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숙제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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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주 전에도 이랬다. 어떤 소설의 문장같이 안개가 군대같이 밀고 들어왔다. 하늘은 맑고 투명한데 녹내장인 나의 눈에 짙은 안개가 끼는 증상이다. 의사들은 녹내장에 포도막염이 겹쳤다고 간결한 의학적 논리로 말하고 안약을 처방하지만 나는 슬프다. 안개 속을 헤매기 때문이다. 늙어서 찾아온 병을 친구로 받아들이겠다고 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은 슬프다. 내면 깊은 곳의 또 다른 자아는 이를 완강히 부인한다.
  
  며칠 전 중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우정을 나누며 지내는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갑자기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고통을 받았다고 했다. 병원에 가니까 기능상으로 이상이 없다는 진단이었다고 했다. 의사가 본 귀는 멀쩡한데 본인은 들리지 않는 것이다.
  
  엊그제 저녁 텔레비전 화면에서 늙은 남자가 요양원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엉엉 우는 모습을 보았다. 뇌출혈로 밭에서 쓰러진 그를 지나가던 등산객이 발견하고 신고를 해 준 것이다. 그는 몸도 쓰지 못하고 말도 하지 못했다. 입에서 침을 흘리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소개하는 그의 인생역정은 하나님께 상을 받을 만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났을 때 그는 자원봉사대가 되어 제일 앞에서 구조작업을 도왔다. 언론에서 자원봉사하는 사람을 취재하려고 해도 그는 슬며시 빠졌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과거를 팔아 현재를 사는 그런 존재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횡성의 산 속 작은 오두막에서 자연인으로 살았다. 낮이면 밭을 갈고 밤이면 보랏빛 하늘에 보석같이 흩뿌려져 있는 별들을 보면서 시를 쓰는 사람이었다. 순례길 같은 인생의 마지막이 요양원에서 혼자 쓸쓸하게 죽어가는 과정이었다. 머리에 새하얗게 눈이 내린 늙은 모습의 그는 나보다도 몇 달 어렸다.
  
  장애물 경기같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하나님은 여러 장치를 해 놓으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성경 속의 이삭도 야곱도 마지막에 눈이 침침해졌다. 다윗도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 두꺼운 이불을 덮고도 덜덜 떨었다. 모두 다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인간이 죽음의 강가 나루터에서 배를 타기 전에 하나님은 고통이라는 프로그램을 입력해 놓은 것 같다. 몸에서 나사가 헐거워지고 녹물이 흘러나온다.
  
  잘 만들어진 오동나무 장도 세월이 가면 쪽이 떨어지고 부셔져서 자연으로 돌아간다. 산비탈의 고목도 수액이 빠지고 바짝 말라가다가 어느 날 조용히 쓰러진다. 인간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나는 골방에 앉아 시야가 뿌연 상태에서 믿음의 노트를 펼친다. 이런 말이 아직 성한 반쪽의 눈을 통해 가슴으로 흘러 들어온다.
  
  ‘하나님은 환란을 피하도록 만드시지 않는다. 환란을 겪게 하신다. 태울 수 있는 만큼 불타게 내버려 두신다. 환란을 피하는 것은 그것을 이기는 길이 아니다. 환란에 삼켜졌을 때라야 능히 그것을 이길 수 있다. 환란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신다. 그리하여 그 가운데서 건져내신다. 그게 진짜 구원이다.’
  
  예수도 죽음의 십자가를 앞에 두고 그 잔을 마셔야 하겠느냐며 피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그러다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죽음의 처절한 고통의 과정을 두 팔 벌리고 받아들였다. 늙어가면서 여러 가지 고통이 다가오는 것 같다. 어쩌면 아픔을 참는 과정이 마지막 숙제이고 기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의 옷깃을 여미고 인생의 마지막 나루터로 가야 하지 않을까. 죽음의 강을 건너면 연두빛 기운이 어린 밝은 봄의 들판이 펼쳐지고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가 그곳에서 활짝 웃는 얼굴로 나를 맞이할 것 같다.
  
  
  
  
  
[ 2019-08-23, 18:4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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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8-24 오후 7:26
엄선생님의 글을 대할때 마다 생을 觀照하게되는 고마운 글입니다!!! 감사할뿐 !!!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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