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전용, 日帝가 한민족을 피지배 원시민족으로 만들려 한 정책의 잔재
理念이란 무엇인가 (13) 문학과 좌우이념

朴京範(소설가)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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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언론과 검찰 등 우리사회의 중추세력을 좌파가 장악한 현실이 부각되고 있다. 좌파는 오래 전부터 무력이나 민중봉기에 의한 좌익혁명이 불가능함을 깨닫고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아닌 위로부터의 혁명 그리고 권력이 아닌 정신적 가치 점유에 의한 혁명을 기획하였는데 그 첫 대상은 종교와 문학이었던 것이다.
이에 관하여 1998년 좌익의 사회적 고지 점령전략을 고발하는 글을 발표한 바 있었다.


좌익의 사회적 高地 점령전략
- 사회문화적 관점으로 본 좌경운동 (1998.4. 한국논단)
 
여기 커다란 황소가 묶여있다. 이 소를 제물로 쓰기 위해 잡으려 한다.
그런데 소를 잡는다고 아무 데나 마구 도끼로 찍어대면 과연 소가 쉽사리 쓰러질까? 필경 발광하는 소의 피로 주변은 범벅이 될 것이며 요긴하게 쓰일 쇠가죽도 제대로 얻지 못할 것이다.
바로 이 때 솜씨 좋은 백정이 필요하다. 백정은 자그마한 망치로 황소의 정수리를 내리친다. 몸뚱이를 여러 번 도끼로 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가죽도 상하지 않는다.
흔히들 좌익혁명은 하층 민중을 선동하여 일으키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과연 역사상으로는 그런 사례들이 있고, 좌익혁명은 그 본질상 하층 민중들에게 ‘모두가 고루 잘사는 사회’를 당근으로 제시하여 혁명을 유도하는 것이 보편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좀 다르다. 6·25를 거쳐 그들의 실상을 보아서 그런지, ‘하층 민중’이라 할지라도 하나같이 공산주의란 말에는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좌경혁명적 ‘지식인’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고 한심하게도 생각되는 것이다.
 
사회적 高地占領의 전략
 
그러나 어차피 ‘혁명과업’은 완수해야 하는 것… 어찌해서라도 남한이 主(주)가 되는 흡수통일은 막아야 하며, 통일 이후에도 되도록 북한의 세력이 지배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남한에 공산주의와의 이질감을 갖지 않는 계층을 두텁게 쌓아야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남한의 좌익세력이 채택한 고도의 혁명전선전술은 마치 백정이 소의 정수리를 때리는 것과 같은 사회적 高地占領(고지점령)의 전략이었다. 즉 민중을 부추기기보다는 지배층의 思考(사고)를 ‘民衆化(민중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 각 분야 중에서 정신적으로 상층부에 있고, 聖域(성역) 혹은 準(준) 성역으로 간주되는 곳에 침투하고 또한 자라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문학과 종교가 그 가장 적합한 토양이다.
어느 사회이든지 이른바 고급문화는 하층 대중문화보다 쉽게 변화하지 않으며 상대적으로 보수적이게 마련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의 문학계는 이른바 고급문화에 속하는 곳이 더 ‘진보적’이다.
純文學(순문학)이란 인간의 眈美的(탐미적) 욕구에 의해 여느 예술작품처럼, 대중에로의 전파라든지 상업성 등을 고려하지 않고 창작되는 문학이다. 그러므로 일단 순문학이라는 목적을 가지면, 인간심리의 내면적 성찰을 주로하기 때문에 아무리 쉽게 쓴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순문학의 본질로 볼 때 우리의 문학이 일찍이 하나같이 한글전용에 가로쓰기로 통일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대중문학을 순문학으로 위장하는 경우는 별도로 하더라도, 순문학이라는 그 자체로 어차피 만족할만한 대중성과 상업성은 얻을 수 없다. 아무리 ‘산뜻하고 삼빡하고 상큼한’ 분위기로 포장되고 편집된 문학서적이라 할지라도 담아있는 내용이 순문학의 목적에 충실할 경우, 가지고 있는 순문학 본연의 무게를 감당 못하여 대중성을 가지지 못한다. 따라서 상업적인 사정에 의한 선택이 절대적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민중지향적’인 인위적 통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들’의 ‘商業外的 所信(상업외적 소신)’에 基因(기인)한 것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종교계 사고의 非反動化
 
漢字(한자)로된 제목에 세로쓰기의 책은 지금은 어둠침침하고 퀴퀴한 뒷골목 만화방의 무협지에나 남아있다.
마찬가지로 종교계에서도 思考의 ‘非反動化(비반동화)’를 위하여, <하느님의 말씀>의 엄숙함과 권위를 없애고 쉽고 편한 한글가로쓰기로 바꾸기 운동이 있었다.
그런데 신도중에서 漢字나 漢字말을 전혀 모를 하층민중은 오히려 기독교(개신교)측에 많은데도 어찌된 일인지 상대적인 상류층 종교인 천주교에 쉽게 각색한 한글가로쓰기 성경이 채택되고 있다.
천주교 미사는 전통적으로 권위와 격식을 존중하기 때문에 까다로운 祭禮儀式(제례의식)을 하층민중으로서는 따라가기 어렵다. 천주교 신자들은 대체로 기본 교양이 있는 계층의 사람들이고, 열성적으로 전도를 하지도 않으므로 주로 代代(대대)로의 전통이 있는 집안에서 믿는 중상류층 종교이다. 요전의 유력한 대통령후보 二명이 모두 (국민전체의 신도수는 그렇게 많지 않은) 천주교 신자였다는 것도 결코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천주교 신자들 중에 전통 성경이 어려워서 못 읽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혁신’은 강행된 것이다.
 
공권력 손대기 힘든 곳에 파고든 좌익들
 
천주교가 그 본질을 벗어나 모든 이에게 쉽게 읽히는 성경을 위하여 본래의 엄숙함과 경건함 그리고 섬세한 의미의 소멸이라는 희생을 치루면서 ‘쉽고 편한’ 한글가로쓰기 성경을 正經(정경)으로 채택한 것은 二律背反的(이율배반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모든 이가 다 같이 동등하게 신앙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 바라는 바라면 뇌성마비자는 할 수 없는 聖號(성호)긋기를 폐지해야 할 것이고 여성차별의 상징인 面紗布(면사포)쓰기를 폐지하여야 할 것이다. [“男子(남자)는 하나님의 形像(형상)과 榮光(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고린도前書(전서) 11:7] 하느님도 “스스로 判斷(판단)하라”(고린도前書 11:13)고 했다. 하느님의 말씀도 스스로 판단하여 업데이트하면서 그 정도 것들을 스스로 판단하여 개혁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결국 앞에 든 예들은 사회적 상류계층에로의 ‘非反動的 思考’ 注入運動(주입운동)의 하나라고들 밖에는 달리 추론할 근거가 없다. 이렇듯 국내의 좌익운동은 단순히 고전적인 방식을 탈피하고, 檢察力(검경력) 等이 손을 대기 어려운 곳에 파고들어 ‘장차 자리 잡을 체제’(?)의 기반을 다져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좌익’은 어찌 보면 左翼(좌익)이라는 말도 맞지 않다. 그들은 고전적 의미의 좌익하고는 다르다. 그들은 남한에 의한 북한의 흡수통일을 방지하며, 통일 후에 북한의 관습과 이념이 최대한 힘을 발휘하도록 남한에 기반을 조성하려는 측이다. 흔히들 좌익의 비판에 대해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의 민주당이나 영국의 노동당, 하다못해 일본의 사회당 같으면 그런 말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새는 왼쪽 날개 끝에 추를 매달고 날 수 없다’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앞날은 세 갈래의 길이 있다. 그 첫째는 국가정책의 大右回轉(대우회전)을 단행하여 일본이나 대만과 같이 고유전통을 살리면서 완전한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이루어 국력을 신장하는 길이다. 건국이후 오십년을 그렇게 일관하였더라면 진작 독일과 같은 통일을 이루어 지금쯤은 그 지리한 이념싸움을 안 해도 되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어서 빠른 ‘민족간의 동질성 확립’과 통일을 위하여 우리의 사회문화를 ‘그들의 뜻대로’ 더욱 더 북한과 유사하게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
 
이 경우 설사 정치권력은 남한정부가 主가되어 통일을 이룬다 하더라도 일단 통일 후 대세의 역전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리하여 이 첫 번째 案(안)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고 두 번째 안 또한 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세 번째 案은, 지금까지와 같이 완전한 자유민주 체제도 아니고 사회주의 체제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서 계속 세월을 보내는 것이다. 가장 편한 타협안일 수는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우리의 국력은 갈수록 쇠약해져 결국 주변국의 속국으로 전락되고 말 것임은 명백한 일이다.
 


이 글을 쓸 당시에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문학이라는 것은 세상 현실 그 이상의 존재를 다루는 것이므로 역시 종교와 같이 靈的領域(영적영역)에 속한 것이라는 인식을 지금은 갖고 있다. 지금은 좌파문화에 의해 소설 등 문학의 위상이 낮아져서 소설이라면 단순히 거짓말의 대명사처럼 사용되기도 하는데 소설가가 이야기를 창작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의 삶은 다 우주에서 기획된 바가 있어서 지구상에 구현되는 것이다. 우주에서 기획된 많은 이야기 중에 지구의 많은 사람들의 인생설계의 모범을 보이는 이야기, 주제의 원형을 강조하다보니 지구상의 여러 환경여건에 완전히 들어맞지는 않아 구현이 유보된 이야기 등을 지구상에 전달하는 것이 소설가의 일이다. 모든 픽션의 발표는 우주의 영적진리를 지상에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은 우주의 진리 전달의 도구
 
문학은 지상의 존재가치 그 이상을 추구하므로 그 자체 진보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다시 세상을 보는 관점으로 보수성과 진보성을 가질 수 있다.
프랑스에서 역사적인 대중문학 작가 알렉산더 듀마가 영웅국립묘지로 移葬(이장)된 일이 있다. 이 조치는 대중문학에 대한 인식 변화 등 프랑스의 새로운 사회 흐름을 반영한다고 평가되었다. 이제까지 듀마의 소설과 희곡들은 프랑스 안팎에서 베스트셀러였지만 학계는 “지나치게 대중적이고 깊이가 없다”며 무시했었다. 그러나 개혁적인 문학 단체 등이 “듀마만큼 당시 시대 상황과 문화를 잘 묘사한 작가는 없다”고 반발하면서 논쟁이 계속되고 마침내 시라크 대통령이 이것을 받아들여 이장 포고령이 내려짐으로써 논란의 종지부를 찍었다고 한다. 이 사례만을 보면 마치 대중문학은 진보적인 성격을 갖고 학계가 지지하는 순수문학은 보수적인 성격을 갖는 것인 양 여겨지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대중문학이야말로 보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대중문학의 주인공들은 보통사람이 모범으로 삼을 全人(전인)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줄거리와 주제도 악을 퇴치하여 이 세상을 건전하게 유지하자는 범주에 머물고 있다.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에 흥미를 갖게 하여 이야기를 통해 세상의 섭리를 자연스럽게 배우게 하려는 목적이다.
 
순수문학은 인간의 본질 탐구 위해 세상의 裏面 담아야
 
그러나 인간의 탐구를 목표로 하고 있는 순수문학의 경우 그 주제는 단순하지 않다.
근대 순수문학 작품의 대명사라고 할 만한 A.까뮈의 <이방인>을 보면, ‘어머니의 장례식 날 섹스를 하고 바닷가에서 이유 없이 사람을 쏘아 죽인’, 부조리의 전형을 보여주는 주인공 뫼르소를 통해, 인간은 누구나 때로는 자신의 理性(이성)을 벗어나서 理解(이해)될 수 없는 부조리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운명을 타고났음을 보여주고 있다. 작품의 시선은 한 ‘파렴치한 악인’인 뫼르소의 입장에 서 있고 그를 단죄하는 재판관은 인간의 본질에 무지한 군상의 하나일 뿐이다.

또한 순수문학의 경우 전쟁을 다루었다 하더라도 결코 영웅적인 업적의 칭송에 그치지는 않고 그에 따르는 인간적 고뇌와 세상가치의 모순과 허위 등을 파헤친다. 이로 인해 독자는 세상의 裏面(이면)을 보는 눈을 기르게 된다.
그러면 순수문학이란 이렇게 세상일을 뒤틀린 視角(시각)으로 바라보기를 즐겨하는 반항적 좌파를 대변하는 문학이어야 하냐면 그렇지는 않다. 그 목적은 독자로 하여금 인간과 세상의 원리에 대한 통찰력을 기르기 위한 인간세상 이면에 대한 탐구와 해석인 것이다.
 
순수문학의 표현에는 고급언어의 使用 필수적
 
이를 위해서는 상황묘사 또한 결코 단순하지는 않아야 하며 섬세한 분위기 설정과 전달을 위한 고수준언어의 동원은 필수적이다. 독자는 줄거리를 따라가며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상황을 세밀히 묘사하는 고급언어를 통해 情緖(정서)와 思考를 高揚(고양)함으로써 순수문학이 추구하는 목표를 얻을 수 있다.
 
순수문학의 ‘비틀린’ 주제를 한글전용으로 ‘쉽게 써서’ 널리 보급
 
국내의 경우, 소설은 한글전용을 한다는 기본원칙하에 순수문학의 경우도 한글로 ‘쉽게’ 써져 널리 보급되고 있다. 이것을 두고 우리나라가 순수문학(‘본격문학’)의 대중전파도가 세계에서 이례적으로 높다 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측도 있다.

까뮈의 <이방인> 이후 허무주의를 강조한 아류작들은 국외와 국내를 막론하고 무수하다. ‘어머니의 장례식 날 섹스를 하고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자에 대한 동정심을 유발하는 글을 ‘쉽게’ 써서 내면적 통찰능력이 부족한 대중에게 널리 보급하여 이 사회에 미치고 싶은 영향은 무엇일까. 자신의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희생된 영웅들의 이야기를 허무주의적이고 회의적으로 바라보며, 絶代善(절대선)은 없다는 투로 고뇌하는 인간의 이야기를 ‘쉽게’ 써서 대중에게 널리 전파하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
 
공동체 붕괴조장의 문학에 공동체의 지원이 있어온 우리
 
이러한 공동체 붕괴조장적인 문학을 일찍부터 이른바 순수예술지원이라는 명목으로 시장논리를 넘어선 지원을 하고 있었다. 주류문단이 인정하는 순수문학의 범주에 들면 문학에 대한 정책적 지원은 부족하지 않은 우리이지만 그 진정한 문학적 성과는 비단 노벨상을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빈약한 실정이다.
그러면 순수문학의 한글전용으로 이미 고지점령이 되어버린 한글전용정책의 기원은 무엇인가. 조선시대 초기 한글이 창제되고 “세종대왕은 (용비어천가 등에서)한자와 한글을 혼용하여 글쓰기의 모범을 보여주었다”(초당대 김창진교수). 그러나 조선시대 중기 이후의 자료를 보면 한글문장 중의 한자어를 한자로 쓰는 것이 많지 않아 한문은 한문, 한글은 순한글로 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漢文과 순한글로 이원화된 언어체계는 신분계층의 분리 意圖
 
국어로 된 문장에 한자어를 한자로 쓴 것은 한문을 배우기 위한 많은 공부를 하기 어려운 일반서민들도 학문적 언어의 뜻을 알 수 있으므로 한자문화권의 비중국언어 지역으로서는 민주적인 문장언어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국민 누구나가 학문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신분계층의 고정을 위해서는 위협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상류층과 하층민의 언어체계를 달리하여 계층간의 이질화로 신분체계를 유지하려는 시도는 세계 어느 곳에나 공통적인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세종의 혼용 시범이 있었음에도 조선시대의 지배계층은 학문적 표기능력이 없는 하층민의 순한글과 학문을 배우는 양반들의 한문으로 의도적인 이원화를 했던 것이다.
 
國漢文混用은 민주적인 언어체계
 
이후 개화기에 고종은 국한문혼용을 선포했다. 모든 문장을 국어로 쓰되 학문적 의미가 깊은 단어는 한자로 쓰고 그렇지 않으면 한글로 써도 무방하여 최고의 지성적 문장에서부터 일상적인 생활사의 전달까지 모든 전달방식을 같은 언어체계 안에서 소화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라 안의 모든 국민의 언어체계를 통일하여 신분이 없는 사회를 만들려는 것이었다. 고종의 국한문혼용은 개화된 일본의 영향을 받음도 있지만 세종 時의 반포취지를 따르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시대가 된 뒤로 공식적으로는 이른바 내선일체를 표방했지만 일본인과 친일한국인 지배계층은 역시 자신들의 기득권유지를 위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에 따라 일반한국인에게는 순한글 언어를 권장하였으며 그것은 1920년대의 문화정책이었다. 한국인은 대일본제국 치하의 조선민족으로서 국가지도층의 학문적 언어를 배제한 순한글 문화를 갖도록 하여 마치 원시문화부족처럼 피지배민족으로 주저앉도록 하는 것이었다.
 
1920年代 日帝, 조선인을 피지배 원시민족으로 만들기 위해 순한글문화보급

일제는 조선인 민중에게는 순한글의 문학을 보급하여 순한글에 익숙하도록 했다. 학문표기능력이 있는 한자혼용체는 지식층만 보도록 유도하여 점차 일본어에 흡수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기간이 짧아서 국한문혼용체는 일제시대를 거치고 살아남았다.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 후 국한문혼용체는 통용되었다.
그러나 신분고정 욕구는 다시 살아나 대한민국의 신지배층은 한글전용정책으로 다시 지배층과 백성의 언어분화를 기도(企圖)하였다. 그리하여 주지(周知)하다시피 이번에는 백성에게 순한글을 권하고 지배층은 학문적 언어로 영어를 사용하도록 했다. 문학은 1920년 이후 여전히 한글전용이 이어져 왔기에 이를 바탕으로 다른 모든 분야도 점차 순한글로 통일시켜 갔다. 이렇게 지배층과 백성의 언어분화가 이루어지도록 크게 기여한 것이 1920년대에 만들어진 체계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한국의 문단이다.
 
지배층과 백성의 언어分化는 민중을 개돼지처럼 다루기 위한 좋은 환경
 
사람의 인생은 우주에서 기획된 바가 있어서 세상에 구현되는 것이다. 우주에서 기획된 많은 인생 이야기의 모범을 세상에 전달하는 것이 소설가의 일이다. 이런 우주의 진리를 전달하는 데는 더욱 인간의 지혜를 함유하는 언어를 써야 한다. 소설은 일상 언어로 전달이 되니 가볍고 쉬운 표현으로만 대충해도 좋다는 것은 1920년대 일제가 韓민족을 영구히 대일본제국의 일부인 피지배민족으로 묶어놓고자 시행했던 문화정책의 잔재이다.
종북세력은 본래 우리 대한민국의 반만년 문화를 부정하는 세력이기에 그러한 일제의 문화정책을 이어받아 오늘까지 우리 대한민국의 정신문화를 좀먹고 있다. 종북정권이 들어서면 그들은 강제적 입법으로 우리민족모두에게 그들의 문화적 가치관을 따르게 할 것이다.
 


[ 2017-04-05, 15:1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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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朴京範    2017-04-06 오후 10:21
개인적으로 경제정책 등은 큰 관심은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명백히 국민모두에게 희망이 되는 한자혼용을 좌파오랑캐는 저들의 세력강화에 도움이 되지 않기에 받아들이기 만무함을 알기 대문에 좌파정권은 안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宗村居士    2017-04-06 오전 11:25
한글 專用主義者들의 僞善을 한번 보자.
그들도 어느 정도의 漢字는 알고 있다.
아니, 안다고 심지어 자랑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초등학교 한자 교육을 決死 反對한다.
이들의 심보는 ‘나는 배워도 남은 배우지 말라’이다.

또한 그들은 漢字에 대한 두드러기는 天下無比이면서
英語에 대한 두드러기는 미약하기 짝이 없다.
그러니 그들이 진정 한국어를 사랑하는 者들일까?
   미적지그니    2017-04-06 오전 5:46
십여년전 신문에서 '역세권'이란 단어를 처음 대하고 당황했습니다. 요즈음 쓰이는 '식감'이란 단어는 더 당황하게 만듭니다. '식자재'는 처음 듣는 순간 건물 내장재료인 줄 알았지요. 제 아파트 인근 경사진 도로에 얼마 전까지 '방활사'라는 팻말이 있었습니다. 차라리 '防滑沙'라 한자로 쓰든가. 中國字로 中國語法으로 만든 新造語가 다만 한글로 표기하였다하여 우리말이 되는가요?.... 한자를 혼용하든지 아니면 우리 고유한 말들을 활용하여 새낱말을 만들든지....묻힌 고유어를 발굴하여 새 의미를 부여하고 다시 활용하든지....혼이 깃들지 않은, 국민 정서가 담기지 않은 언어를 쓰는 인종은, 그 국가는 제대로 오래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역세권'은 '驛勢圈'이라 쓰든지 아니면 '역마을'이라하든지 해야합니다. '식감'은 '食感'이라 쓰든지... '먹는맛' '목넘기는맛' '삼키는느낌'이라 말하면 촌스럽습니까?... '식자재'를 '요리재료'라 쓰면 누가 무식하다 욕합니까, 조상이 더치게 됩니까? 차라리 食材料'라 쓰든지.....우리 글자 한글이 한갓 발음기호가 되버린지 오랩니다. 아주 결함이 많은 발음기호죠. 차라리 국제통용발음기호를 씁시다..........게다가 툭하면 연례행사처럼 노벨문학상 타령.......꼴같지 않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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