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영감 소원이 세계일주예유”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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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가포르에서 코스타루미나스호를 탔다. 이태리 선적의 9만 2000톤의 세계 일주 크루즈선이다. 몇 년 전 평택항에서 LNG선을 얻어 타고 싱가포르까지 갔었다. 이번에는 한 달 예정으로 싱가포르에서 인도양과 아라비아해 그리고 지중해를 건너 베네치아까지 가 보기로 했다. 깊은 푸른빛을 띠고 드넓게 누워있는 바다를 미끄러지면서 나는 노년으로 건너가고 있다.
  
  배는 유럽의 노인들로 가득차 있다. 식사 때가 되면 9층 식당에는 이태리어, 독일어, 스페인어, 핀란드어, 불가리아어 각국의 언어들이 공중에서 부딪치고 들끓다가 가라앉았다. 유럽의 노인들에게 넉 달 동안 타는 세계일주의 크루즈선은 요양원 가격보다 싸다고 했다. 요양원의 구석에서 정물같이 앉아 있는 것보다 세계를 흐르는 배 위에 있는 것이 훨씬 낫다는 얘기였다. 어떤 노인은 일곱 번째 배를 탔다고 했다.
  
  죽음은 바다 위에 있다고 예외를 두지 않는 것 같다. 지난 새벽 한 시쯤 달빛조차 없는 칠흑 같은 밤바다를 가던 배가 갑자기 아라비아반도 남부의 작은 항구에 정박했었다. 배 안에서 죽은 노인을 항구에 내려놓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렇게 나그네 길에서 죽어가는 것이다. 예전에 노르웨이 근해를 지나는 배를 탄 적이 있다. 정장을 한 노인이 배의 난간을 넘어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죽음을 향해 가는 노인도 있었다.
  
  내가 탄 코스타루미나스호에는 한국 노인 부부도 몇 쌍 보였다. 배가 오만이라는 낯선 나라의 무스카토라는 항구에 잠시 정박했을 때였다. 배에서 나와 아라비아 반도의 낯선 항구도시를 버스를 타고 돌았다. 신비한 기운이 느껴지는 거무스름한 바위산들이 무심히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다. 바위산 아래 자그마한 장방형의 하얀 집들이 장난감 왕국같이 어깨를 맞대고 옹기종기 들어차 있었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은 이따금씩 한 둘 눈에 뜨일 뿐이었다. 아라비아풍의 헐거운 하얀 가운 같은 옷을 입은 남자와 검은 옷을 입고 얼굴을 가린 여인들이 흑백의 조화를 이루면서 그림자같이 길을 걷고 있었다. 버스의 옆자리에는 팔십대 초쯤 되어 보이는 노인 부부가 앉아 있었다. 어쩐지 아라비아반도와 크루즈선과는 조화를 이루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의 순박해 보이는 한국인 노인 부부였다.
  
  “어떻게 이런 여행을 하게 되셨어요?”
  
  내가 궁금해서 물어봤다. 그 배는 베네치아에서 출발해서 스페인을 거쳐 남미를 돌았다. 거기서 오스트레일리아를 거쳐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를 거쳐 인도양을 건너 홍해와 수에즈 운하를 통해 다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로 돌아가는 배였다. 그 노인 부부는 세계의 바다를 한 바퀴 도는 여행 중에 있는 것이다.
  
  “영감하고 나는 시골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어요. 그런데 영감이 여든 살이 넘더니 갑자기 세계 일주를 꼭 한번 하고 죽어야겠다는 거예유. 그래서 몇 년간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물어보고 이 배를 타게 됐어유.”
  
  노인은 말문이 터진 듯 계속 얘기가 터져 나왔다.
  
  “처음에 태평양이라는 곳을 건널 때 배가 흔들려서 멀미를 많이 했어유. 영감은 계속 기침을 하구 목구멍이 아프다고 하더라구유. 세계여행이 좋은 게 아니라 사람 잡더라구유. 외국인하고는 말 한 마디 통하지 않으니께 우리는 짐짝이예유. 그런데 한국사람 몇이 있었어요. 그중에 전에 경찰청장을 했다는 분이 있는데 얼굴을 보기만 해도 주눅이 들었어유. 그래도 오래 여행을 하면서 말을 해 보니 좋은 분이더라구요. 그럭저럭 석 달을 배에서 보내니께 이제 눈치가 훤해유. 살 만해졌어유.”
  
  “대단하시네요.”
  내가 추임새를 넣었다. 노인은 힘이 난 듯 말을 계속했다.
  
  “우리 부부는 아들을 남들처럼 공부시켜서 큰 회사에 넣으려고 하지 않았어유. 그저 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구 했어유. 우리 아들은 음식 만드는 게 취미였어요. 일본에 가서 식당에 취직해서 일을 배우겠다고 하더라구요. 그러라구 했쥬. 많이는 못 도와주고 조금 도와줬어유. 아들은 일본식당에 취직해서 청소도 해 주고 요리 시다도 하면서 일을 배웠어유. 회 뜨는 칼질도 배우고 스시도 만들고 복요리도 배웠어유. 그렇게 요리를 배워서 한국에 나와 지금 서울 강남역 부근에서 아카사카라는 이름으로 일본음식점을 냈어유. 음식을 잘 만들어유. 꼭 한번 가보세유.”
  
  “좋으시겠네요. 아드님이 성공하셔서.”
  
  “우리 내외가 여행을 온다고 하니까 아들하고 며느리가 같이 여행하는 손님들을 초청해서 식당에서 한 턱 냈어유. 아버지 엄니 잘 보살펴 달라구 한 거쥬.”
  
  우리의 의식이 바뀌고 눈이 열리고 있는 것 같다. 논 팔고 소팔아 아들 대학을 보내던 게 우리의 부모 세대였다. 아들이 대기업에 취직하거나 공무원이 되는 걸 보람으로 알던 시절이 있었다. 죽는 순간까지 개미같이 일만 하다가 죽는 게 부모 세대의 의식이었다. 늙은 엄마는 아들이 음식점을 하는 걸 자랑하면서 그 음식점의 적극적인 선전원이었다. 노인 아버지는 소풍나온 지구를 한번 둘러보고 가는 게 소원이었다. 진짜 잘산다는 것은 그런 의식의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 2019-05-10, 18:3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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