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在寅의 平和’와 ‘레이건의 平和’는 判異하게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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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글은 2018115일자 경기고등학교 53회 동기회보 제68호에 수록된 필자의 拙稿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뜻에서 <조갑제닷컴>에 게재합니다. 一讀하시고 鞭撻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李東馥 謹呈]

   

한반도 평화를 위하여 동분서주하겠습니다.” 2017510일 있었던 문재인(文在寅) 대통령 취임사의 한 토막이다. 실제로 취임 후 문 대통령의 행보는 문제의 한반도 평화를 상품화하여 팔아 치우는 데 전심전력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침, 점심, 저녁을 가림이 없이 그의 입술에는 평화라는 단어가 껌처럼 붙어 다니고 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는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오직 한반도의 평화라는 구두선(口頭禪)을 입에 물고 다니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 같은 평화행상(行商) 행각에는 문제가 있다. 그가 말하는 평화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가 분명치 않다.

 

평화라는 것이 그렇게 무를 썰 듯이 간단명료한 명제가 아니다. 인류는 수천년 역사를 통하여 전쟁평화를 끼고 살아 왔다는 엄연한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전쟁 사이에 평화가 머물렀고 평화와 평화 사이에 전쟁이 끼어든 악순환의 역사라고 갈파한 논자가 있다. 대부분의 경우, ‘전쟁도발자들은 “‘전쟁의 목적이 평화전취(戰取)’하려 하는 데 있다는 궤변(詭辯)으로 전쟁 도발을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켜 온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문 대통령은 평화로운 한반도는 핵과 전쟁의 위협이 없는 한반도라는 지극히 단순화된 논리로 듣는 이들을 고혹(蠱惑)시킨다. 틀린 말은 아니다. “맞으면 아프다는 말과 다를 것이 없다. 거기서 나아가서 문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는 그의 정부가 모든 것을 걸고 전쟁은 막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단순 명료해 보이는 어록(語錄)에는 누락된 공간이 있다. 우리에게 강요되는 전쟁에 대해서는 어찌 대응해야 할 것이냐는 의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북한이 다시 한 번 ‘6.25 기습 남침을 감행할 때도 우리는 전쟁을 거부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지금 한반도의 남북한 간에는 1950년의 ‘6.25 남침전야(前夜)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위험한 군사력 불균형이 조성되고 있다. 핵과 미사일 개발을 주축으로 하여 북한이 발전시켜 온 비대칭형 대량살상무기 체계가 이제 완성되어 언제든지 실전(實戰)에 투입될 수 있는 단계에 와 있는 것이다. 김정은(金正恩)의 북한은 이에 대하여 무려 아홉 차례의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제재 결의를 앞세운 대북 제재를 통하여 북한 핵의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불가역적인 해체) 수락을 강요하고 있는 국제사회의 압박에 집요하게 저항함으로써 한반도 뿐 아니라 국제 평화에 대한 위협을 감소시키는 데 불응하고 있다.

 

그런데, 이 와중에서 문 대통령의 요령부득한 평화론이 등장하고 있다. “우리의 외교와 국방의 궁극적 목표는 한반도에서 전쟁의 재발을 막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한반도의 평화전쟁 재발 방지는 등가(等價)의 절대적 동의어(同義語)인 것처럼 들린다. “‘전쟁만 막으면 평화는 달성된다는 식이다. 문 대통령은 북핵 문제의 해결에도 이 같은 설익은 평화론을 공식화(公式化)하여 등장시키고 있다. “어떤 우여곡절을 겪더라도 북핵 문제는 반드시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북핵 문제 해결에 적용되고 있는 문 대통령의 평화론이 껍데기만 베껴보면 1930년대의 영국 조야(朝野)를 혼란의 와중으로 몰아넣은 끝에 결국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의 참화(慘禍)를 유발했던 유화론(宥和論Appeasement)’의 재판(再版)이라는 데 있다. ‘유화론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많은 경구(警句)들이 존재한다. “‘유화론이란 동물원 관리사가 자기를 마지막으로 잡아먹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악어에게 고기를 주는 것과 같다는 것이 그 한 사례다. “분규를 회피할 목적으로 침략자에게 정치적 또는 물질적 양보를 하는 행위라는 유화론의 사전적(辭典的) 정의(定義)도 맥락이 같기는 마찬가지다. 챔벌린(Neville Chamberlain)유화론이 히틀러(Adolf Hitler)의 제2차 세계대전 도발을 막지 못했다는 것은 역사다.

 

문 대통령의 동분서주하는 평화팔이 행각(行脚)이 보여주는 것은 문자 그대로 유화론자의 민낯이다. 그 과정에서 그가 레이건(Ronald Reagan) 40대 미국 대통령의 어록을 차용(借用)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는 작년 921일 유엔총회 연설 도중 평화라는 단어를 32회나 거론하면서 난데없이 평화는 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분쟁을 평화로운 방법으로 다루는 능력을 의미한다고 했던 레이건의 어록을 인용하여 얼치기 문재인 판 평화론의 합리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 같은 문 대통령의 레이건 어록 인용에는 중대한 어폐(語弊)가 있다. 문 대통령이 말하는 평화와 레이건이 말하는 평화는 그 사이에 천양지차(天壤之差)가 있는 상이한 평화였기 때문이다.

 

평화문제에 관한 레이건의 생각은 문재인 대통령의 그것과는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의 것이었다. 레이건은 대소(對蘇) 봉쇄라는 초강경전략으로 구소련의 와해와 동독의 붕괴 및 동유럽 공산권의 와해와 지구 차원에서 동서 냉전의 종식을 초래한 장본인이다. 레이건의 평화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적자생존(適者生存)의 결전(決戰)에서 공산주의의 패망을 대전제로 하는 평화였다. 그는 그가 말하는 평화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인권 그리고 민족 자결과 법의 지배 등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는 공산주의 필패론(必敗論)’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 같은 신념에 입각하여 우리는 오로지 힘을 통한 평화를 추구한다. 힘이 없으면 반드시 침략을 유발한다고 역설하면서 1987612일 베를린 장벽 앞에 서서 고르바체프 서기장, 당신이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그리고 진정 소련과 동유럽의 번영을 바란다면, 이곳(브란덴부르크 문)으로 와서 이 문을 개방하시오. 고르바체프 씨, 이 장벽(베를린 장벽)을 허무시요라는 사자후(獅子吼)를 토했었다. 그로부터 2년 뒤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다.

 

평화를 논하는 데 레이건을 거론하려면 문재인 대통령은 공부가 좀 더 필요한 것 같다. 문 대통령이 다음번에 레이건을 다시 거명하려면 베를린 장벽 앞에서의 레이건의 사자후를 본뜨지는 못할지라도 그에 앞서서 폴 켄고르(Paul Kengor)2006년에 간행한 <레이건의 십자군(Reagan's Crusade)>을 한 번 읽어 볼 것을 권고한다. [이 책은 2008<조갑제닷컴>이 한국어로 번역하여 출판했다.]

 

[ 2018-11-09, 00:01 ] 조회수 : 565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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