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직을 한 지도 삼십 년이 넘었어”
젊은이는 젊은이들대로 불확실한 삶이 힘들고 노인은 노인대로 두렵다.

엄상익(변호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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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주 가는 안과 의원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앞의 노인환자가 늙은 의사에게 진료를 받으면서 하소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홍 박사, 내가 정년퇴직을 한 지도 삼십 년이 넘었어. 요즈음은 신문 보고 텔레비전 보고 옛날에 사두었던 책을 보는 게 하루의 내 일이야. 홍 박사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시나? 술은 즐기시나?”
  노인의 목소리에는 어제가 오늘 같은 정체된 삶에 대한 지겨움이 배어 있었다.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노년의 고통인 것 같다.
  
  “저는 술을 안해요. 환자가 없어도 나와서 진료의자에 앉아 있어요. 힘이 닿는 한 일을 할 겁니다. 다만 치매가 무서워요. 그래서 저는 요즈음 사전을 가져다 놓고 한자 공부를 다시 합니다.”
  직장에는 정년이 있지만 의사라는 직업에는 은퇴가 없다. 검안기로 노인의 눈을 들여다 보던 의사가 말했다.
  “그 연세에도 눈이 아주 좋습니다. 아직 까딱없어요.”
  
  의사의 말을 들으면서 구석에 있던 나는 눈 좋은 그 노인이 부러웠다. 모든 게 잃고 나서야 그 가치를 아는 법이다. 나는 눈만 다시 좋아진다면 가진 아파트라도 팔아서 주고 싶다. 고전 속 심청이는 목숨을 팔아서 아버지의 눈을 뜨게 했다. 안과에서 나와 지하철로 집에 가는 중이었다. 옆자리에 깔끔하게 입은 영감 두 명이 얘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 모임이 아홉 명으로 시작했잖아? 그런데 다섯 명이 죽고 네 명만 남았어. 지난 주에도 친구 세 명이나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니까 영 기분이 찜찜해. 그리고 방송국에 다니던 길상이는 지금 알츠하이머에 걸렸대. 죽지는 않았지만 인생은 끝난 거지 뭐.”
  그 노인의 목소리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다.
  
  “괜찮아, 괜찮아 나이 먹으면 다 가는 건데 뭘 그래? 내가 엊그제 인터넷에서 봤는데 일찍 죽은 사람들을 나이별로 기록해 놨더라구. 예수가 서른세 살에 죽고 케네디 대통령도 사십대에 죽었더라구. 유명한 천재들이 이삼십대에 요절한 경우가 많고 말이야. 우리같이 팔십대를 넘겼으면 잘 살아온 거야. 감사해야지.”
  친구의 무릎을 두드려 주면서 다른 노인이 위로하고 있었다.
  
  얼마 전 오래전의 직장동료를 만났다. 칠십대인 그는 혼자 변두리의 다가구 주택 작은 방에서 인생의 말년을 보내고 있다. 정년퇴직을 한 그를 부인이 버린 셈이다. 더 이상 같이 살기 싫다고 그를 밀어내 버렸다.
  
  “고독하지 않아요?”
  내가 물었다.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그가 걱정스러웠다.
  
  “아니예요, 혼자 사니까 훨씬 자유로워요.”
  그는 개결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서울대를 나오고 박사학위를 따고 고위공직에 있던 사람이다.
  
  “그래도 나이가 들어가시는데 자식이나 아내가 돌봐 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내가 아프면 아내나 자식이 돌봐 줄 것 같지만 천만에요. 시간이 지나면 짜증을 내고 요양병원에도 오지 않을걸요? 차라리 간병인이 훨씬 낫죠. 걱정할 것 없어요.”
  
  “지금같이 살다가 고독사를 할 수도 있잖아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서 죽은 지 일주일 만에 혼자 살던 노인이 죽은 걸 발견했다는 얘기를 며칠 전에 들었었다.
  
  “고독하게 죽어서 몸에 구더기가 들끓더라도 그게 운명이면 받아들여야 해요. 늙고 병이 들어서 아픈 것도 죽기 전에 치러야 할 나의 의무이고 고통을 참아내는 게 나의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연금을 받고 살아가는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도심 속의 은자이기도 했다. 젊은이는 젊은이들대로 불확실한 삶이 힘들고 노인은 노인대로 두렵다. 지하철의 창으로 황혼의 붉은 빛을 담은 드넓은 한강이 내려다 보인다. 조용히 흘러가는 강물이 내게 ‘모든 것을 받아들임’이라고 속삭여 주는 얘기를 들으면서 나의 작은 골방으로 돌아간다.
  
[ 2019-08-29, 20:0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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