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짐을 들어주는 사람과 남에게 짐을 지우는 사람
2019년은 ‘나는 어느 쪽인가?’를 자성하며 ‘國家에 대한 사랑 운동’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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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인생에서 잘난 척하며 사는 이는 사람으로 칠 수 없잖아요’라며 세상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눠 설명한 미국 여류시인 엘러 휠러 윌콕스(Ella Wheeler Wilcox:1850~1919)는 시(詩) ‘당신은 어느 쪽인가요?(Which Are You?-장영희 교수 역-)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말하는 이 세상 사람의 두 부류란/ 짐 들어주는 자와 비스듬히 기대는 자랍니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요? 무거운 짐을 지고/ 힘겹게 가는 이의 짐을 들어주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남에게 당신 몫의 짐을 지우고/ 걱정 근심 끼치는 기대는 사람인가요?"
  
  2019년 기해년(己亥年) 새해는 ‘나는 남의 짐을 들어주는 쪽인가, 남에게 짐을 지우는 쪽인가?’ 사회 도덕적 측면에서 그리고 인간 본연의 측면에서 마음 속 깊이 자성(自省)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국민 대각성의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이처럼 비인간화 되고 거짓말과 속임수와 부도덕 행위가 정의(正義)처럼 행세하는 불량사회로 전락한 절대 원인은 도덕성의 붕괴에(잘못된 정치적 이념에 의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정직하고 올곧아야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을 잘해야 성공하고, 배신과 선동과 술수를 잘 부려야 출세하는, 이런 막장 드라마 같은 저질 사회에서 어떻게 양심의 소리가 나올 수 있고, 진정한 민주주의가 자랄 수 있으며, 젊은이들의 미래가 밝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앙드레 모로아는 “국민도덕이 붕괴된 뒤엔 민주주의는 성립될 수 없다.”고 말한 것 같습니다. 어찌 앙드레 모로아뿐인가요. ‘차이메리카(Chimerica)’라는 신조어(新造語)로 중국과 미국의 공생관계를 설명한 니알 퍼거슨 교수도 “국가의 힘은 국방력과 경제력 등 물리적 요소에 원칙, 신뢰, 정당성, 그리고 도덕적 요소를 갖추는 데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어떻습니까? ‘국가의 힘’의 원천이 되는 국방력과 경제력은 물론 원칙, 신뢰, 정당성, 거기에 도덕성까지 총체적으로 무너져 내린 양아치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성(自省)의 자세부터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차 대전 후, 일본 외교관이던 가세 도시가츠(加瀨俊一)는 일본 패망 원인에 대해 “결국 우리는 전장(戰場)에서 우월한 무기에 패배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신적인 경쟁에서 좀더 고귀한 사상에 패배했던 것입니다. 진정으로 중요했던 것은 대수학의 힘을 초월하는 ‘도덕성(道德性)’이라는 문제였습니다.”라는 자성(自省)어린 말을 남겼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런 자성어린 고백을 할 양심 있는 지식인, 사회지도자, 종교지도자, 그리고 정치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도스토에프스키는 ‘정치는 국가에 대한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국가에 대한 사랑’은 역사박물관에나 가야 겨우 흔적이나마 찾아볼 수 있게 된 막장드라마 같은 참담한 현실 속에 맞은 2019년은 ‘나는 어느 쪽인가?’를 자성하며 ‘국가에 대한 사랑 운동’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독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이 교회에서 시작한 작은 ‘평화의 기도회’가 독일통일의 물꼬를 튼 것처럼 말입니다.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건국 주역들이 온갖 악조건 속에서 대한민국을 건국할 수 있었던 원동력 역시 ‘국가에 대한 사랑’과 ‘남의 짐을 들어주는 아름다운 인간사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오늘의 대한민국의 영광은 그런 위대한 시대정신이 ‘공산주의를 인류최대 악(惡)'으로 규정하고 단죄한 역사적 산물이라는 말입니다.
  
  미국을 지탱해주는 원동력은 필그림 파더들(Pilgrim Fathers)의 개척정신과 건국대통령을 비롯한 건국주역들(American founding fathers)의 건국이념을 마음에 다시 새기는 국민 대각성 운동이 국민들에게 새로운 역사의식으로 이어지면서 오늘의 미국을 지탱해주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합니다.
  
  미국의 필그림 파더들의 ‘개척정신’과 건국주역들의 ‘건국이념’이 국민 대각성 운동을 통해 새로운 역사의식으로 되살아나 미국을 지탱해주는 원동력이 되었다면 우리라고 못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먼저 750만 해외동포들이 앞장서 ‘국민 대각성 운동’의 촛불을 든다면 그 불길이 시너지 효과를 내 조국의 하늘을 뒤덮는 횃불로 번지리라고 믿습니다. ‘국가에 대한 사랑’은 바로 여기서 솟아날 것입니다.
  
  하지만 엘러 휠러 윌콕스 시인이 세상 사람을 ‘남의 짐을 들어주는 사람과 남에게 자기 짐까지 지우는 사람’으로 분류한 것처럼, 촛불도 두 가지로 분류해서 다루어야 합니다.
  
  원래 촛불의 상징은 평화와 겸손, 그리고 사랑입니다. 니콜라이 교회의 역사를 설명하는 안내문 중에는 평화를 가져온 ‘촛불’과 ‘기도’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촛불을 들려면 두 손이 필요했습니다.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한 손으로 가려야 하기 때문이죠. 촛불을 쥔 손으로는 돌멩이와 몽둥이를 들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촛불을 든 손으로는 폭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촛불은 ‘평화’와 ‘사랑’과 ‘거룩함’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문빠들의 촛불은 폭력(언어폭력도 폭력이다)과 거짓말과 선동, 그리고 악성루머와 적색바이러스를 생산해 내면서 모든 국가질서를 파괴해버렸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촛불이 아닙니다. 악마의 촛불, 저주의 촛불이고 거짓의 촛불입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촛불은 ‘평화’와 ‘사랑’과 ‘거룩함’의 촛불이어야 합니다. 거기서 도덕을 바탕으로 한 ‘국가에 대한 사랑’이 싹트고, 거기서 ‘국민대각성운동’의 원동력이 생겨날 겁입니다.
  
  문제는 대한민국을 이념적으로만이 아니라 윤리 도덕적으로 완전히 망쳐놓은 부도덕한 종북세력이 정국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과 여성 대통령의 나체그림을 거리에 내걸었는데도 박수를 보내는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입니다. 관객이 없는데 광대들이 굿판을 벌이겠습니까? 문제는 바로 지나친 부(富)와 지나친 자유에 취한 의식 없는 국민입니다. 국민이 깨어나야 합니다. 자신들의 자녀들이 광화문 광장에 걸린 여성 대통령의 나체그림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겠느냐를 죄인의 심정으로 뒤돌아 봐야 합니다.
  
  저질 포르노 그림을 국회에 걸어놓고 시시덕대는 양아치만도 못한 한심한 의식수준의 눈으로 역사를 보면 그 역사가 어떻게 비쳐지겠습니까? 나라 혼은 병들고 역사는 저질 포르노 수준으로 전락하게 되겠지요. 국가기반을 좀먹는 모든 사회악(惡)은 이런 저질집단에서 나온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인간은 가장 위험하고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과감하고 가장 용감한 행동을 하는 법이다.” 데카르트의 말입니다. 지금 한국은 6·25 이후, 가장 위험하고 가장 절망적인 고비를 맞고 있습니다. 테카르트의 말대로라면 대한민국 국민은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과감하고 가장 용기 있는 행동을 펼칠 때라고 생각합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논란의 여지가 많은 정책을 결절할 때는 “양심이 가르치는 쪽을 택하라!”는 단 한 가지 기준에 따른 원칙이 세계질서를 바꾸어 놓은 것처럼, ‘국민의 양심’이 가르치는 쪽을 따라 결단하고 행동하면 2019년의 ‘운명의 여신’은 반드시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역사에서 배운 것이 바로 그런 거 아닌가요?
  
  2019년 새해를 맞으며 특별히 생각해야 할 문제는 용어선택의 문제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사회에 ‘진보, 좌파’가 어디 있습니까? 왜 종북 주사파를 ‘진보, 좌파’로 격상시켜 스포일 시키느냐는 것입니다.
  
  정치적 좌우 개념은 (적어도 내 상식으로는) 목표(목적지)는 같은데 다만 오른쪽 길을 통해 가느냐, 왼쪽 길을 통해 가느냐의 방법론적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우리가 좌파라고 부르는 청와대 점령 세력은 ‘자유대한민국의 번영’을 향한 우리의 목적과 달리 저들의 최종 목표(목적지)는 북쪽이라는 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좌파정권이 아니라 ‘종북정권’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그리고 헨리 워드 비쳐(Henry Ward Beecher, 1813~1887-미국의 신학자, 설교자)는 ‘진보’란 “우리에게 씨앗으로 왔던 것이 다음 세대에 가서 꽃을 피우고, 꽃으로 왔던 것이 그 다음 세대에 가서 열매를 맺도록 열심히 살면서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들에게서 이렇게 신성하고 아름다운 사상과 자세를 찾아볼 수 있습니까? 저들에게서 거짓과 선동과 술수와 종북 사상을 빼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진보’란 신성하고 거룩한 ‘말’을 저들에게 사용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것은 역사부정이고 대한민국에 대한 모독입니다.
  
  2019년 새해는 “나는 어느 쪽인가? 남의 짐을 들어주는 사람인가, 남에게 짐을 지우는 사람인가?”를 자성하며 ‘국가에 대한 사랑의’ 힘을 키우는 ‘국민 대각성의 해’가 돼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힘’뿐이라고 가르쳐준 마크 클라크 장군의 교훈을 되새겨봐야 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이란 힘 앞에서는 약하다. 그들의 무릎을 꿇게 하는 것은 오직 힘뿐이다.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서 이기는 길은 하나도 힘이요, 둘도 힘이며 셋도 힘이다. 힘, 힘, 힘, 힘을 길러야 한다.”
  
  마음속에 ‘국가에 대한 사랑’이 싹트면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 힘은 저절로 생겨날 것이며 그 힘이 ‘국민대각성 운동’을 이끌어줄 것입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2019년은 달라져야 합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1954년 8월, 은퇴한 트루먼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싸우지 않고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낼 방법은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싸우지 않고 어떻게 콜레라 병균보다 더 악성이 강한 공산주의자들을 괴멸시킬 수 있겠습니까?
  
  “악과 싸울 의지가 없는 국민에게 가혹한 벌을 내리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라고 했습니다. 건국주역들이 공산주의를 인류 최대의 악으로 규정하고 단죄한 끝에 대한민국의 ‘위대한 시대’를 가져온 것처럼, 악(촛불혁명세력)을 괴멸시키고 ‘제2의 위대한 시대’를 위해 싸우는 해가 돼야 하겠습니다.
  
  “악마의 얼굴을 보고도 침묵한다면 그 역시 악마와 다를 바 없다.” 영국 종신 상원의원 데이비드 올턴 경의 경고를 기억합시다.
  
  2019. 1. 9.
  
  
  
  
  
  
  
  
  
  
  
  
  
[ 2019-01-10, 09:0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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