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있는 곳이 자기가 살 집’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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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목 안에 있는 작은 양복점 주인이 마루에 앉아 무심히 손바닥만한 뒷마당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에 시선을 던지고 있다. 늙은 그에게 양복을 주문하러 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마루의 뒤쪽에는 가봉하기 전의 양복을 입혀보는 사람의 상체 모양의 마네킹이 먼지를 뒤집어 쓴 듯이 묵묵히 서 있었다. 기술자인 그는 인생의 황혼까지 쓸쓸하게 작업장을 지키고 있었다. 그의 작업장은 도로를 면해 있는 집의 일부였다. 일본 드라마의 한 풍경이었다.
  
  어린 시절 동대문 밖에 있던 우리 동네를 떠올리면 일터와 집이 붙어있는 경우가 많았다. 좁은 골목 안에 있던 한의원은 집의 구석에 있는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어둠침침한 방에서 진맥을 보고 침을 놓았다. 길거리의 약국도 가게의 뒤쪽에 있는 쪽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집 마당이었다. 쌀가게도 어둠침침했다. 그 안쪽에는 구들을 놓은 작은 방이 있었다. 그 방 창호문의 손잡이 부분에 붙인 작은 유리를 통해 주인은 밖을 내다보았다. 동네 의원도 진료실은 앞에, 살림집은 뒤에 있었다. 유사시 온 가족이 힘을 합치기 쉬운 시스템이었다.
  
  나는 한동안 지하철을 타고 여러 시간을 소비하면서 사무실로 출퇴근했다. 그러다가 법원 뒷골목의 작은집 한 채를 사서 개인법률사무소를 차렸었다. 일층은 사무실이고 이층은 우리가 사는 집이었다. 아내는 사무실 입구의 벽에 예쁜 그림도 그리고 작은 뒷마당에는 능소화를 얻어다 심었다.
  
  나는 그릇이 작고 능력도 부족했다. 뒤돌아보면 변호사 자격증을 얻은 고시에 붙었다는 것도 내게는 기적이었다. 주제를 알고 큰 걸 바라지 않았다. 어쩌다 찾아오는 의뢰인의 상담을 해주고 법률서류를 써 주었다. 진정서나 탄원서도 써 줬다. 작은 서류 한 장에도 그들의 애환이나 삶이 조금이라도 담길 수 있도록 마음을 썼다. 무슨 일이건 분수에 맞는 착실한 일이란 크건 작건 귀한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나는 일본 드라마에서 본 양복쟁이처럼 적막한 사무실에 앉아 떨어지는 빗줄기를 무심히 보는 나이가 됐다. 시력이 떨어져 눈이 침침해졌다.
  
  인도의 철학서를 보면 늙으면 숲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도시에서는 쓰레기지만 숲에서는 신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편백나무가 들어찬 남쪽에 있는 시골 마을을 가 봤다. 그곳에 작은 집을 짓고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 보길도 바닷가를 살펴보았다. 주인의 숨결이 묻은 오래된 집을 한 채 사서 바다 위에 반짝거리는 햇빛과 잔잔한 파도를 보며 노년을 보내고 싶기도 했다. 어느 날 나는 그냥 꿈만 그렇게 꾸어보자고 결론지었다.
  
  가을 계곡의 맑은 물이 흐르는 서울 근교에 집을 구했다는 친구의 얘기를 들었다. 낮에는 천국 같던 환경이 밤이 되자 지옥이 되더라는 것이다.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짐승 소리를 들으면서 부부가 부둥켜 안고 벌벌 떨었다고 했다. 제주도로 옮겨 간 부부도 밤이 되면 암흑 속에 두 부부만 고립된 채 덩그러니 남아있는 느낌이라고 했다. 나무도 옮겨 심으면 몸살을 앓듯 사람도 그런가 보다.
  
  또다른 삶의 방법이 있는 것 같았다. 법원장을 지낸 변호사 선배 한 사람은 아내가 죽고 혼자가 되자 전철역 근처에 있는 한 노인시설에 들어갔다. 칠십대 중반의 그는 시설에서 주는 이른 아침을 먹고는 지하철을 타고 그의 법률사무실로 출근한다. 찾아오는 의뢰인이 없어도 불경을 읽으면서 하루를 보내고 저녁 황혼 무렵 다시 노인시설로 돌아간다. 그가 사는 방법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백년 전 일본 신앙인 우치무라 씨는 그의 설교집 속에서 일이 있는 곳이 자기가 살 집이라고 했다. 아무리 좋은 경치도 이사하는 처음에만 보이지 며칠이면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지혜를 이 글을 읽는 분들과 나누고 싶다.
  
  
  
  
[ 2019-08-16, 18:3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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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건    2019-08-17 오후 9:50
좋은 글 또 보고 갑니다.
   1    2019-08-16 오후 8:49
항상 넉넉한 마음 가짐을 주는글에 감사드리며 일 할것 없는 집에서 콤퓨터로 댓글이나때때로 쓰고있는 자신을 돌아 보게됩니다! 나이든데다 행동도 자유롭지못해 날마다 신문보고 TV보고 뉴스를 비교해보는것이 하로의 일입니다!!! 이런것도 노년의 일 일까 생각해봅니다! 마음에 편안함을 주는 글에 다시한번 감사드리며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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