 않았다. 과로로 간과 심장이 나빠져 독일과 소련 같은 나라에서 외국 의사들이 평양을 드나든 일이 있었다. 그들은 김정일의 몸이 나이보다 10년은 더 늙었다며 경고를 했다. 김정일은 야행성으로 밤에 일을 더 많이 했다. 어떤 때는 새벽 3~4시까지 그의 집무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 사망 후 음주량을 줄이고 집무시간도 축소해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으나 야행성 집무 습관에는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생각보다 세심하며 올라오는 모든 서류를 검토하고 중요하고 특별한 일에 대해서는 소위 친필지시를 내렸다. 그의 업무처리 방식은 위임, 승인, 친필지시의 3단계로 구분되었다. 위임은 업무의 성격에 따라 전담이나 협조할 부처를 지정해 재량껏 처리하라는 지시이다. 승인은 上申(상신)한 계획대로 처리해도 좋다는 지시이고, 친필지시는 자신의 견해와 방법을 제시하면서 특별히 비중 있게 처리해 달라는 부탁의 지시를 말한다.
  
  친필지시가 떨어지면 해당 기관이나 부처에서는 작전지시를 방불케 하는 명령으로 접수하고 그 일의 추진을 위해 전투에 임한다. 그런데 김정일이 친필지시를 남발해 밑에 있는 사람들이 혹사를 당하며, 사사건건 이래라저래라 하는 바람에 특히 중앙당에서는 짜증을 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그는 김일성대학교를 졸업한 후 몇 년간 호위사령부에서 위관급 군관으로 근무한 일이 있었다. 주로 자기 아버지의 공식행사 때 경호와 의전을 담당하는 일이었는데 자신보다 상급자인 군관들에게 명령이나 지시를 해서 크게 문제가 된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기질과 잔인한 인간성
  
  김정일은 김일성대학교에 다닐 때 문예서클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김일성의 아들이란 후광 때문에 여학생들과 고위직 간부들의 자녀들을 거느리고 활개를 쳤다. 어느 정도의 예술 감각이 있는 청년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는 서방세계의 문물에 감수성이 빨라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는 영화를 미칠 정도로 좋아해서 영화광이 되었다. 그리고 남한의 영화배우 최은희와 영화감독 신상옥을 납치하기도 했다.
  
  그는 남한의 TV와 미국의 CNN을 보았으며 남한 영화나 미국의 영화에 대해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해박하며 서방세계의 사정도 많이 알고 있었다. 1990년대 초 한국과 미국의 對北전문가들은 김정일의 그런 점을 고려해 김일성 이후에 김정일이 권력을 잡으면 소련의 고르바초프처럼 북한의 정치, 경제 체제에 일대 변혁을 시도할 사람으로 예상을 했다. 그러나 그는 독재자의 아들로 태어나 안하무인으로 성장했고 이단의 교주가 누리던 일인숭배의 영화가 몸에 젖어 그 탈을 벗지 못했다.
  
  그는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권력과 영화를 누리며 살아왔다. 자기가 원하면 무엇이나 가능한 것처럼 세상을 착각하며 살고 있었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무엇인가 최고를 추구한다. 그가 승마를 좋아하며, 쾌속 보트를 즐기며, 차를 직접 운전할 때는 언제나 과속 운전을 했다. 낙마나 자동차 사고 같은 것을 예상하지 않았다. 그러다 무슨 일이 막히면 즉흥적인 해결책을 모색했다. 자기 방어에는 언제나 잔인했다. 부모에게 용돈을 많이 타 쓰는 자식들이 방종하며 사회에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것처럼 그의 방종한 사생활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를 지켜본 영화감독 신상옥이 지적했듯이 김정일은 어떤 자리에서 누가 맘에 들거나 들지 않으면 합법적인 절차를 밟지 않고 즉석에서 승진을 시키거나 해직을 했다. 그가 일개 평민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면 열등감이 많은 겁쟁이로 물려받은 부모의 재산이나 탕진할 그런 위인밖에 못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과 그가 자라난 사회적 환경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모든 독재자들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잔인한 것이고 또 하나는 위기에 몰렸을 때 돌발적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1995년 이후 북한 경제가 파탄되어 수백만이 굶어죽고 병들어 죽어나갈 때 김정일은 자신의 측근들에게 ‘병들고 노동력이 없는 인민들은 빨리 죽어 없어지는 게 내게는 편하다. 철통같이 뭉친 군대와 당원 300만만 있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공화국은 건재하다’고 했다. 이런 말을 북한의 일반 국민들이 들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1980년대 중반 한국의 경제가 급성장하고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을 때 김정일은 이를 방해하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KAL-858기 폭파와 같은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듣고 듣던 이야기를 또 하는 이유는 그의 인간성과 행동을 연결시켜보기 위해서다.
  
  반대세력의 도전
  
  김정일은 젊었을 때 호위사령부에서 몇 년간 근무한 것 외에는 군대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러던 그가 1992년 4월21일 일약 원수의 계급을 받고 ‘위대한 전략가’, ‘위대한 장군님’으로 불리자 일부 엘리트 軍 간부들은 심한 반발을 했다. 드디어 1992년 말~1993년 초에 소련 프룬제 군사대학 출신이 중심이 된 11명의 장성들이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사전에 적발되어 실패했다. 1995년 초 청진에 있는 6군단이 反 김정일 음모에 가담해 상당수의 국가안전보위부 간부들이 숙청을 당했다. 그 후 1997년에 당비서 황장엽이 남한으로 망명하고, 수많은 북한 주민들이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줄을 지어 중국으로 탈출했다. 1998년 말에는 보안담당 당비서 계응태의 사위가 또 反 김정일 음모에 가담해 총살을 당했다.
  
  이 무렵 김정일은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고 군부 내에 보위사령부를 신설해 인민 탄압의 강도를 높였다. 그 후 매년 군인과 민간인 등 약 300명 정도를 공개 처형했다. 그는 한 측근에게 “주위에 누가 나의 적인지 알 수 없어 잠을 편히 잘 수가 없고 가끔 악몽을 꾼다”고 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권력투쟁이 치열한 곳이 북한이다. 소련의 앞잡이로 가짜 김일성이 북한에 들어와 진짜 김일성 노릇을 하기 위해 그의 항일투쟁사를 날조하고 일인독재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수많은 정적들을 죽이고 국내파, 연안파, 소련파, 갑산파 등을 반당종파로 몰아 씨도 없이 숙청했다. 그의 아들 김정일도 권력 세습에 반대하는 수많은 간부들을 죽이고 숙청했다.
  
  1974년 2월 黨(당) 제5기 8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일이 黨정치위원회 위원으로 발탁되고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식 인정을 받은 후에도 그는 항상 불안했다. 자기 앞에 ‘넘어야 할 큰 산’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을 항상 경계하며 살았다. 그중에 세습반대 이유로 정치범 수용소에 간 고급간부들은 1975년 9월 정치국 후보위원 유장식, 1977년 10월 부주석 김동규, 1982년 1월 국가보위부 부장 김병하와 부총리 김경연, 1986년 2월 부총리 홍성룡, 1988년 12월 내각총리 이근모 등이다. 아버지 김일성의 두터운 신임과 특별한 보호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위협적 존재는 제일 먼저 이복동생인 김평일이었고, 다음이 남일과 오진우 등이었다.
  
  계속
[ 2014-11-10, 02:2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리버티헤럴드  |  뉴스파인더  |  이승만TV  |  장군의 소리  |  천영우TV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