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과의 만남
"한국에 20년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입니다. 젊은 시절 일본의 타테마에 문화(본 마음을 숨기는 문화)에 식상하여 일본을 벗어날 계획으로 영국 유학을 생각하던 중 어떤 계기로 한국인 남편을 만나게 되어 결혼했습니다."

池田美江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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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아래 글은 지난 9월21일 ‘조갑제 기자의 현대사 강좌’에 참석했던 일본인 이케다 미에코(池田美江子) 씨가 <조갑제닷컴>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이 글을 <조갑제닷컴>의 허가 없이 외부 사이트로 옮기지 마십시오.

나는 다부동 왜관 포항지역을 통해 20년간 만날 수 없었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깊은 한국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다부동에 가자”고 결심한 것은 올해 5월 초였습니다. 그것은 전날 서울 전쟁기념관의 ‘6.25전쟁실Ⅲ’을 본 후 견딜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며 가만히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한국에20년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입니다. 젊은 시절 일본의 타테마에 문화(본 마음을 숨기는 문화)에 식상하여 일본을 벗어날 계획으로 영국 유학을 생각하던 중 어떤 계기로 한국인 남편을 만나게 되어 결혼했습니다. 결혼하기 전 남편 가족의 반대로 양국의 역사를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면서, 그때 읽었던 反日 사상의 책을 통해 한국에 가는 목적이 명확하게 정리되었습니다.

'자신을 통해서 한국 사람들의 反日 감정을 조금이라도 완화하고 해소시킬 수 있다면…'.

그래서 나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등에 업고 한국에 왔습니다.

한국 생활이 시작되면서 실제로 남편의 부모님과 생활하는 가운데 오키나와에 강제 출병했던 시아버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일본인이라도 좋은 사람이 있었어. 거꾸로 한국인이어도 나쁜 놈도 있었다. 모두 다 똑 같은 인간이야.”

또 시어머님도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일제 시대에는 치안도 좋았어. 저 저수지와 철도도 일본인이 만들었어. 일본인이 만든 것은 튼튼해서 부서지지도 않아.”

나는 매우 놀랐습니다. 즉 부모님이 우리의 결혼을 반대하신 것은 며느리가 일본인이어서가 아니라, 본인들이 선택한 며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시부모님과 남편의 많은 사랑을 받으며 나의 한국생활은 매우 안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반 생활 속에서 일본인이 한국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3월1일, 8월15일은 일본어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매년 조심하기도 했습니다. 또 일본어 강사 시절에는 학생들이 일제 식민지 시대의 건으로 의견이 반반으로 나뉘어 학생끼리 치열한 토론이 되고 수업이 중단되어 집에 가서 울기도 했습니다.

반일 문제가 내 혼자만의 문제라면 그래도 견딜 수 있습니다. 5년간 일본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딸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받은 ‘이지메’는 매우 지독했습니다. 그때 텔레비전에서는 ‘야인 시대’가 유행했던 무렵이었습니다.

또 작은 아들이 유치원에서 유관순의 위인전을 배우고 왔을 때 “왜 어머니는 일본인이야? 영국인이나 필리핀인이면 좋았을 텐데...” 친구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던 아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매우 아팠습니다.

한편 이런 경험도 있었습니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여러 사람이 “한국의 어디를 가고 싶니?” 라고 물어보면 나는 항상 “부여에 가고 싶어!” 라고 대답했습니다. 관광지인 부산과 경주보다 부여였던 것 입니다. 그러나 갈 기회는 드물었습니다. 한국에 살고 10년 정도 되었을 때 동네 학부모들과 함께 역사교육을 위해 부여와 화성에 관광버스로 아들과 함께 가게 됐었습니다.

버스가 그 지역에 가까이 갈수록 산이 완만하며 경북 지역보다 마음이 편안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은 어딘지 모르게 일본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리고 백제 박물관에 들어가서 백제 마을의 모형을 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아, 겨우 돌아왔어!”

그것은 무의식의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았습니다. 만약 전생이라는 것이 있다면 뭔가 나는 그 시대 일본에 휩쓸려 가서 백제 마을을 그리워하던 사람 중의 한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에 시집 와서 지금 이렇게 한국을 사랑하며 생활하고 있구나”라고 절실히 느꼈습니다.

나는 현재 대구시 수성구에 살고 있습니다. 자동차로 조금 가면 녹동서원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에 임진왜란에 출병했던 사야카가 조선을 선택해 귀화한 김충선(사야카)장군을 모시는 장소입니다. 이 장군은 무슨 생각에서 조선을 사랑하고 귀화하고 자신의 조국인 일본군과 싸운 것일까요….

우리 집 근처에는 수성못이 있습니다. 그 연못은 일제시대 부족한 농업용수를 위해 총독부에 직접 담판하고, 자신의 사재도 투자한 미즈사키 린타로 씨가 현지의 농민들과 협력하여 만든 연못입니다. 미즈사키 씨는 “이 연못이 보이는 곳에 한국식의 무덤을 세우고 거기에 머물고 싶다”라는 유언대로 지금 현재 수성못에 그의 묘가 있습니다.

그런 미즈사키 린타로 씨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다시한번 결심했습니다.

“이 미즈사키씨처럼 여기서 영원히 잠들고 싶다고 할 만큼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한국의 장소를 만들고 싶다!”

이렇게 되돌아보면 나는 매우 좋은 시대에 매우 좋은 장소에서 좋아하는 한국과의 만남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역사상 많은 선인들의 고생의 토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선인들이 있어서 지금의 제가 여기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나에게 서울 전쟁기념관 전시는 약간의 위화감으로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기념관 마지막에 있는‘6.25전쟁실Ⅲ’이 ‘UN군 덕분에 지금 한국이 존재한다’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것처럼 나는 느꼈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그 때 맥아더의 인천 상륙 작전이 없었다면, 그리고 63개국 참전 및 많은 지원이 없었으면, 지금 한국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UN군의 밑에,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국군을 비롯해, 많은 한국 국민의 희생은 어떻게 된 걸까요?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사랑하는 조국을 지킨 영령, 기타 많은 한국 국민의 희생 덕분이며, 그것을 지원하고 함께 싸워준 UN군도 있었다’라고 해야되지 않을까요?

그 때 민족의 자긍심, 민족주의, 국가라는 개념이 당연히 존재하고 있다고 믿었던 나의 고정관념이 흔들렸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만난 한국은 진짜 한국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결국 그것은 어디까지나 환경에서 주어진 ‘수동적인 한국과의 만남’이며, 스스로 적극적으로 만난 ‘능동적인 한국과의 만남’이 아니었습니다. 과연 그런 한국을 나는 사랑하고 있다! 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요? 사랑 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그런 순정만화 속의 얕은 만남은 구역질이 납니다. 한국과 나, 국가 민족을 넘어야 할‘ 만남의 자세’부터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더욱 장렬하고 장엄한 한국과의 만남! 마침내 나는 이번 다부동 왜관 포항지역을 통하여 20년간 만날 수 없었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깊은 한국과 만난 것입니다.

그날은 무거운 구름이 잔뜩 낀 비 갠 오후였습니다. 6.25 전쟁시 가장 치열한 전투지였던 다부동. 대구에서 차로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양측의 산들을 곁눈질로 봤습니다. 분명히 이 산을 넘어 분지인 대구를 정복하기만 하면, 단숨에 부산까지 함락 가능한 지형임이 확인되었습니다. 떨리는 손발을 누르며 핸들을 잡았습니다. 만약 혼자였다면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조수석에서 동행한 사람의 가벼운 대화가 긴장한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습니다.

다부동 전투기념관에 도착하여 발을 내리는 순간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땀과 피와 눈물을 흘리고 싸운 것일까요…. 마음이 떨리고 서서 걷는 것조차 힘들었습니다.

단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전쟁의 역사를 직시할 것입니다. 기념관을 돌며 전시물을 보면서 호국 영령들의 깊은 외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밖에 나가니 눈앞에 유학산이 있었습니다. 신하균 주연의 ‘고지전’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 옆에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배경이 된 328고지도 보았습니다. 눈 앞에 펼쳐진 이 모든 광경은 65년 전 실제로 전쟁이 일어난 현장이었습니다. 55일 간의 치열한 다부동전선을 지켰기 때문에, 지금 한국의 자유주의가 존재합니다. 만약 그때 이 장소를 지키지 못했다면 한국은 물론, 일본도 어떻게 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낙동강 줄기를 따라 달리며 왜관전승기념관에 갔습니다. 나는 그때 낙동강이 이렇게 작은 줄은 몰랐습니다. 마음의 떨림은 겨우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념관 2층에서 6.25의 배경인 ‘애치슨 라인’의 설명을 읽었을 때 마음의 떨림이 분노의 떨림으로 바뀌었습니다.

“미국의 애치슨이 이런 선을 마음대로 그어서 공산권에 전쟁을 유도한 것은 아닐까?”

나는 이때 처음 미국의 군사 산업, 즉 미국의 경제 부흥을 위해서 이 한반도가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전쟁의 무대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처럼 이 기념관은 만든 사람의 의지가 느껴지고 전시 유물이 알기 쉬웠습니다. 위 층에 있는 6.25전쟁의 일정별 한반도 전선의 변화는 전쟁의 전체상을 한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서울의 전쟁기념관보다 훨씬 더 한국의 관점에서 전시되고 객관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장소였습니다.

이번에는 왜관철교로 향했습니다. 강변을 달리면서 생각했습니다. 당시 이 낙동강이 새빨간 핏빛으로 물든 것을… . 차에서 내려서 철교를 걸었습니다. 이렇게 좁은 낙동강의 왜관철교에서 서울의 한강철교 폭파 사건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는… . 철교 폭파 전에 건너지 못한 민간인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 혹시 가족이 여기서 헤어져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되어 버렸는지도… . 철교 폭파 장소에는 당시의 사진을 전시되어있습니다. 마음의 떨림은 분노의 떨림이 겹쳐 참을 수 없는 감정으로 바뀌었습니다. 호국 영령들의 슬픈 절규는 그칠 줄을 모릅니다.

“여기까지 왔으니까 포항에도 가자. 젊은 호국 영령의 학도병들을 만나고 싶어!”
다음날 대구 포항 고속도로에서 이번에는 차를 동쪽으로 달렸습니다. 팔공IC에서 타는 그 길은 65년 전 오른쪽은 자유주의, 왼쪽은 공산주의로 나누어져 다투던 전선상 가까이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 인류역사의 2대 이데올로기가 백의민족의 고귀한 존엄을 앗아갔다...’ 푸

른 하늘은 한없이 맑았지만 나의 마음은 이미 증오와 분노로 탁해져 있었습니다.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은 포항의 구석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포항 출신 지인이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다”라고 한말이 떠올랐습니다. 기념관으로 들어가니 아들 또래의 학생모를 쓴 어린 학생들의 사진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아… 너무 어리다. 이 아이들을 조국을 위해 전쟁터에 보내야 했던 어머니들의 마음은 도대체…”

지금까지 간 기념관보다 강렬하게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통곡할 마음을 억제하면서, 전시물을 직시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념관 후반에 있는 ‘어머니에게 쓴 편지’에서 그 의지조차 쉽게 무너져버렸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습니다....

이 6.25전쟁은 단순히 한 민족 간의 사상의 차이 때문에 일어난 전쟁은 아닙니다. 물론 복잡하게 얽힌 당시의 세계 상황을 신중하게 정리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결과적으로 한반도라는 이곳을 세계가 어떻게 다루었느냐는 점에서 보면, 일제시대가 패전으로 끝나고 그 후 북쪽에서  러시아와 중국의 공산주의가 침략하고 남쪽은 미국의 자유주의가 UN군이라는 ‘정의의 아군’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 통치했습니다.

이 땅에서 세계를 휩쓴 사상과 사상의 제3차 세계 대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치열한 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한반도에 있어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전쟁이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 계기는 역시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식민지 정책의 야망의 실패에 있습니다.

본래대로라면 패전한 일본이야말로 이 전쟁의 무대가 되어, 동일본과 서일본이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로 나뉘어 38선처럼 분단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한반도는 일본 대신 인류 역사상의 2대 이데올로기·사상의 마지막 상극의 현장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인류는 역사상 이념이나 사상 등을 만들어 더 행복한 인생을 추구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념적 사상이 인류에게 준 것은, 결국 2번의 세계대전이 아니었을까요?

특히 지금도 이 한반도는 휴전이라는 세계를 대표한 2대 이념의 마지막 결전장이기도 합니다.

백의민족에게 이 현실적 과제는 너무 무겁지만, 인류의 통곡의 눈물을 안고, 아시아를 대표하여 그 정신을 세계에 발신할 수 있는 것도, 이 백의민족밖에 없을 것입니다.

한민족과 역사상 모든 인류의 ‘한’을 풀 수 있는 것도, 이 통곡의 눈물을 뼈 속 깊이 아는 백의 민족밖에 없습니다! 이 두 이데올로기를 포월(包超)할 수 있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분명 이 땅에서 세계에 펼쳐 나감에 틀림없습니다. 바로 그 날은 그리 멀지 않습니다.

세계의 미션(mission)을 깨닫고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세계에 발신하는 한국! 이제부터 나는 인생을 걸고, 이런 세계의 보배인 한국과 만나고 싶다고 마음 깊이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한국의 가치를 나는 세계에 발신해 가고 싶습니다. 특히 인류 역사상 2대 이념의 치열한 상극의 현장이었던 이 다부동 왜관 포항 지역은 반드시 세계유산이 될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유럽의 동서독을 사이에 둔 베를린 장벽이 이제는 교육의 현장으로 관광지처럼,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다부동 왜관 포항지역에 교육 관광으로 오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역사와의 만남! 특히 저는 일본인이라면 평생 한번은 방문해야 하는 곳으로, 이 다부동 왜관 포항지역을 추진하고 싶습니다. 실제로 지금까지 약 100명 정도의 일본인에게 소개했습니다. 이 교육관광에 참가한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몰랐어…” 

우선 우리는 무지한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런 겸허한 자세야말로 언젠가는 국가 간의 상호 이해에 이어질 것입니다. 민족을 넘어 한 인간으로서 역사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정확히 아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의 역사를 만들어 온 선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인류 역사를 추진하는 위대한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그 인류를 감동시키는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도 이 다부동 왜관 포항지역의 눈물의 역사와 꼭 만날 필요가 있음을 확신합니다.

6.25전쟁의 호국 영령들을 비롯한, 인류 역사상 전쟁에 희생된 많은 영혼들의 죽음을, 결코 허비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인을 비롯한 전 세계 사람들에게 한반도의 이 다부동 왜관 포항지역의 존재를 계속 전하고, 이 땅에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내는 의지와 결단을 생명이 계속 되는 한 후세에 이어 가고 싶습니다.

2015년 10월 1일 

韓国との出会い

      2015年10月1日  池田美江子

 

遂に私は、今回タブドン・ウェガン・ポハン地域を通して、20年間出会うことができなかった、想像を絶するほど深い韓国と出会えた。「タブドンに行こう」と、あの時決心したのは、今年の5月始めであった。それは、その前日ソウルの戦争記念館の最後に「6.25戦争室3」を見て、いたたまれない怒りを覚え、じっとしていられなくなったからである。

私は韓国に通算20年居住している、日本人である。若い頃、日本の建前文化にうんざりし、脱日本計画としてイギリス渡航を考えていた時、あるきっかけで韓国人の夫と出会い結婚した。結婚する前、夫の家族から反対を受け、初めてしっかりと韓国の歴史を図書館で学ぶことになる。その時出会った反日思想の本によって、私の渡韓目的が明確になったことを覚えている。「自分を通して韓国の人たちの反日感情を少しでも緩和し、解消させることができたらー」。そして私は、日本という国を背負いながら韓国に来たのであった。
韓国生活が始まり、実際に夫のご両親と生活する中で、沖縄に強制出兵させられた義理の父から、こんな言葉が漏れた。「日本人だって良い人がいたよ。逆に韓国人に悪いやつもいた。みんな同じ人間なんだよ。」と。また、義理の母のからも、こんな言葉が漏れたことがある。「日帝時代は治安も良かった。あの貯水池や鉄道も、日本人が作ったんだ。日本人が作ったものは、しっかりしていて壊れない。あの時、日本になってしまえば良かったのにー。」。私は大変驚いた。つまりご両親が私たちの結婚に反対したのは、嫁が日本人であることが理由なのではなく、ご自分が選んだ嫁ではなかったからだったのだ。そんな義理のご両親や夫からたくさんの愛を受けて、私の韓国生活はとても恵まれていた。
しかし一般生活の中で、日本人が韓国で生活するということはそんなに簡単なことではない。特に3月1日と8月15日は、日本語を話してはいけない日として、毎年気を付けていたこともある。また日本語講師の頃は、学生たちが日帝植民地時代のことで意見が真っ二つに分かれ、学生同士激しい討論になって授業が中断し、家に帰って泣くこともあった。
反日問題が、自分一人だけの問題ならなんとでもなる。5年間日本での生活を終え帰国した上の娘が小学校5年生の時、受けたいじめはたいへん陰湿だった。その時テレビでは「野人時代」が流行っていた頃だと思う。また下の息子が幼稚園で、ユ・グワンスンの偉人伝を学んできた時「なぜお母さんは日本人なの?イギリス人やフィリピン人の方が良かったにー。」と言いながら、友達から攻められたことを聞いた時は、とても辛かった。
一方こんな経'443もある。韓国に初めて来たとき、いろいろな韓国人から「韓国のどこに行ってみたいか」と聞かれると、私はいつも「プヨに行きたい」と答えていた。観光地である釜山や慶州には興味を持たず、プヨだったのだ。しかし行く機会は、なかなかなかった。あれは、韓国に住んで10年ぐらいたった頃のことだ。近所のおばさんたちが子供の教育のために、プヨとファソンに観光バス一台借りて行くことになったので、私も息子を連れて、ついに行くことになった。バスがその地域に近づいていくと山がなだらかで、慶北地域よりも気が柔らかい。そこは、どことなく日本を感じさせた。そして百済博物館に入り昔の百済の村の模型をみた時、全身鳥肌が立った。「あぁ、やっと帰ってきた!!!」それは無意識の自分がそう思ったらしい。前世というものがあるならば、何やら私はその時代日本に流され百済の村を懐かしがっていた者の一人だったようだ。「だから私は韓国に嫁に来て、今こうして韓国を愛し生活しているのだ。」と、つくづく感じたものだった。
私は現在、大邱市壽城区に住んでいる。車で少し行くと鹿洞書院といって、豊臣秀吉の時代に文禄・慶長の役に出兵してきた沙也加が、この国を選択し帰化して、豊臣軍と戦ったキム・チュンソン将軍を祭る場所がある。この将軍はどんな思いで朝鮮を愛し、帰化を選択して、率先して当時の日本軍と戦ったのだろうかー。
また家の近所には、壽城池がある。その池は、日帝時代総督府に直談判しプラス自分の私財を投げうった水崎林太郎氏が、地元の農民達と協力し合って造った池だ。水崎氏は「この池が見えるところに、韓国式のお墓を立ててそこに眠りたい」という遺言通りに、池のほとりに永眠されている。そんな水崎林太郎氏の存在を知ったのは、今から6年前のことであった。その時私はもう一度、肝に銘じたことがある。「この水崎氏のように、ここに永眠したいといえるほど、この韓国の地を愛しきったといえる場所を作りたい!」と。
こうして振り返ってみると、私はたいへん恵まれた時代に、たいへん恵まれた場所で、大好きな韓国との出会いを深めている。それはすべて、歴史上多くの先人たちの苦労の土台があったからこそだと思う。その先人たちがいて、今の私が、今ここに存在している。

そんな思いを持っていた私にとって、ソウルの戦争記念館の展示は若干の違和感として感じられたのだ。それは記念館の最後にある「6.25戦争室3」が、「UN軍のおかげで、今の韓国が存在する。」と強く主張しているように、私には感じたからである。確かにあの時、マッカーサーの仁川上陸作戦がなかったら、そして63か国からの参戦及び多くの支援がなかったら、今の韓国は無かったかもしれない。しかし、そのUN軍の下、愛する祖国のために命を懸けて戦った国軍始め、多くの韓国国民の犠牲はどうなるのか。「今の韓国が存在するのは、愛する祖国を守った英霊その他多くの韓国国民のおかげであり、それを支援し、一緒に戦ってくれたUN軍もいた。」のではないだろうか。その時、民族の誇り、民族主義、国という概念が、当然のように存在している私の固定観念が揺らいだ。では、私が今まで出会った韓国は、本当の韓国といえるのだろうかー。
結局それは、あくまでも環境から与えられた「受動的な韓国との出会い」であって、自らが積極的に出会っていった「能動的な韓国との出会い」ではなかったのだ。ではそんな韓国を、私は愛している!と、たやすくいえるのだろうか。愛されるから愛す。そんな少女漫画のような出会いなんて、へどが出る。韓国と私、国家民族を超えるべき「出会いの姿勢」から、根本的に変えなければならないー。もっと壮絶で荘厳なる、韓国との出会い!遂にタブドン・ウェガン・ポハン地域を通して、20年間出会うことができなかった、想像を絶するほど深い韓国と出会うことになる。

あの日は、重い雲がどんよりと広がる雨上がりだった。6.25戦争時、最も熾烈な戦闘地だったタブドン。大邱から車で高速道路を走らせながら、両側の山々を横目で流す。確かにこの山を越え盆地である大邱を落としたら、一気に釜山まで陥落可能な地形であることが確認される。震える手足を抑えながら、ハンドルを握る。きっと一人だったら、来れなかっただろう。助手席で同行してくれた人のたわいのない会話が、緊張した私の心を和ませてくれた。タブドン戦闘記念館に到着し、車を降りる。この地でどれだけの多くの人たちが、汗と血と涙を流して戦ったのだろうー。心が震えて、立って歩くことが精一杯だった。ただ今の私たちができるのは、この戦争の歴史を直視すること。記念館を回りながら展示物を見る中で、護国英霊たちの深い叫びを感じた。外に出ると、目の前にユウハク山がある。シン・ハギュン主演の「高地戦」という映画のワンシーンが、頭に浮かぶ。その横には、映画「ブラザーフッド」の背景になった328高地も見える。目の前に広がるすべての光景は、65年前実際にここで戦争が起きた現場なのだ。55日間の熾烈なタブドン戦線を守ったからこそ、今韓国の自由主義が存在する。もしもあの時この場所が守り切れなかったら、韓国はもちろん、日本もどうなっていたかわからない。
またナクトン河沿いを車で走らせながら、ウェガン戦勝記念館に向かう。私はその時ナクトン河が、こんなに小さいとは思わなかった。心の震えは、何とか治まってきた。しかし記念館2階の6.25の背景である「アジソンライン」の説明を読んだとき、心の震えが怒りの震えに変わった。「アメリカのアジソンがこんな線を勝手に引くことによって、共産圏に戦争を誘導させたのではないだろうか?」。私はこの時初めて、アメリカの軍事産業、すなわちアメリカの経済復興のために、この韓半島が自由主義と共産主義の戦争の舞台にさせられたのではないかと思わされた。このようにこの記念館は、造った人の意志が感じられ、展示物が分かりやすい。上の階にある6.25戦争の日程毎の韓半島戦線の変化は、戦争の全体像が一目でわかる。ソウルの戦争記念館よりも、ずっと韓国の観点で展示され、客観的で理解しやすい。
そして今度は、ウェガン鉄橋に向かった。車で川沿いを走りながら想う。当時このナクトン河が、真っ赤な血の色で染まったことをー。車を降りて、鉄橋を歩いてみる。こんなに狭いナクトン河のウェガン鉄橋で、ソウルの漢江鉄橋爆破事件と同じことが起こったとはー。鉄橋爆破前に渡り切れなかった民間人は、何を想っただろう。もしかして家族がここで別れ、永遠に会えなくなってしまったかもしれないー。鉄橋爆破の場所には、当時の写真が掛けられてある。心の震えは怒りの震えと一緒になって、居たたまれない思いになる。護国英霊たちの悲しい叫びは、止むことを知らない。
「ここまで来たら、ポハンにも行かなければ。若い護国英霊の学徒兵たちに会いに行きたい」。次の日、大邱ポハン高速道路で、今度は車を東に走らせる。パルゴンICから乗るその道は、65年前右は自由主義、左は共産主義に分かれて戦った戦線上にほぼある。「この地で、人類歴史の二大イデオロギーという汚物が、白衣民族の高貴な尊厳を奪っていったとはー」。青い空はどこまでも澄んでいたが、私の心は既に憎悪と怒りで澱んでいた。学徒義勇軍戦勝記念館は、ポハンの街の隅っこに静かにたたずんでいた。のち、ポハン出身の知り合いから、「こんなのがあるとは、知らなかった。」と聞かされたのを思い出す。記念館を入ると、息子と同年代と思われる学生帽をかぶった幼い学生たちの写真が、私たちを出迎えてくれた。「若すぎるー。」「この子たちを、祖国のために戦場に送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母親たちの想いは、いったいー。」。今まで行った記念館よりも、強烈に、胸が張り裂けそうになる。その場にドッと座り込んで、慟哭しそうになる想いを抑えつつ、直視しようとする。しかし記念館後半の「母への手紙」では、その意志さえも、簡単に崩れさせる。涙が止めどなく溢れるー。
この6.25戦争はただ単に、韓民族同士の思想の違いによって起きた戦争ではない。もちろん、複雑に絡み合った当時の世界状況に対して、慎重に整理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は当然だ。しかし結果として、世界がこの韓半島をどのように扱っただろうか。それは、日本の植民地統治時代が敗戦によって終了し、その後北からはロシアや中国の共産主義が侵略し、南からはアメリカの自由主義がUN軍という「正義の味方」のような形で表れ統治し、この地で世界を巻き込んだ思想対思想の第3次世界大戦ともいえる激しい戦争になってしまったのではないだろうか。韓半島にとっては、寝耳に水のような戦争だろう。きっかけはやはり、日本の大東亜共栄圏、植民地政策の野望の失敗にある。本来ならば敗戦した日本こそが、この戦争の舞台になり、東日本と西日本が自由主義と共産主義に分かれて、38度線のように分断されていたのかもしれないのだ。この韓半島は日本の代身となって、人類歴史上の2つのイデオロギー・思想の、最後の相克の現場となってしまったのだ。
こうして人類は歴史上イデオロギーや思想などを創って、より幸福な人生を求めてきた。しかし今までのイデオロギー・思想が、人類にもたらしたものは、結局2度の世界大戦などではなかったか。特に今でもこの韓半島は、休戦という、世界を代表した2大イデオロギーの最後の決戦場でもある。白衣民族にとって、この現実的課題は、あまりにも重すぎる。しかし人類の痛哭の涙を抱きながら、アジアを代表し、この想いを世界に発信していけるのも、この白衣民族しかいないだろう。こうして韓民族と歴史上すべての人類の「恨」を解いていけるのも、この痛哭の涙を骨'620深く知る、白衣民族しかいないのだ!この2大怪物であるイデオロギーを包越することができる新しいイデオロギーは、きっとこの地から世界に広がっていくに違いない。そう、その日は、それほど遠くないー。世界のミッションに目覚め、新しいイデオロギーを世界に発信していく韓国!これから私は、人生をかけて「世界の宝」であるそんな韓国と出会っていきたいと、心から想っているー。
そして同時に、この韓国の価値を、私は世界に発信していきたいと思う。特に人類歴史上2大イデオロギーの熾烈な相克の現場であったこのタブドン・ウェガン・ポハン地域は、 必ずや世界遺産となるべき場所だと思う。ヨーロッパの東西ドイツを隔てたベルリンの壁が、今では教育の現場としての観光地のように、世界から多くの人たちがこのタブドン・ウェガン・ポハン地域に教育観光で来るのだ。生きた歴史との出会い。特に私は日本人であれば、一生のうちで一度は訪れなければならない場所として、このタブドン・ウェガン・ポハン地域を推進したい。実際に今まで、約100人ほどの日本人に紹介させてもらった。この教育観光に参加した彼らは、涙を流しながら言っていた。「知らなかったー。」と。まずは、無知であることを知る。そんな謙"394な姿勢こそが、いつかは国家間の相互理解に繋がるだろう。民族を超えて一人の人間として、ありのままの歴史を直視し、正確に知ること。そして、今までの歴史を作ってきた先人たちに敬意を払いつつ、私たちはさらに人類歴史を進めていく偉大な一歩を踏み出していくのだ。その人類を感動させる新しいビジョンを生み出すためにも、このタブドン・ウェガン・ポハン地域の痛哭の涙の歴史と出会う必要があることを確信する。そう、6.25戦争の護国英霊たちをはじめ、人類歴史上戦争その他によって犠牲になった多くの魂たちの死を、決して無'364にしてはいけないのだ。だから私は日本人をはじめ全世界の人々に、韓半島のこのタブドン・ウェガン・ポハン地域の存在を伝え続け、この地から新しい未来を創出する意志とその決断を、命の続く限り、後世に受け継いでいきたいと心から思うー。

[ 2015-10-06, 17:3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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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산    2015-10-08 오후 1:03
일본인 여성으로, 일본의 태평양 전쟁(일본은 대동아전쟁이라 하지만)과 한국의 6.25를 경험하지 못하신 분이 다부동 전투와 포항전투의 전적지를 보시고 쓰신 감동적인 글에 먼저 감사를 드리며 그 전투에서 희생하신 분이나 고난을 겪었던 분들의 후손들이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오늘의 우리를 생각할때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포항전투 당시 초등학교 1학년으로 안강/기계전투 시 죽지않고 살아난 저도 부끄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젊으신 것 같은데 많이 가르쳐주시길 기원합니다.
   법과 도덕    2015-10-07 오후 11:19
저 위 글에서 < 일본이이라도 좋은 사람이 있었어. 거꾸로 한국인이어도 나쁜 놈도 있었어. 모두 다 똑 같은 인간이야 >글쓴이는 마음씨가 아름다운 분입니다.
   순덕이    2015-10-07 오후 11:12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하는 분이시네요. 부끄럽기도하구요. 분발하겠습니다
   파나마    2015-10-07 오후 6:34
맑은 영혼입니다. 눈물을 스미게 하는 군요.
한국생활에 항상 축복이 있기를!
   Abraham    2015-10-07 오후 12:18
정말 감동적입니다. 가슴이 북바쳐 옵니다. 웬지 부끄러운 마음이들구요.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30년을 살면서도 그런 역사적인 장소에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음 귀국 때에는 우선적으로 이런 곳들을 찾아보리라 작정했습니다.
글쓴이에게 감사드리며 뜻한 일이 아름답게 열매맺기를 바랍니다.
   zaskal    2015-10-07 오전 10:37
왜그런지 눈물이 나네요
   마중가    2015-10-06 오후 10:47
심금울 울려주는 글 잘 읽었습니다. 진정 어린 글귀를 보면서 눈시울도 뜨거워지곤 했습니다. 한민족의 애환을 그토록 깊이 이해해 주시는 일본인을 만난것 같아 감개무량합니다. 역사의 격랑속에서 허우적대면서 바둥거리면서 이 겨레는 오늘도 죽을힘 다하고 있습니다. 지난 5 천년처럼.....
9월21일 프레스 센터 20층에서 만났던 이케다 미야꼬 님 , 저 기억하시죠? 조용히 웃으시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그렇게 불처럼 뜨거운 정을 간직하고 계신 분인줄은 몰랐습니다. 다시한번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정중히    2015-10-06 오후 9:59
20년간 사셨다니 한국인의 비겁함과 위선(거짓말 잘하는)등도 터득하셨겠군요.
왜 한국이 분단되어 70년간 살고 있습니까? 일본의 잘못이 아닙니다.
북조선이 저토록 버티면서 노예생활을 하는 것은 그들의 완악함 때문이고
남한의 일부 지역민의 이해할 수 없는 이기심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처절히 깨달고 대한민국이 하나가 될 때 저 북한은 소리없이 무너져내리고
모든 분열은 끝나는 것이지, 남의 나라 탓할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뭏든 대한민국을 위하여 우호적이고 좋은 글 써주심에 감사드립니다.
   白丁    2015-10-06 오후 9:16
.........한국인으로서...부끄럽습니다.
   김필립    2015-10-06 오후 8:11
다부동 전투 현장을 돌아보며 역사를 관찰하며 스스로 자기 가치와 긍지를 회복하는 귀하의 놀라운 깨달음은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르며 한국인들이 인류를 위해 어떤 희생을 감당했는가를 지적한 역사에 대한 귀하의 통찰에 크게 공감하며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bestkorea    2015-10-06 오후 6:48
그렇습니다. 특히 다부동 전투 현장을 먼저 방문해 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곳에서 우리는 진실된 의미의 생명, 자유, 인권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 불 수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해리슨 김    2015-10-06 오후 6:05
평소 느끼지 못한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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