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유경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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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때 명나라측 대표로 강화회담을 담당했던 심유경은 원래 근본도 모르는 뜨내기였다. 그런데 사기꾼들이 다 그렇듯이 말재주 하나는 좋았다. 병부상서 석성의 애첩과 동향인 절강성 가흥 출신이라 애첩의 소개로 석성의 눈에 들었다. 그래서 유격장군이라는 이름으로 석성의 밀사로 조선에 파견되었다.
  
  평양성에서 고니시와 강화교섭을 시작하며 명나라 사신 행세를 했다. 선조를 만난 자리에서 명나라 군사 70만 명을 파병 준비중이라고 허풍을 치기도 했다. 1593년 명나라 사신들과 함게 오사카에 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화협상 조건 '7조목'을 알게 되었다.
  
  1.명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側室)로 줄 것.
  2.양국이 우호통상을 할 것.
  3.조선 8도 중 경상·전라를 포함한 4도를 할양할 것.
  4.조선 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보낼 것 등이었다.
  
  고니시와 심유경은 명나라가 히데요시의 조건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1593년 12월 가짜 항복문서인 '관백항서(關白降書)'를 만들어 가짜 사신 고니시 조안(小西如安)을 1594년 1월 요동으로 들여보냈다. 고니시 조안은 1594년 12월 7일 북경으로 들어갔다.
  
  신종 황제는 가짜 사신인 조안에게 '일본군은 조선에서 완전히 철수할 것이며 영원히 조선을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조하라고 했다. 고니시 조안은 "황제의 말씀에 순종하겠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왕으로 봉해달라"고 했다. 이 말을 믿고 신종 황제는 사신을 보내며 히데요시에게 칙유와 왕복, 왕관, 금인을 내렸다.
  
  우여곡절 끝에 1596년 9월 2일 오사카에서 명나라 책봉사와 히데요시가 상견레를 올리고 책봉식이 열렸다. 이때 책봉사는 양방형이었고 부사는 심유경이었다. 이때 황신(黃愼)을 정사로 하는 조선 통신사 100여 명이 오사카에 도착해 있었지만 왕자를 인질로 데리고 오지 않았다고 이 책봉식에는 참석하지도 못했다.
  
  이 자리에는 히데요시 측근 3봉행을 비롯하여 유력 다이묘 40여 명을 동원했고 명나라 사신들도 자리를 꽉 메웠다. 일본 유력 다이묘들은 명나라 황제가 보낸 맞지도 않은 관복을 입고 참석햇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명 황제가 보낸 왕복과 왕관을 쓰고 나타나 한문에 능통한 승려 사이소 쇼타이(素笑承兌)에게 칙유를 큰 소리로 읽으라고 했다.
  
  고니시는 미리 쇼타이에게 칙유를 읽을 때 히데요시의 기분이 나쁜 문장은 적당히 꾸며서 읽어달라고 부탁을 신신당부를 했다. 하지만 칙유가 너무 짧고 히데요시가 아무리 한문은 잘 모른다고 해도 글자 수를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떨리는 목소리로 사실대로 읽고 말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여, 나 대명황제는 사신을 보내 그대를 일본 왕으로 봉하고 관복과 금인을 보내니 감사히 받을지어다. 그리고 백성들을 복되게 다스리고 이웃나라와도 평화롭게 지내기를 바라노라!"
  
  히데요시가 원했던 명의 황녀를 준다는 말과 조선 4도 할양 문제는 한 마디도 없었다. 히데요시의 안색이 하얗게 변하며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았다. 3봉행이 말려 겨우 진정시키자 히데요시는 떨리는 소리로 구겨진 체면을 찾으려 했다. 명 나라 사신들 앞에서 명 나라를 욕할 수는 없엇던 것이다.
  
  "명주(明主)는 일부러 사신을 보내어 나를 왕으로 봉하고 왕복과 금인을 주므로 참겠지만 조선은 절대로 그냥 둘 수 없다. 인질도 보내지 않았다."
  
  4년 동안 끌어온 강화회담은 고니시와 심유경의 사기극이 사달나는 순간 깨어지고 말았다. 양국 사신들은 추방되고 말았다. 궁지에 몰린 고니시는 정유재란 때 공을 세우기 위해 요시라를 보내 간계로 이순신을 모함하여 감옥으로 보내는 데 성공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수군이 궤멸되고 말았다.
  
  명나라의 강화교섭 주역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팔기오오(八欺五誤)' 즉 여덟 가지 기만과 다섯 가지 과오를 저질렀다는 죄를 받았다. 양방형은 파지 투옥되고, 석성은 투옥되어 옥사하고 심유경은 한성으로 돌아갔다가 처벌을 피해다니다가 1597년 봄 경상도 의령에서 붙잡혀 명장 양원에게 참수되었다. 고니시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해 할복 명령을 받았으나 야소교 신도는 자살을 하지 않는다고 해 참수되었다.
  
  이후 선조는 천조국(天朝國) 명나라만 믿고 전쟁 치를 능력도 없으면서 '강화'라는 말만 꺼내도 목을 매달아죽이라고 악을 썼다. 정유재란이 벌어졌으나 희대의 간웅이자 전쟁의 귀재였던 히데요시가 죽는 바람에 전쟁은 끝났다. 동아시아 삼국 전쟁은 결국 히데요시라는 요사스런 간웅의 야망으로 일으켜 세 나라 백성 모두를 지옥으로 몰아넣었다.
[ 2019-05-10, 18:2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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