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노인들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
"교복을 입고 전차를 타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오고 특별취급을 해 주더라고. 일생에서 가장 성취감이 있었던 때 같아."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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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교 선배인 법조인 세 분과 함께 함박눈이 쏟아지던 월요일 점심을 함께 했다. 내가 그 자리에 끼어도 될까 미안할 정도로 이 세상에서 모든 걸 갖춘 분들이다. 그들은 우선 금 수저 출신이다. 부잣집이거나 대법관 같은 고위공무원이었다. 그들은 속칭 KS출신중에서도 최고의 엘리트였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고시 양과에 합격하거나 수석합격의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하버드나 독일의 일류대에서 학위를 얻기도 했다. 성품마저 온유한 그들은 법관으로서의 인생길도 큰 무리가 없이 칠십 고개를 넘어섰다. 하늘이 내린 복을 탄 사람들 같았다.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평생을 살면서 선배님들은 언제가 가장 행복했어요?”
  그들이 가진 행복 중 어떤 것을 가장 강렬하게 느꼈을까 궁금해서 물었다. 오랫동안 법관생활을 한 좌장격인 선배가 먼저 말했다.
  
  “내가 대구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고등학교 입시를 쳐서 들어갔었지. 교복을 입고 전차를 타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오고 특별취급을 해 주더라고. 일생에서 가장 성취감이 있었던 때 같아. 그 후에 서울법대를 갔는데 시쿤둥했어. 당연한 걸로 생각했으니까. 고시에 합격하고 법관이 됐는데도 돌이켜 보면 경기라는 관문을 통과했을 때가 가장 행복했었다는 생각이야.”
  
  같이 밥을 먹던 다른 선배가 말했다. 그는 아버지가 대법관이었고 그 자신도 고시에 수석합격한 후 오래 법관생활을 했다.
  
  “아버지가 광주법원 판사로 계시는 바람에 나는 광주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5학년 때 아버지가 서울고법으로 전근하셔서 서울로 올라왔지. 하루는 아버지가 손을 잡고 인사동을 거쳐 화동 쪽으로 가서 어떤 학교 주변을 함께 빙 돌면서 보게 하시는 거야. 그게 경기중학교였지. 나를 그 학교에 입학시키려고 결심하고 보게 한 거지. 그 후로 서울 법대는 특별한 감흥은 없었어. 고시에 수석한 것도 그래. 비교적 오랫동안 공부했기 때문에 될 게 됐구나 했어. 대법관이던 아버지가 ‘수고했어’라고 한 마디 하셨지.”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얘기를 듣던 또 다른 선배가 자기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말했다.
  
  “나는 청운 국민학교에서 항상 일등을 했었지. 교장선생은 나보고 경기중학교 입시에서 수석을 해야 한다고 했어. 그런데 성적을 보니까 61등을 한 거야. 내가 합격 후 아버지와 교장선생님을 찾아갔는데 교장선생님이 막 꾸중을 하시더라구. 그때는 중학입시에서 수석을 하면 신문에도 나고 막 그랬어. 아버지는 나한테 교복을 입히시더니 나를 데리고 종로통의 신신백화점 쪽으로 가셔서 그 일대를 두세 바퀴 손을 잡고 자꾸만 도시는 거야. 왜 그런지 영문을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세상 사람들한테 아들 자랑을 하려고 그런 거야.”
  
  의외로 그들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경기라는 명문에 합격하는 순간이었다.
  
  “엄 변호사는 어땠어.”
  좌장격인 선배가 내게 물었다.
  
  “선배님들 하고는 천지차이가 나는 게 제 환경입니다. 유랑농민출신 할아버지는 일자무식이었죠. 그래도 자식을 교육시키겠다는 열정은 대단하셨어요. 아버지를 함경도 회령에서 서울로 데리고 올라와 중학교 입시를 치르게 했으니까요. 일제시대 말에 아버지는 일차 시험에서 떨어지고 이차에 갔어요. 할아버지는 영하 십도 이하로 내려간 추운 입시날 저를 데리고 경기중학교 입시장으로 데리고 가셨어요. 어머니는 그 시각 계곡물에 목욕하고 절에서 기도하고 계셨죠.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교문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기도했어요. 시험이 끝나고 나오는데 학부형들이 교문에서 일제히 운동장 쪽으로 달려왔어요. 할아버지가 제일 먼저 달려와서 나를 껴안으면서 표정을 살피더라구요. 며칠 후 내가 합격했다고 하니까 할아버지가 막 우셨죠.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우리 집안에서 나름 처음으로 효도를 한 셈이 됐죠.”
  
  남들은 시샘의 흰 눈으로 못마땅해 해도 평생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살아보면 지능과 학벌은 인생의 행복과는 무관했다. 얼마 전 한 친구가 이런 말을 전했다.
  
  “법대교수를 하고 연구원장을 한 고교동창 그 친구 말이야, 퇴직을 하고 한 달에 백만 원을 받는 교회 경비로 소개를 했는데 그마저 목이 잘렸어. 장로 차는 예외적으로 봐줘야 하는데 고지식하게 원칙대로 하니까 나가라는 거지.”
  
  사회생활에는 적응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상큼한 공기가 흐르는 봄날이었다. 우리들은 모두 노인이 되어 동창회에 모였다. 한 친구가 앞에 나와 노래를 부르는데 발음이 어눌한 것 같았다. 그는 이어서 하모니카도 불었다. 그가 경기중고등학교시절 동기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저는 2년 전에 뇌혈관이 터져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모든 기억을 잃어버렸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라는 어릴 적 부르던 노래의 가사조차 뇌에서 사라졌습니다. 저는 재활치료를 받으면서 어린 아기처럼 말부터 시작해서 하나하나 다시 공부했습니다. 그 노력이 오늘 이렇게 박자도 음도 맞지 않는 노래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행복합니다.”
  집념이 대단한 것 같았다. 그가 계속했다.
  
  “여러분 우리는 소년시절 명문중의 명문이라는 경기중학교과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모두 좋아했었죠. 세월이 지나고 지금 주위를 보면 병상에 누워있는 친구도 참 많습니다. 십년 동안 병원 침대에 누워 꼼짝을 못하고 눈만 깜빡거리는 친구도 있고 실버요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친구도 있습니다.”
  
  세월은 삶의 색깔을 희석시키는 것 같다. 학생시절에는 점수를 다투고 사회에서는 누가 앞서 가는지 경쟁을 하기도 했다. 이제는 인생무대의 막이 내리고 우리는 텅 빈 객석을 보며 모두 겨울나무 같은 찬바람을 맞고 있다. 그래도 어린날 밤을 새가며 노력해서 이루었던 작은 성취와 할아버지의 눈물은 따뜻한 기억으로 저 세상으로 가지고 갈 수 있을 것 같다.
  
  
[ 2017-12-24, 20:2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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