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인 조르바의 후예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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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4월 24일 수요일 새벽 그리스 남단의 필레누스항에 내가 탄 루미너스호가 닻을 내렸다. 사오 층 되는 낡은 건물들이 부두의 도로를 따라 어깨를 맞대고 서 있었다. 건물 사이의 언덕길이 보이고 그 위의 도로로 이따금씩 차들이 오가는 게 보인다. 나는 배에서 내려 터미널 앞 광장으로 나왔다. 노란 택시들이 몇 대 서 있다. 택시 앞에 서 있던 턱수염이 거뭇하고 코가 우뚝한 삼십대쯤의 남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택시 기사 같았다.
  
  “코린트 지역에 있는 성경 속의 교회를 가려고 하는데 알아요?”
  “압니다. 고속도로가 막히지 않으면 한 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지역입니다. 저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가기 위해 머물렀던 나루터도 안내할 수 있습니다. 200유로에 서비스하겠습니다.”
  “좀 싸게 합시다.”
  
  “이 택시는 다른 차보다 좋은 벤츠입니다. 그리고 저는 영어와 그리스 역사에 대해 특별교육을 받고 자격증을 얻은 사람입니다. 깎아 달라고 하시니 180유로까지 양보하겠습니다. 그 밑으로는 흥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잠시 후 내가 탄 택시는 필레우스항 뒤의 굽이도는 산 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밑으로 멀리 정박해 있는 내가 타고 온 배가 보였다. 택시기사가 입을 열었다.
  
  “이 항구는 고대 아테네와 페르시아 군대 사이에 살라미스 해전이 벌어질 때 페르시아의 다리우스황제가 배를 이끌고 들어왔던 포구죠. 아테네의 배들이 페르시아의 배들을 섬의 좁은 곳으로 유인해 격파했죠. 여기서 승전 소식을 가지고 아테네까지 간 게 마라톤의 기원이 됐죠.”
  
  그가 잠시 자신을 소개할 필요가 있었는지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원래부터 택시기사가 아니었습니다.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로봇 연구소에서 일했습니다. 그러다 국가부도가 나고 해고를 당했죠. 인생 2막이 시작되고 그 무대에서는 택시운전사가 됐습니다.”
  
  그리스가 국가부도가 났다는 보도를 신문에서 본 기억이 떠올라 물었다.
  “국가 부도가 나니까 현실에서 어떤 피해가 있습니까?”
  “저 같이 해고되기도 하구요. 십년 전에 비해 모든 사람들의 월급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가족을 데리고 살기가 힘들어졌죠.”
  
  젊은 그를 보면서 나는 그에게 우회해서 물었다.
  “앞으로의 꿈이 있다면 뭡니까?”
  “저는 제 원래 희망을 접었습니다. 막상 택시운전을 해 보니까 이 직업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삶의 목적이 굳이 돈이 다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돈은 가족과 건강하게 먹고 살 정도만 필요합니다. 택시운전을 하는 제가 오늘 바라는 건 손님의 만족한 미소입니다.”
  
  그 말에서 아직 젊은 그가 의외로 깊은 내면을 가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 말을 들으니까 희랍에 와서 카잔챠스키의 소설 ‘희랍인 조르바’의 주인공을 보는 느낌입니다. 당신이 조르바입니까?”
  내가 말했다.
  
  “손님의 꿈은 뭡니까?”
  그가 운전대를 잡고 시선을 양옆에 밝은 회색의 바위 사이에 푸른 나무들이 점점이 박혀 있는 하이웨이를 보면서 물었다 .
  
  “저도 희랍인 조르바 같이 자유로운 영혼으로 사는 게 저의 꿈이었어요. 홀로 천천히 자유롭게 말입니다. 돈은 지금 타고 온 배삯 정도는 벌어야죠.”
  
  백 미러에 비친 그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번졌다. 그가 나를 어느 조용한 해변가로 데리고 갔다. 모래밭으로 잔물결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 한 쪽으로 오래 전에 만들어진 듯한 석축으로 된 작은 포구가 있었다. 그가 나를 택시에서 내리게 한 후 그 포구 앞으로 데리고 가면서 설명했다.
  
  “이 포구는 사도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고 에베소로 향해 떠날 때 배를 탔던 바로 그곳입니다.”
  
  바닷가에는 작은 그림 안내판 하나가 외롭게 서 있었다. 그림 안에는 돛을 단 작은 배가 포구 앞에 떠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그는 단순한 택시운전사가 아니었다. 택시라는 방법을 통해 진리를 따라가는 구도자 같았다.
  
[ 2019-05-16, 18:1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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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답과오답    2019-05-16 오후 6:40
타인을 구도자로 보는 선생님의 시각이 부럽습니다
아무튼 오늘도 좋은 글 깊은 내용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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