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니스 라디오와 3代를 이은 반닫이
일찍 백발이 된 아내는 요즈음 자기 살림들을 하나하나 남들한테 선물을 한다.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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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심시간 이웃 사무실의 오 변호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도중에 이런 말이 흘러 나왔다.
  
  “칠십대 중반쯤의 학자인 분이 어느 날 보자기에 싼 걸 들고 우리 집으로 오셨어. 보자기를 푸시는 걸 보니까 고급 공예품인 금빛이 나는 유리잔 세트였어. 그분은 평생 아끼던 물건이었다고 하면서 미리미리 주변의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주려고 가지고 왔다는 거야. 내가 인연이 깊은 것도 아닌데 그걸 주시니까 감동이었지.”
  
  죽음의 준비로 미리미리 주변을 가볍게 정리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나도 갑자기 찾아온 고교 선배로부터 중국음식점에서 식사 대접을 받은 적이 있었다. 죽기 전에 한번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찾아서 밥을 사주는 게 그가 하는 일이라고 했다. 모르던 대학교수가 찾아온 적도 있다. 그의 버킷리스트에 나를 만나는 게 들어 있었다고 했다. 나같은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 그런 일은 감사이고 영광이었다. 가을이 되면 나무들이 한여름 무성했던 잎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몸을 가볍게 하듯 인생도 그렇게 겨울을 준비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일찍 백발이 된 아내는 요즈음 자기 살림들을 하나하나 남들한테 선물을 한다. 집안에는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있게 하자고 한다. 아내는 그동안 소중히 보관해 온 쌀 뒤주를 백마강 가에 농가주택을 마련한 나의 고교 선배 집에 선물했다. 아내는 어려서부터 친구같이 지냈다는 오래된 제니스 라디오를 카페를 개업한 나의 친구에게 선물했다. 빈티지 스타일로 인테리어를 한 카페의 벽에 오래된 고물 라디오는 딱 어울리는 것 같았다.
  
  몸이 약했던 아내는 어린 시절 묵직한 검은 상자 같은 제니스 라디오가 좋은 친구였다고 했다. 그 속에 작은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빈 틈을 들여다보기도 했었다고 했다. 아내는 옥션에서 경매로 사온 그림도 찾아온 목사의 부인이 거기 눈길이 가자 아쉬움 없이 주어 버리는 걸 봤다. 죽은 다음에 주는 것보다 살아서 따뜻한 피가 돌 때 선물하는 게 훨씬 좋다는 주장이다.
  
  욕심이 많은 나는 내가 쓰는 좁은 골방 안에 물건들을 가득 쌓아놓고 하나도 버리거나 남을 주지 못하고 있다. 오래된 반닫이가 책상 옆에 있다. 내가 다섯 살 무렵 그 위에 올라 절벽이라고 생각하고 뛰어내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할아버지가 중고품을 사온 것이라고 들었다. 그 반닫이는 아마도 조선시대 어느 양반집 사랑에서 그곳을 찾아오는 선비들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것 같다. 우리 집에 흘러들어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거쳐 나와도 일평생을 함께 한 그 가구는 더 이상 물건이 아니라 든든한 인격체 같았다. 골방에는 일제시대 중학교에 합격한 아버지가 시장에서 산 작은 중고 책장이 있다. 베니어판으로 만든 서랍이 세 개 달린 작은 책장이다. 그 문짝 안 귀퉁이에 아버지가 다니던 중동중학교의 마크가 붙어있다.
  
  아버지는 공책 위에 인쇄된 중학교 마크를 가위로 오려 밥풀로 책장에 붙여놓았었다. 80년이 지났는데도 밥풀로 붙인 그 종이 조각은 지금도 여전히 아버지의 중학교 합격을 기념하고 있다. 중학교에 입학한 나는 아버지와 똑같이 공책에서 학교 마크를 오려서 아버지가 붙인 학교 마크 옆에 밥풀로 나란히 붙여놓았다. 그것도 지금까지 그대로 붙어 있다. 반닫이와 작은 책장은 평생 나와 동행한 친구 같은 든든한 존재였다. 나는 그 친구들을 내게서 떼어놓지 못한다. 집착으로 내 주변에 있는 그런 물건들이나 책이 너무 많다. 법정 스님은 모든 잎을 땅에 떨군 나무들이 서 있는 숲속으로 들어가 보라고 했다. 그 나무들이 하는 얘기를 들을 수 있을 때 그는 삶을 살 줄 알 것이라고 했다. 나도 나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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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선 물|작성자 엄상익
[ 2018-02-28, 18:2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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