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가를 통한 日帝와 해방공간의 이해와 우리가 취해야 할 처신
일본은 우리를 이웃으로 여기지만 중국은 자기들이 기르던 개 취급하려 들고 있다. 이를 깨달아야 하고 깨달았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길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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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 사람만 보면 꼬리를 치는 것은 오랜 습관이 DNA화 되어 그렇다는데 우리도 중국 앞에서 같은 현상을 보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 삼천리 이 강산에 먼 동이 튼다.
  동무야 자리차고 일어 나거라 / 산 넘어 바다 건너 태평양 넘어
  아아 자유의 자유의 종이 울린다… 2.3절 생략...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만들어진 '독립 행진곡'이라는 노래다. 흔히들 ‘해방가’로 알려져 일제 해방과 관련짓는 경우가 많은데 노랫말을 자세히 음미해보면 이는 일제뿐 아니라 조선이 생긴 이래 과거 전체가 '어둡고 괴로운 밤'을 의미하고 있다. 서민들이 무지해서 서러웠던 것은 일제시대뿐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일제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이런 생각이라도 할 정도의 자의식에 눈을 떴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전에는 서럽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무지했던 것이다.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
  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 꽃을 / 얼마나 외쳤던가 태극 깃발을
  갈매기야 웃어라 파도야 춤춰라 / 귀국선 뱃머리에 희망도 크다
  
  이 노래 역시 해방 이듬해에 나온 '귀국선'이라는 제목의 노래다. 그러나 처음에는 대중들로부터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해방의 감격이란 게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이 노래가 유행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도 5년이나 지난 후인 1950년대 초로 아마도 전쟁 중에 박진감 있는 멜로디의 영향이었지 않았는가 여겨진다. 노랫말이 주는 의미와는 별개인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귀국이란 게 어떤 이들에게는 특별할 수도 있겠지만 일반 서민들에게는 서울에 돈 벌러 갔다가 명절에 고향 내려가는 감회와 비슷한 것일 수도 있다.
  
  이외에도 해방 후 초기에 나온 노래가 더 있지만 일제 해방에 따른 특별한 의미의 노래는 별로 보이질 않는다. 이렇게 조용했던 것은 오히려 해방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된다. 해방이 되고도 고국에 돌아오지 않고 일본에서 삶의 터전을 잡은 사람들은 물론이요, 일본 기업이 망해 임금도 다 못 받게 된 일부 노무자들의 심경이 그러했을 것 같다. 그들은 전쟁 때문이지 일본 기업이 악덕하다고 느끼지는 않았던 듯하다. 힘든 것이야 당시 어디 간들 돈 버는 일에 힘들지 않는 곳이 있었던가?
  
  아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 아아 ~ 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
  다 같은 고향 땅을 가고 오건만 / 남북이 가로막혀 원한 천릿길
  꿈마다 너를 찾아 꿈마다 너를 찾아 / 삼팔선을 헤맨다 …이하 생략…
  
  역시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가수 남인수가 낸 '가거라 삼팔선아'라는 노래의 가사 일부다. 이렇게 애절한 노랫말도 드물 것이다. 다음 절은 더 애절하다. 당시 최고의 히트곡이었다고 한다. 韓日 간의 현해탄(대한해협)을 원망하는 노래는 잘 보이지 않는 반면, 남북을 가른 38선에 대해서 극한 반응을 드러내고 있다. 38선은 절망이었다. 현해탄은 건널 수 있었으나 38선은 넘지 못했다.
  
  지금 사람들이 당시 일본으로 가면 생지옥으로 모두 죽음의 길이었던 듯 말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너도나도 일본을 향해 줄을 섰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갈 수 없는 사람들은 밀항을 해서라도 기어코 들어가려 했다. 인생역전(人生逆轉)을 꿈꿨다. 한일합병 이후 일본 거주 조선인이 200만 명 가까울 때도 있었다. 그리고 해방이 되었으나 고향으로 돌아오길 거부하고 일본에 정착한 사람들만도 6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하고 있다. 못 돌아오게 막은 이 없다.
  
  다시 노래로 돌아가 보자. 해방 후 6·25 전쟁이 나기 전까지 이외 히트곡으로는 '신라의 달밤', '울고 넘는 박달재' 같은 노래가 대표적으로 꼽히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애창되고 있는 노래다. 소위 '일제 36년 암흑기'를 거친 국민들이 이렇게 낭만적이고도 순정적일 수가 있을까? '박달재의 금봉이'는 어떻게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았을까? 일부 위안부 할머니들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성토하는 그런 일제시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억울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억울한 사람들은 지금도 많다. 그러나 지금 억울한 일부 사람들이 이 시대를 대표할 수 없듯이 당시 위안부 할머니들 삶도 일제시대 전부로 말할 수는 없다. 그 많다는 '강제징용 근로자'들은 왜 말이 없는가? 모두 어디에 있는가? 별로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고래로부터 일본은 한국이 좀 뒤처졌지만 동등한 입장을 견지하려 노력한 흔적이 많다. 한일합병만 해도 굳이 조약같은 거추장스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 좀 더 거칠게 점령할 수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이는 설명이 길어져 생략한다) 그러나 중국은 시종일관 오늘날까지도 변방 속국 정도로 보는 시각을 벗지 못하고 있다. 우리부터가 일본과의 문제라면 함부로 따지려 들고, 중국과의 문제는 쉽게 굽히려 드는 정서가 뿌리 깊게 남아 있는 듯하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 것이 이런 경우에도 해당되는지는 모르겠다. 이제 우리는 일본을 증오하고 우리의 후원국인 미국으로부터도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형국이다. 중국 앞에 스스로 다시 무릎 꿇으려 하고 있다. 개가 사람만 보면 꼬리를 치는 것은 오랜 습관이 DNA화 되어 그렇다는데 우리도 중국 앞에서 같은 현상을 보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전쟁에서 일본은 미국에게는 졌지만 중국에게는 이긴 나라였다. 조선을 중국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은 일본이었다. 지금 일본은 우리를 동맹으로 대우하려 하지만 중국은 우리를 변방 제후국으로 취급한다. 일본은 우리를 이웃으로 여기지만 중국은 자기들이 기르던 개 취급하려 들고 있다. 이를 깨달아야 하고 깨달았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길이 보일 것이다.
언론의 난
[ 2017-11-14, 06:16 ] 조회수 : 1235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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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白丁   2017-11-15 오전 5:57
나가자 씩씩하게 대한 소년아 / 태극기 높이 들고 앞장을 서서 / 우리는 싸우는 대한의 아들 딸 / 무찌르고 말테야 중공 오랑캐…우리 소년 시절 불렀던 ‘대한의 아들’ 이란 노래가 생각납니다. 우리에게 중국은 中共 오랑캐일 뿐. 孫文의 中華民國은 현 臺灣(타이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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