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이유’
어느 날 아내와 딸을 보러 가는 강가의 길에 멈춰 섰다.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그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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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나이 사십대 중반쯤 무렵이었다. 아내와 차를 몰고 가면서 ‘존재의 이유’라는 노래를 반복해서 들었다. 이상하게 그 노래는 나의 메말랐던 마음을 아련한 보랏빛으로 물들이는 것 같았다. 그로부터 이십 년이 흐른 어느 조용한 저녁 나는 우연히 텔레비전의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속에서 처음 보는 남자가수를 만났다. 슬픈 눈을 가진 옅은 안개같은 우수가 감도는 얼굴이었다.
  
  “음악, 그게 저의 존재 이유였죠.”
  가라앉은 듯한 차분한 목소리였다.
  “3분 동안 하는 노래를 위해서 50년을 기다린 거죠.”
  
  그의 ‘존재의 이유’라는 노래를 사람들이 흥얼거리며 좋아하는 배경에 오랜 세월을 땅 속에서 벌레로 지내다 날개가 생기는 매미처럼 살아왔다는 얘기였다. 그의 인생역정이 소개되고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그는 노랫말을 적고 혼자 흥얼거리면서 노래를 만들어보았다고 했다. 이십대 시절 음악다방 DJ를 했다. 그는 러시아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가난하고 철저히 고독했다. 구로동 시장 안 건물의 계단 밑 쪽방에서 살았다. 빛이 들지 않는 골방의 천정에서는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소리만 천둥같이 들렸다. 그는 거기서 지치고 메마른 삶에 위로를 주는 작은 노랫말을 조금씩 만들었다.
  
  외로웠던 그는 음악다방 DJ를 할 때 그곳을 찾은 여성과 결혼했다. 딸이 태어났다. 그러나 그에게는 비를 피할 방 하나 구할 돈이 없었다. 아내와 딸을 홍천의 빈 농가에서 살게 했다. 어느 날 아내와 딸을 보러 가는 강가의 길에 멈춰 섰다.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그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거기서 ‘존재의 이유’라는 노래가 태어났다.
  
  노랫말을 만들면 작곡가에게 돈을 주고 곡을 받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는 돈이 없었다. 자신이 기타를 들고 곡도 만들었다. 자신의 노래를 틀어달라고 방송국 관계자에게 부탁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노래가 든 카셋트 테이프를 재래시장 안에 있는 리어카상들에게 돌렸다. 어느 날부터 새벽시장에 옷을 떼러 온 상인들의 입에서 자신의 노래가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노래는 그렇게 세상의 바닥에서 아주 조금씩 연기같이 퍼졌다.
  
  세월이 가도 가난은 계속됐다. 기타를 메고 고물상에서 산 낡은 오토바이로 무대를 찾아 다녔다. 어느 날 그가 백화점 무대에 서려고 올라가는 도중이었다. 딸이 한 점포 앞에서 물건을 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버는 모습이었다. 그는 일기처럼 노랫말을 쓰면서 한 겹 한 겹 날들을 쌓아갔다.
  
  어느 날부터 그의 노래가 불꽃같이 세상으로 터져 나왔다. 그의 앨범이 천만 장이 넘게 팔렸다. 그의 노랫말들의 문학성이 인정되어 그는 신인문학상을 받으면서 시인이 됐다. 그의 노래비가 그가 다니던 강가에 세워졌다. 가족과 함께 사는 그의 아파트가 화면에 나타났다. 소박하고 단정한 거실의 모습이었다. 그의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
  
  “남편이 거실에 아무것도 못 놓게 해요. 연애할 때 남편은 자기가 성공하고 돈을 벌더라도 별로 바뀔 게 없을 거라고 했어요. 지금도 그걸 지키려고 하는 거죠.”
  이어서 화면에 나타난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젊어서 인생의 바닥을 쳤어요. 소중한 바닥이었어요. 그 바닥에 서 있을 때 앞에는 거대한 벽이 있는 것 같았어요. 담쟁이가 되는 수밖에 없어요. 땅에 뿌리를 박고 조금씩 벽을 타고 올라가는 거죠. 난같이 지치고 메마른 세상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노래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희망을 노래했죠. 그랬더니 노래처럼 됐어요. 인생의 벼랑 끝에 섰을 때 저는 소중한 것을 알았습니다.”
  
  몸에서 배어 나오는 삶의 철학이었다.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은 딸도 가수가 된 것 같았다. 아버지와 딸이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 2019-08-22, 22:1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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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8-24 오후 7:45
너무나 고맙고 아름다운 속 편해지는 글입니다! 항상 편안한 글주시는것 감사합니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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